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61
461
# 탈취
혁권은 청담동 매장에 새로 마련된 사장실 소파에 앉아 하킴과 함께 백성균이 가져온 녹음 파일을 듣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물건을 트럭에 실어서 천 의원한테 보낼 계획입니다.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종원 회장 부자였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단속을 확실히 하도록 해.
-염려 마십시오.
재생을 멈춘 백성균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여기까지입니다.”
몸을 뒤로 기댄 혁권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면서 백성균을 봤다.
“그때 말한 그 비자금을 건네려고 한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흐음.”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인 혁권이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곤 백성균을 보면서 말했다.
“이거 우리가 가로채도록 하지.”
“네? 진심이십니까?”
“그래.”
백성균이 일순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태일그룹과 정권 실세가 연관된 일입니다. 자칫하다간 골치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만…….”
“나도 알고 있어.”
설마 거기까지 생각지도 않고 말했겠냐는 듯 혁권이 타박을 주었다.
그는 공기 중에 흐릿하게 퍼지는 담배 연기를 가는 눈을 뜨고 보면서 재차 얘기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한 거라는 저들이 어떻게 알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이걸 알고도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탐나는 먹잇감이잖아.”
100억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 만한 액수이기는 했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그가 천대업 의원한테 전달될 비자금을 중간에 가로챌 마음을 먹은 건 손주아의 스폰서인 김성균 사장을 흔들어 놓으려는 의도였다.
존재를 드러낸 채 직접 부딪치면 아무래도 일이 커질 수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상대가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도록 만들려는 거였다.
배달 사고가 터진다면 한동안은 이걸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하킴.”
“말씀하십시오, 보스.”
“함단한테 연락해서 동작이 빠르고 입이 무거운 녀석들로 여덟 명만 이리로 보내라고 해. 작업을 하고 바로 출국시켜 버리면 상대가 꼬리를 잡을 수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백성균은 비자금을 어떻게 이동시킬 건지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도록 해.”
“예.”
찝찝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혁권이 결정을 내리자 백성균은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그래서 어떤 놈들이 날 이렇게 만든 건지 아직 못 알아냈다는 거야!”
도정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얼굴에 온통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고, 화상을 입은 목덜미에는 깨끗한 거즈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한쪽 팔에 꽂혀 있는 링거가 도정인이 흥분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조폭 출신으로 도도엔터테인먼트 실장 직을 맡고 있는 오주호가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차에 장착되어 있던 블랙박스 메모리까지 다 빼 간 걸 보면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그래서 못 잡는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정소현, 그년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쪽을 뒤져 보면 꼬리가 나올 거 아냐!”
“이미 지시를 내려 뒀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씨팔! 그놈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올 지경이야.”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부릅뜬 두 눈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찾아내기만 하면 아주 박살을 내 놓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
납치를 당했을 때는 두려움에 떨던 도정인이었지만 풀려나자 경고를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을 세우며 앙갚음을 하려 했다.
베개 밑에서 담뱃갑을 꺼낸 도정인은 병실 안에서는 금연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한 개비를 빼서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자 몸속에 니코틴이 퍼지면서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참. 표현구, 그 개자식은 어떻게 됐어?”
“잡지사로 찾아가 봤더니 병가 중이라고 하더군요.”
“병가라고?”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도정인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교통사고는 개뿔!”
“짐작하시는 대로 구타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이빨이 나가고 팔하고 다리가 부러져서 못해도 두세 달은 병원에 있어야 된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상당한 중상이었지만 도정인은 걱정은커녕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더니 꼴좋군.”
표현구가 자신의 이름을 대지 않았더라면 납치를 당해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혹시 몰라서 충모 형님한테 이야기를 해서 조직원 네 명을 병실 앞에 세워 뒀습니다.”
정충모는 강남 일대에서 활동하는 조폭 두목이었는데, 도정인하고 사업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잘했어.”
아무렇지도 않게 담뱃불을 지지면서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백성균의 눈빛을 떠올리자, 도정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살짝 떨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조리 잘하고 계십시오.”
“그래.”
오주호가 병실을 나가자 혼자가 된 도정인은 찌푸린 얼굴로 이를 갈고는 신경질적으로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빈 종이컵에 비벼서 껐다.
뜨겁다 못해 바늘로 살갗을 콕콕 쑤시는 것만 같은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오늘은 세트장을 벗어나 야외에서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었다.
“컷! 좋아, 다음.”
작은 모니터로 촬영한 장면을 확인하는 김진 PD의 이마에도 땀이 흥건했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 종일 반사판을 들고 있어야 하는 조명 스태프나 음향, 카메라 쪽도 무더위에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티셔츠의 등판이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으니 짜증 지수가 일분일초 단위로 치솟는 것만 같았다.
“진짜 덥다, 더워. 이러다 사람 잡겠네.”
유분기 때문에 번진 아이라인을 면봉으로 다시 수정해 주면서 최현정이 투덜거렸다.
“그냥 잠시 쉬는 동안이라도 밴에 들어가 있으면 안 돼요? 거긴 에어컨을 틀어 놔서 시원할 텐데…….”
