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65
365
아직 전투가 시가전으로 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수시로 들려오는 폭음과 정부군의 폭격에 도시는 온통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나 어제부터 상수도 공급이 끊기고 반군이 북쪽 취수장에서 전격 철수하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여기인 것 같습니다.”
반군한테서 돌려받은 SUV를 멈춰 세우면서 운전석에 앉은 하킴이 말하자 혁권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에 보이는 커다란 3층 콘크리트 건물을 바라봤다.
바로 이들리브 국립 박물관이었는데 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고대 도시 국가인 에블라하고 관련된 점토판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수많은 유물들을 감상하기 위해 관람객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래주머니로 쌓아 올린 진지와 무장한 병사들뿐이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감정이 좋지 않은 압둘 대위 대신 카바트 사령관이 보낸 반군 장교가 턱짓을 하며 투박하게 말했다.
“날 따라오시오.”
다른 부하들은 차량을 지키면서 그대로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혁권은 자말과 하킴만 데리고 반군 장교를 따라 박물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통해 햇볕이 들어왔지만 불이 켜지지 않은 실내는 대체적으로 상당히 어두웠다.
더군다나 전시실마다 유물들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서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반군 장교가 그를 안내한 곳은 박물관 건물 지하에 위치한 수장고였다.
상당히 넓은 수장고에는 다른 곳과 달리 전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일렬로 늘어서 있는 선반마다 여러 종류의 유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수장고 한쪽에서는 반군 병사들이 혹시라도 운반 중에 파손되지 않도록 충전재를 가득 채워 놓은 나무 상자에 유물들을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있었다.
나무 상자를 본 혁권은 작게 실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건 우리가 가져온 상자들 같은데?”
그러자 반군 장교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있는 물건을 활용해야 되지 않겠소.”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무 상자를 재활용하든 말든 귀한 유물이 파손되지 않게 잘 포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기껏 어렵게 유물을 이들리브 밖으로 가져갔는데 부서진 상태라면 그것보다 허망한 일이 없을 터였다.
반군 장교가 서류를 몇 장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쪽에 넘겨줄 유물 목록이오.”
서류에는 에블라 시대 점토판부터 그리스, 로마 때의 조각상과 금화 그리고 장신구 등이 종류별로 적혀 있었는데, 수량만 거의 100점이 넘어갔다.
“사령관님이 지시하신 대로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을 위주로 해서 골랐고, 박물관에 남아 있던 소장 기록도 모두 파기시켰소.”
유명한 유물이라면 값어치가 더 크겠지만 몰래 처분하기가 쉽지 않고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가급적 출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을 가져가기로 카바트 사령관하고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유물 목록을 꼼꼼하게 확인한 혁권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반군 장교를 보면서 말했다.
“유물을 좀 살펴봐도 되겠소?”
그러자 반군 장교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몸을 옆으로 비켜 줬다.
포장 작업을 하고 있는 반군 병사들한테로 다가간 혁권은 아직 뚜껑을 닫지 않은 나무 상자에서 유물을 하나 꺼냈다.
“으차.”
유물은 돌로 조각된 여성의 흉상이었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두 손으로 들고 있기에 조금 벅찰 정도였다.
그걸 본 하킴이 뒤에 서 있다가 재빨리 다가와서는 흉상을 잡아 줬다.
흉상은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과 입고 있는 옷자락까지 아주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있었다.
“대단하군.”
고고학에 대해 잘 모르는 그였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것 말고도 화려한 로마시대 황금 술잔과 그리스식 청동 투구, 와인 항아리 등 유물의 종류가 아주 다양했고 보관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특히 그의 시선을 잡아 끈 건 다양한 형태의 황금 장식구들이었다.
고대 상당한 위치에 있던 귀부인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들은 상당히 화려하고 세공이 세밀했다.
박물관에 올 때까지만 해도 과연 이게 얼마나 이득이 될지 반신반의했지만, 유물을 직접 눈으로 보자 혁권은 잘한 선택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유물들을 더 살펴본 혁권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한쪽에 서 있던 반군 장교가 여전히 무뚝뚝한 어투로 물었다.
“다 보셨습니까?”
“다른 유물들은 계속 여기에 놔두는 거요?”
혁권이 수장고 선반에 아직 많이 놓여 있는 유물들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묻자 반군 장교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건 그쪽에서 상관할 일이 아니니 신경을 끄시오.”
그러고는 손짓을 해서 병사들한테 포장 작업을 끝내도록 지시했다.
뚜껑을 못으로 단단히 막은 반군 병사들은 이내 네다섯 명씩 달라붙어서 유물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하나씩 밖으로 날랐다.
나무 상자 개수가 많다 보니 그 작업만 해도 한참이나 걸렸다.
그걸 전부 다 지켜본 혁권은 팔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반이 도착하려면 2시간 정도 남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좋겠군.”
그러자 옆에 있던 자말이 힐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병사들이 트럭에 유물이 든 나무 상자를 싣는 걸 감독하고 있는 반군 장교를 쳐다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이번에 도착하는 수송기를 타고 가시지 않을 겁니까.”
