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5
35
“작업이 다 끝났습니다.”
자말의 보고에 혁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압둘라흐만을 봤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무사히 도착하길 빌겠소.”
대답대신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자말과 함께 수송기에 올라탔다.
“취리히로 가시오.”
“로마에서 트리폴리를 찍고 다시 취리히라…… 이거, 오늘 기록을 세우겠구먼.”
이반이 조종석에 앉아 투덜거리자 그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스위스에 도착하면 잔금을 주겠소.”
그러자 이반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혁권을 쳐다보고는 이내 팔을 앞으로 뻗어 엔진 스위치를 켰다.
“뒤로 가서 안전벨트나 메고 앉아 있으시오.”
이륙 준비를 하는 걸 보고 혁권은 몸을 돌려 조종실을 나갔다.
잠시 뒤 An-26기는 날개 양쪽에 있는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리면서 활주로를 떠나 위로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이내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내전 이후 리비아 공군은 이름밖에 안 남은 상태였기에 일단 이륙을 한 이상 혁권이 탄 수송기를 막을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폴리 공항을 떠난 수송기는 공해상으로 나가 곧장 스위스를 향해 날아갔다.
간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혁권의 옆으로 막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였다.
6시간의 긴 비행 끝에 다시 지중해를 가로 지른 수송기는 만년설이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 목적지인 취리히에 무사히 도착했다.
넓은 활주로 한쪽에 마련된 주기장에 수송기를 세워 놓고 얼마쯤 기다리자 검은색 SUV 한 대와 컨테이너 운반 차량이 빠르게 옆으로 다가왔다.
“온 것 같습니다.”
둥근 비행기 창문으로 바깥을 보고 있던 혁권은 자말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몸을 바로 한 혁권은 만약을 대비해서 Glock17 권총을 꺼내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총알을 장전했다.
철컥.
권총을 허리 뒤춤에 숨긴 그는 자말과 함께 카고 도어를 내려갔다.
수송기 밖으로 나오자 세 명의 남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둘은 틀에 찍은 듯 검은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병풍처럼 뒤에 서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경호원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미스터 김입니까?”
가운데 선 남자의 물음에 혁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사세르라고 합니다.”
“김혁권입니다.”
적당한 키에 턱수염을 기른 나사세르는 압둘라흐만의 둘째 아들로 외국 생활을 오래했는지 영어가 아주 유창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통성명과 함께 악수를 나눈 혁권은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받을 돈이 있을 텐데요.”
“아, 물론 드려야지요.”
머리를 끄덕인 나사세르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턱짓을 했다.
앞으로 걸어 나온 경호원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잔금 100만 달러입니다.”
얼른 대신 가방을 받아 든 자말은 잠금장치를 풀고는 안에 들어 있는 돈을 확인했다.
“맞습니다.”
혁권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물은 안에 있습니다.”
“다음에 또 거래를 하게 됐으면 좋겠군요.”
“인연이 있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거래를 끝낸 나사세르가 수송기 쪽으로 걸어가며 작업 지시를 내리자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시작해!”
트럭을 카고 도어 앞으로 최대한 갖다 붙이자 수송기 승무원들이 컨테이너를 고정시켜 둔 와이어를 능숙하게 풀었다.
그러고는 천장에 달린 호이스트와 전동 컨베이어로 컨테이너를 밖으로 끌어냈다.
위이이잉.
무게 배분과 균형을 고려해야 되는 선적하고 달리 하역은 그냥 화물을 내리기만 하면 됐기에 작업이 훨씬 간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업을 시작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컨테이너를 완전히 내려 트럭에 실을 수 있었다.
나사세르와 부하들이 컨테이너를 가지고 떠나자 그때서야 혁권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끝났군.”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해야 될 게 하나 더 남았어.”
혁권은 등 뒤로 따라붙는 자말의 시선을 느끼며 수송기가 세워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고 도어 앞에는 이반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다들 일을 잘해 줬소.”
그러면서 혁권이 눈짓을 하자 뒤에 있던 자말이 미리 준비한 돈다발을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넘기며 액수를 가늠하던 이반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제 품속에 꽂아 넣었다.
그걸 보며 혁권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임대일이 이틀이나 남았는데, 바로 돌아갈 거요?”
이반은 난생처음 받아 보는 큰돈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승무원들을 흘깃거렸다.
“더 시킬 일이 없다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주시죠.”
그러자 혁권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 알렉산드리아
뒷마무리까지 모두 깔끔하게 끝낸 두 사람은 취리히 시내에 위치한 조그만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혁권은 자말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내전으로 치안이 불안했던 트리폴리와 달리 유럽 특유의 중세 건축미가 살아 있는 아름다운 건물, 그리고 푸른 하늘 너머로 멀리 보이는 알프스의 만년설을 배경으로 한 취리히의 모습은 마치 여행 엽서에 나올 법한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호텔 입구에서 두 사람은 도어맨이 잡아 준 택시에 탔다.
스위스까지 온 김에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운용할 계좌를 하나 만들 생각이었다.
기사에게 팁을 쥐여 주고 택시에서 내린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 자말과 함께 유리벽으로 된 10층짜리 은행 건물로 들어갔다.
