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21
421
#불타는 트리폴리
부하들한테 일을 맡긴 채 뒷짐만 지고 있을 수가 없었던 혁권은 이튿날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로 날아갔다.
입국장으로 나오자 함단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대여섯 명쯤 되는 부하들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이는 함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별말을 하지 않고 곧장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반가웠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많고 노출된 장소에서 오래 있어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항 청사를 나온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나눠 타고 곧장 출발했다.
차량이 움직이자 뒷좌석에 앉은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함단이 재빨리 지포라이터를 켜서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줬다.
깊게 숨을 빨아들이자 끄트머리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타들어 갔다.
혁권은 작게 열린 차창 사이로 후, 연기를 뱉고 함단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화물은 어떻게 됐어?”
“오늘 저녁에 아테네 외항인 피레에프스에 도착합니다.”
“화물선은?”
“부두에 정박 중입니다. 기차에서 화물이 내려지면 바로 옮겨 선적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쪽은 준비가 다 끝난 거군.”
“예.”
차창 틈으로 들리는 바람 소리가 조금 시끄러웠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트리폴리에서 추가로 들어온 정보는 없지.”
“유일하게 트리폴리 노선을 유지하고 있던 알이탈리아Alitalia 항공이 여객기 운항을 중단했고 트리폴리 항구에서도 교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점점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항구까지 그 모양이라면 화물선을 끌고 가더라도 짐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겠군.”
“최악의 경우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으음.”
짧게 침음을 흘리자 함단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급하게 화물선을 출항시키기보다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본 다음에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될 것 같군. 대신 화물은 언제든지 출항시킬 수 있게 미리 선박에 실어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생각이 많은 얼굴로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자 함단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에 싸인 채 혁권을 태운 차량은 빠르게 도로를 달려갔다.
피레에프스 항구 외곽에 위치한 본거지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트리폴리에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나요.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리는 모함메드 장관의 목소리에 그는 얼른 말을 받았다.
“괜찮으십니까? 좀처럼 연락이 안 돼서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죽다 살아나기는 했지만 난 괜찮소. 그것보다 지난번에 부탁했던 화물은 어떻게 됐소?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 모습에 혁권은 모함메드 장관 쪽의 사정이 그러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혁권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화물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가져다줄 수 있소?
“당장이라도 배를 띄울 수는 있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요?
“듣자하니 항구에서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던데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화물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항구는 우리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으니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
괜찮다고 하지만 모함메드 장관이 순간 멈칫했다가 다급히 이야기를 하는 걸 혁권은 놓치지 않았다.
화물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혁권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을 하셔야지 저도 도와 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묻지요. 항구가 안전한 것이 맞습니까.”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던 모함메드 장관은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후우. 아니라고 해도 금방 사실을 알아낼 테니 뭘 더 숨기겠소. 항구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건 맞소.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부두와 배후 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니 하역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요.
“흐음. 그렇군요.”
역시 그의 예상이 맞았다.
혁권이 미간을 좁힌 채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자 모함메드 장관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한테 그 화물이 꼭 필요하오. 이번 일을 결코 잊지 않을 테니 좀 도와주시오.
화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해 봤자 컨테이너 30개 분량의 탄약과 군수품이었다.
전차 두 대가 있었지만 구식 T-72라서 전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솔직히 이제는 보편화된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일방적으로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혁권은 생각을 한쪽 구석에 밀어 두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지요.”
-기다리고 있겠소.
어렵사리 통화가 되긴 했지만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혁권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고심을 거듭했다.
분명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모함메드 장관하고 연결된 끈이 너무 아까웠다.
최악의 경우 더 이상 리비아에서 사업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혁권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좋아. 까짓 거 해 보는 거야.”
시리아에서는 이것보다 더 위험한 일도 겪었고 애초에 이쪽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은 이상 편안하게 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리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을 집어 든 혁권은 곧장 단축 번호를 눌러 부두에 나가 있는 함단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함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보스.
“기차는 아직 도착 안 했지.”
-2시간 정도 더 있어야 됩니다.
혁권은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로 몇 시인지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밤에도 선적 작업이 가능하지.”