“마지막 화물을 넘겨줄 때까지 남아 있겠다고 카바트 사령관하고 약속을 했다고 말했잖아.”
담담하게 말하는 혁권과 달리 자말은 속이 바짝 타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게 도시를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간다고 하면 저들이 순순히 보내 줄 것 같나?”
자말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기도 다 돌려받았으니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혁권이 미간을 좁히면서 자말을 쳐다봤다.
“저들과 싸움이라도 벌이자는 거야.”
“어차피 먼저 약속을 깨고 보스를 강제로 붙잡아 둔 건 반군 놈들이지 않습니까. 저희만 당하라는 법은 없지요.”
여기서 그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정말로 일을 벌일 태세였다.
혁권은 가만히 자말을 쳐다보다가 곧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일만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야.”
“보스…….”
자말이 그를 재차 설득하려는 걸 중간에 끊으면서 혁권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붙잡힌 거지만 지금은 아니야. 카바트 사령관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고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단호한 태도에 자말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제가 이곳에 머물 테니 보스께서는 수송기를 타고 먼저 떠나십시오.”
“방금 자네 입으로 오늘 오는 수송기가 마지막일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제가 남겠다고 하는 겁니다.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보스께서는 살아서 돌아가셔야 되니까요.”
“이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가 화를 냈지만 자말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을 하십시오. 보스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아테네와 다른 곳에 있는 부하들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래서 날 보고 자넬 앞장세우고 뒤로 숨으라는 거야?”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 밖으로 나가셔서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시라는 겁니다.”
애써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먼저 도망치라는 거였다.
와락 눈을 치켜 뜬 혁권이 앞으로 바싹 다가서서 말했다.
“함께 왔으니 다 같이 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해.”
“보스, 그러시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을…….”
“내 말이 우스워.”
차가운 시선으로 혁권이 쏘아보자 자말은 얼른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시키는 대로 해.”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힌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에 자말은 할 수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반이 오기 전에 먼저 가 있어야 되니까 어서 차에 타.”
“……예.”
혁권을 따라 사륜구동 차에 타려던 자말은 언제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번들거리는 눈을 한 반군 장교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엇비슷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차량에 탑승했다.
곧장 출발한 차량 행렬은 시가지를 지나서 이틀 전에 수송기가 착륙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요충지인 취수장을 내줬지만 외부에서 보급품이 들어오는 유일한 창구인 비상활주로를 지켜 내고 적이 도시 안으로 진입하는 걸 막기 위해서 반군은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착륙 장소에 도착한 혁권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정부군이 근처까지 접근해 온 것 같군.”
총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지만 가끔씩 울리는 폭음이 바로 지척인 것처럼 확실히 가깝게 느껴졌다.
뭔가 말을 하려던 자말은 반군 장교가 다가오는 걸 보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러시아 전폭기들이 조금 전에 폭격을 하고 돌아갔으니 오늘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요.”
수시로 날아와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가는 러시아와 정부군 항공기들은 또 다른 위협이었다.
라타키아 기지에 위치한 러시아 방공 부대의 눈을 속이고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하늘에서 적 항공기와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별다른 회피 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반으로서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들리브로 진입하는 타이밍을 아주 잘 맞춰야 될 뿐만 아니라 하역 작업도 신속하게 끝내야 했다.
혁권은 살짝 고개를 돌려 여전히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산등성이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전투가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착륙하는 데 지장이 없겠소?”
그러자 반군 장교가 상관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부군 놈들이 공격을 하고 있지만 사령관님이 여길 확보하기 위해 1개 대대를 투입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오.”
과연 그 방어선이 얼마나 버텨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이미 도시에 남아 거래를 끝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에 혁권은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떨쳐 냈다.
반군 장교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번들거리는 눈으로 혁권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기관총을 두 정이나 가져왔으니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거요.”
“…….”
실제로 임시 활주로로 쓰일 아스팔트 도로 좌우에 러시아제 RPK 경기관총을 설치한 픽업트럭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총구가 바깥이 아닌 이쪽을 향해 있는 모습에 정부군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부하들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반군 장교가 던진 이야기는 괜히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노골적인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눈가를 찌푸린 혁권은 상대를 지그시 노려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불필요하게 날 자극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난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오. 그리고 내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그쪽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요.”
한쪽 뺨을 실룩인 반군 장교가 눈에 힘을 주면서 그를 사납게 쏘아봤다.
혁권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보면서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양쪽 부하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전부 둘을 주시했다.
긴장된 가운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반군 장교가 먼저 길게 숨을 내뱉고는 시선을 거뒀다.
“방금 한 말대로 약속을 지키기 바라겠소.”
몸을 돌린 반군 장교가 병사들에게 아랍어로 내쏘듯 고함을 지르자 다들 흩어져 원래 하던 일을 했다.
픽업트럭 짐칸에 타고 있던 기관총 사수들도 총구를 바깥쪽으로 돌렸다.
자말이 혁권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잘하셨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긴장 풀지 말고 저쪽 움직임을 잘 살펴.”
“옛.”
대답을 들으면서 깊게 들이마셨던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