참고로 지금 옆에 없는 도형석 매니저는 밴을 지키고 있겠다는 명목으로 혼자 천국을 만끽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최현정이 매니저가 스태프들과 고락을 함께해야지 얌체같이 쏙 빠지면 되냐고 원망 섞인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도, 소현에게선 별 반응이 없었다.
“저기, 듣고 있어요?”
“으응. 네에.”
소현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최현정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 얼굴 빨간 것 좀 봐.”
열사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소현의 양 볼이 빨갰다.
“어떡해. 이거 열 내려 줘야 되는데…….”
보통 때 같으면 차가운 생수병이라도 뺨에 대 줘서 열을 빼겠지만, 지금은 한창 촬영 중간인 데다 이미 화장을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최현정이 미스트를 꺼내 얼굴에 뿌려 주자 소현이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시원하다.”
“괜찮아요?”
“응, 한 번만 더 뿌려 줘요.”
소원대로 미스트를 뿌려 달아올랐던 얼굴을 식혀 주니 그제야 소현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언니, 빨리! 소현 씨 다 죽어 가.”
“뭐?”
밴에 물건을 가지러 갔던 방영실이 멀리서 걸어오자 최현정이 호들갑을 떨었다.
옷이 물에 젖지 않도록 수건을 어깨에 둘러준 방영실은 밴에서 가져온 얼음 팩을 소현의 목에 대 주었다.
“으으, 차가워.”
“그래도 기분 좋죠? 와, 근데 오늘 날씨 진짜 역대급인 거 같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근데 영실 언니, 우리 매니저는 뭐 하고 있어요?”
“편하게 앉아서 음악 듣고 있던데.”
“치사하다, 도형석!”
최현정과 방영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소현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소현이 잠깐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반대편에서 작은 소란이 느껴졌다.
“누구 싸워?”
“아뇨. 저쪽에 누가 막고 있는 걸 뚫고 들어오려는 것 같은데…… 아, 조연출님이 가신다.”
촬영 현장에 함부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현장 통제를 맡고 있던 조연출은 황급히 스태프와 함께 뛰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저흰 저쪽에 있는 카페 직원들인데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길가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가락 끝에는 유명 카페 체인점이 하나 있었고, 직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로고가 박힌 모자와 앞치마를 함께 두르고 있었기에 딱히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 근데 왜 그러십니까?”
“단체 주문이 들어와서요. 이름이…… 정소현 씨 팬 분께서 보내시는 거네요.”
그러면서 아르바이트생은 테이크아웃 잔이 가득 들어 있는 캐리어를 보여 주었다.
“정소현 씨 팬요?”
“네. 저, 이거 들고 있기 너무 무거운데 빨리 배달하고 가 봐도 될까요?”
아무리 못해도 50개는 될 거 같은 테이크아웃 잔에 아르바이트생이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혼자서는 절대 못 가지고 갈 양이라 뒤에 따라온 다른 아르바이트생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럼 이쪽으로…….”
조연출은 함께 온 스태프에게 테이크아웃 컵을 놓아 둘 자리를 알려 주라는 말을 해 놓곤 자기는 그대로 김진 PD 쪽으로 달려갔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때마침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김진 PD가 묻자 조연출이 저쪽에서 쉬고 있던 소현 쪽을 힐끔거리며 대꾸했다.
“소현 씨 팬이 쏘는 거라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정소현 씨 팬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주문이 들어왔답니다.”
그 말을 들은 김진 PD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원. 아이돌도 아니고 신인 배우한테 벌써 조공이 들어와? 정소현 씨 인기 많네.”
그래도 스태프들 모두에게 음료수 한 잔 돌리는 것 정도는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종류였다.
게다가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김진 PD는 물론이고 스태프들도 체력이 팍팍 깎이고 있는 게 보였으므로 차라리 이참에 잠깐 숨을 돌리기로 했다.
“잠깐 휴식!”
김진 PD가 일어나서 하는 말에 스태프들이 다들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정소현 씨 팬분이 음료수를 쏘셨다니까 맛있게 먹고 다시 일합시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PD님!”
“다들 ‘소현 씨, 감사합니다.’ 해요.”
김진 PD가 던진 농담에 스태프들이 다들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바이트생이 가지고 온 음료수는 종류도 다양해서, 기본적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라떼 같은 커피 종류와 함께 시원한 에이드나 밥 대신 배를 채울 수 있는 스무디 같은 것까지 여러 가지였다.
아예 카페 메뉴를 통째로 들고 온 것 같은 다양한 종류에 스태프들은 각자 뭘 마실까 고민하며 그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떠나질 않았다.
“어머, 방금 그 소리 들었어요?”
한편 한데 모여 매니저 욕을 하던 최현정과 방영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현을 바라보았다.
“소현 씨 팬이 쐈다는데. 혹시 팬클럽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어요?”
“아뇨. 전혀 몰라요.”
소현도 깜짝 놀란 것은 마찬가지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때 최현정이 뭔가 떠올랐는지 가볍게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지난번 드라마 발표회 때 선물을 잔뜩 보내 줬던 그 열혈 팬이 또 쏜 거 아니에요?”
“맞다. 그 사람이 있었지.”
“엄청 정성이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야.”
스태프들의 이야기에 음료를 보내 준 사람이 혁권이라는 걸 눈치챈 소현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