-물론입니다. 컨테이너가 그리 많지 않아서 자정을 넘기지 않고 일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겁니다.
“잘됐군. 그러면 아침에 바로 화물선을 출항시킬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놔.”
뜻밖의 지시에 함단은 깜짝 놀랐다.
-트리폴리 상황이 아직 어떤지 모르는데 화물선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혁권이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방금 모함메드 장관하고 통화를 했어. 그리고 어차피 넘겨줘야 될 화물인데 계속 쥐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결정을 내렸으니까 지시한 대로 움직이도록 해.”
중간에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함단도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고 지시를 따랐다.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혁권은 피곤한 듯 손가락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같은 시각 미국 랭리에 위치한 CIA 본부.
러셀 CIA 국장이 소회의실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인사를 하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비어 있는 가운데 자리로 가서 앉은 러셀 국장은 참석자들을 한차례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실링.”
“예.”
CIA에서 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실링 팀장이 고개를 돌리면서 대답했다.
“현재 트리폴리 상황은 어때?”
그러자 실링 팀장이 가지고 있는 노트북을 조작해 정면 벽에 설치된 대형 LCD텔레비전에 트리폴리를 찍은 위성사진을 띄우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샤라빌 대통령이 습격을 받은 지 48시간이 넘어가는 가운데 양측의 교전이 트리폴리 중심가는 물론이고 외곽으로 계속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 대통령 궁과 정부 청사에서 전투가 가장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정부 청사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자밀 의장 측에 점령당할 걸로 보입니다.”
실링 팀장이 대통령 궁과 정부 청사를 확대해서 보여 주자 이맛살을 찌푸리며 러셀 국장이 말했다.
“아무리 먼저 선제공격을 당했다고는 해도 정부군의 병력이 훨씬 많고 장비도 좋은데 왜 저렇게 밀리는 거지?”
“마침 습격이 이루어진 날이 라마단Ramadan 시작일이라 정부군이 방심하고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초반에 두 곳의 무기고를 탈취당한 여파가 컸습니다. 이것 때문에 현재 정부군은 극심한 탄약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날이라는 뜻을 가진 이슬람 금식월로 이 기간 동안에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을 하며 하루에 다섯 번의 기도를 올려야 했다.
가장 신성해야 될 기간이었기 때문에 설마 이슬람 원리 주의를 신봉하는 자밀 의장 측에서 이때 일을 벌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방심하다가 크게 당한 거였다.
짧게 혀를 차며 러셀 국장이 물었다.
“아부카 여단은 아직도 라스라누프Ras Lanuf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나.”
시선을 받은 실링 팀장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세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IS 잔당이 외곽에서 호시탐탐 도시를 노리고 있는 데다 다른 무장 단체들도 라스라누프를 차지하려고 눈독을 들이는 상황이라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참. 중화기로 무장된 정예 병력을 뻔히 놔두고도 쓰질 못한다니.”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러셀 국장의 얼굴에 답답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리비아 중북부 해안에 위치한 라스라누프는 원유가 나오는 유전 지역인 데다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가교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트리폴리 정부 입장에서는 어렵게 차지한 이 도시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눈물을 머금고 아부카 여단을 되돌린다고 해도 중간에 자밀 의장을 지지하는 무장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돌파해야 됐기에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당장 트리폴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아부카 여단이 도움이 되기는 어려웠다.
왼편에 앉아 있던 라이언 대테러 팀장이 러셀 국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악관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까?”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러셀 국장은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에 물었다.
“뭐랬겠어.”
찡그린 미간이 도통 펴질 줄을 몰랐다.
“IS 같은 테러 단체와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 다툼이기 때문에 군사 개입은 할 수가 없다더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친미 성향이 강한 샤라빌 정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라는 거야.”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탄식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색을 한 실링 팀장은 심각하게 말했다.
“군사 개입이 없다면 샤라빌 대통령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라이언 팀장 역시 우려를 표시했다.
“최악의 경우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자밀 의장이 정권을 잡게 되면 시리아처럼 리비아가 저희 손을 완전히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가뜩이나 중동 지역에서 러시아한테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리비아마저 친러 국가가 된다면 미국의 패권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사 개입을 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다 묶어 놓고 문제를 해결하라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