일렬로 늘어선 창구 앞에 손님들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한국과 달리 취리히 은행은 마치 호텔 로비 같은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오래되어 반질거리는 대리석이 깔려 있고, 직원들이 앉아 있는 책상 역시 원목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중 한 책상 앞으로 가자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고급스러운 줄무늬 정장을 입은 직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계좌를 하나 개설하려고 합니다.”
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혁권이 하는 말에 직원은 서랍을 열고 서류 한 장을 꺼내 놓고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
“빈 칸에 필요한 정보들을 적어 주시겠습니까?”
혁권은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거 말고 비밀 계좌를 열고 싶습니다.”
그러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직원은 서류를 치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예치할 액수가 얼마나 되십니까?”
“100만 달러입니다.”
“그러시군요.”
한화로 10억이 넘는 거액이었지만 여기서는 비밀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최저액에 불과했다.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덕분에 전 세계의 온갖 검은 돈들이 몰려드는 스위스 은행에서 이 정도 가지고 대우를 받기는 어려웠다.
직원은 열쇠가 달린 제일 밑 서랍에서 아까와 다른 양식의 서류를 몇 장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설명을 했다.
“VIP 예금은 열두 자리 숫자로 된 계좌번호와 고객님께서 임의로 적으시는 이름 그리고 비밀 번호로만 생성이 됩니다. 그 외에는 어떤 개인 정보도 담고 있지 않고 고객님께서 동의할 때를 제외하고 외부에 거래 내역을 제공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돈을 맡긴 사람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철저한 비밀 보장 이것이야말로 스위스 은행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었다.
“대신 매 분기 일정한 금액의 수수료가 예치금에서 빠져나갑니다.”
자신의 돈을 맡기고 따로 수수료까지 내야 된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혁권은 앞으로 사업을 하면서 중요한 금융 거래를 이 계좌를 통해 처리할 생각이었기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최근 들어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 유지 정책이 크게 약화됐다고 하던데 만약 수사기관이나 세무당국에서 계좌 정보를 요구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기껏 비싼 수수료까지 내며 비밀 계좌를 만들어 놨는데, 그게 모두 공개되어 버린다면 오히려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그의 우려를 읽은 직원이 염려할 것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최근 미국과 EU의 압박에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정보 조회를 요구하면 최대한 협조하는 걸로 방침이 바뀌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맹점盲點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 중대한 범법 행위라는 것이 해당 국가가 아니라 스위스 법률에 의거한 경우에만 적용이 되도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거기다가 예금주를 차명이나 전혀 상관없는 페이퍼 컴퍼니로 만들어 놓는다면 더욱 추적할 방법이 없겠지요.”
기가 막힌 편법에 그는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설명을 들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차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에 따른 대처 방안이 다 마련되어 있으니 안심하고 돈을 맡기셔도 될 겁니다.”
만족한 표정을 지은 그는 직원이 서류와 함께 놔둔 펜을 집어 들었다.
빈 공란을 채우고 서류를 넘겨주자 천천히 틀린 것이 없는지 확인한 직원은 책상 한쪽에 설치된 키패드를 가리켰다.
“새로 생성될 계좌번호 열두 자리를 넣어 주십시오.”
혁권은 잠시 머릿속으로 고심을 한 뒤 손을 뻗어 키패드를 눌렀다.
그리고 이어서 비밀번호까지 입력을 하자 바로 계좌가 만들어졌다.
음모와 비밀의 대명사인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를 개설하는 것치고 생각보다 절차가 너무 간단했다.
하긴 이득이 된다면 그게 어떤 돈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받는 스위스 은행이니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서류 절차가 복잡할 이유가 없었다.
옆에 있는 컴퓨터로 뭔가를 입력하던 직원은 이내 은색 카드와 서류 봉투를 하나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예금증서와 카드입니다. 분실하실 경우에는 절차가 까다롭고 직접 오셔서 재발급을 받으셔야 되니 간수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인 혁권은 예금증서와 카드를 챙겼다.
“다른 도와 드릴 일이 있으십니까?”
“없소.”
짧게 대답을 하며 혁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인사를 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은행을 나왔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있는 객실로 향했다.
최고급은 아니었지만 붉은색 카펫이 깔린 복도는 깨끗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나 아직 성수기가 아니라서 호텔에 묵는 투숙객이 적고 조용해 더욱 그의 마음에 들었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객실로 들어간 혁권은 윗도리를 벗어 한쪽에 놔두고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위스키 한잔 갖다 줘. 얼음을 넣어서.”
“예.”
객실 한쪽에 있는 미니바로 간 자말이 온더록스 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삼분의 일쯤 채워 가지고 왔다.
“자네도 한잔하지.”
“괜찮습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반대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앉아 봐.”
“네.”
순순히 그 말에 따르는 자말을 보면서 팔걸이에 손을 내려놓자 온더록스 잔에 든 얼음이 서로 달그락거렸다.
그러고는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놨다.
“받아.”
봉투를 집어 들며 자말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
“보너스야.”
안을 확인하자 1만 달러는 넘어 보이는 돈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