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66
466
# 오빠가 사장님이었어?
그날 오후 교통회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준비된 연단에 송파 경찰서 수사과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차차착. 찰칵! 찰칵!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을 받으면서 경직된 얼굴로 서 있던 수사과장은 셔터 소리가 잦아들자, 설치된 여러 개의 마이크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잔뜩 모여 있는 기자들을 한차례 훑어본 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부터 오늘 오전 잠실 교통회관에서 발생한 무장 강도 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본 사건은 태일건설에서 필요한 운영 자금을 찾아 가져가던 중에 범인들의 습격을 받아 거액의 현금을 탈취당한 것으로, 현재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반응을 살핀 수사과장은 이내 다시 준비한 발표문을 읽어 내려갔다.
“범인들은 미리 준비한 무기로 태일건설 직원과 사설 경호원들을 제압하고 현금을 탈취해 갔는데, 피해액은 30억 원가량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짧은 발표가 끝나자마자 기자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질문을 했다.
“현재 SNS에 돌아다니고 있는 사건 현장 영상을 보면 범인들이 총기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가장 큰 관심사였기에 다른 기자들도 마치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눈을 번득이면서 쳐다봤다.
그러자 수사과장은 작게 헛기침을 한번 내뱉고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미리 생각해 둔 대답을 했다.
“저도 그런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동영상에서 들리는 총성은 뭡니까!”
“그건 총이 아니라 범인들이 시위 진압용 고무탄을 쏜 걸로 확인이 됐습니다.”
처음 듣는 정보에 기자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물론 시위 진압용 고무탄 역시 총포법에 의해 개인의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물건이기에 범인들의 손에 들어간 경위를 조사하는 중입니다.”
고무탄 역시 경찰에서 위험한 총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지만, 실탄이 발사된 것하고는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충격의 강도가 완전히 달랐다.
“아직 수사 중인 사건이라 많은 정보를 알려 드리지 못하는 걸 이해해 주시고 발표는 이걸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많았지만, 경찰에서 수사를 핑계로 들며 질문을 차단한 데다 데스크에서 받은 지시가 있었기에 기자들도 깊이 파고들지 않고 적당히 기사를 썼다.
방탄 처리가 된 벤츠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혁권이 무심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수석에 탄 하킴이 몸을 뒤로 돌리면서 말했다.
“보스, 기사가 떴습니다.”
“줘 봐.”
고개를 바로 하면서 한쪽 팔을 내밀자 하킴이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건네줬다.
화면에는 경찰 발표를 그대로 옮긴 여러 언론사의 기사들이 뉴스난에 올라와 있었다.
그중 몇 개를 터치해서 내용을 살펴본 혁권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역시나 태일그룹에서 손을 쓴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절대 경찰에서 이런 발표를 할 수가 없었다.
“경찰 수사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니 태일그룹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스마트폰을 되돌려 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문어발식으로 손을 뻗쳐 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바로 재벌이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그렇군요.”
“거기다가 여당 거물 정치인까지 엮여 있으니 경찰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겠지.”
“이러면 백성균까지 출국시킬 필요는 없겠습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러. 경찰은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지 않겠지만, 태일그룹까지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액수도 컸지만 은밀히 조성한 비자금을 천대업 의원한테 전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공항으로 간 팀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지?”
“별다른 문제없이 티켓을 발급받았다고 했으니까 조금 있으면 비행기에 탑승할 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혁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오후에는 미용실 예약이 잡혀 있어, 소현은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유명 헤어 디자이너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이 숍은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도 종종 잡지에 소개되곤 하는데, 건물의 모양새 또한 일반적인 빌딩 형식이 아니라 정원이 있고 내부가 탁 트인 갤러리 같은 느낌이라 독특했다.
스파처럼 손님들이 휴식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서 그렇게 지었다는데, 어찌 됐든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급이 다른 서비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은 확실했다.
“주차시켜 놓고 올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요.”
매니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현이 밴에서 내렸다.
지하 주차장 쪽으로 밴이 내려가는 것을 잠깐 지켜본 후 걸음을 떼는 순간 옆에서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소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근처에 사는 사람인지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에코백을 멘 평범한 차림새였는데, 그녀는 소현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곤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저, 혹시 스타일에 나오는 분 아니세요?”
“아…….”
“조연으로 나오시는 그분 맞죠!”
여자의 말투가 점점 확신에 찬 것으로 변해 갔다.
길거리에 혼자 서 있어도 눈에 확 들어오는 키와 뛰어난 몸매, 그리고 연한 화장임에도 빛나는 미모까지.
아무리 요즘 여자들이 잘 꾸민다 해도 이 정도의 미인이 절대 일반인일 리는 없었다.
“음, 네. 저 맞아요.”
소현이 살짝 부끄러운 얼굴로 가볍게 수긍했다.
모델 활동을 한창 할 때도 가끔씩 먼저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긴 했으나 최근엔 계속 촬영장만 오가다 보니 이런 반응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꺄악, 어떡해!”
갑자기 연예인을 만나 흥분한 그녀는 어머어머 하는 소리만 연발하더니 황급히 제 가방을 뒤져 볼펜을 내밀었다.
“호, 혹시 사인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럼요.”
소현이 웃으면서 볼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사인을 해 주려는데 필기가 가득한 연습장을 보곤 소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생이신가 봐요?”
“죄송해요. 저, 집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더워서 카페라도 가려고 나온 거였는데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녀는 군데군데 형광펜으로 그은 흔적과 낙서가 잔뜩 있는 노트에 사인해 달라고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언뜻 보인 가방 속의 참고서가 공무원용이었던 것을 떠올리고 소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긴 뭐가요. 공부, 열심히 하세요. 꼭 합격하시길 빌게요.”
“고맙습니다!”
소현의 사인이 담긴 노트를 가슴에 안고 여자가 기쁜 얼굴로 인사했다.
소현이나 친구들과 같은 나이 또래였으니 한창 놀기 바쁜 대학생일 텐데, 벌써부터 공부에 찌들어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응원하고 싶은 기분이라 소현도 그녀의 손을 맞잡고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죄송하지만 사진도…….”
기뻐하는 와중에도 빈틈없이 스마트폰을 꺼내는 것이 과연 딱 제 친구들도 할 법한 행동이라, 소현은 얼굴을 나란히 하고 셀카까지 찍어 주고선 숍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했다고 말한 후 자리로 안내된 소현은 서비스로 제공된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헤어 디자이너를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금방 왔어요.”
“흠. 어디 보자. 머릿결 관리는 잘하셨네요.”
길게 늘어뜨려진 흑발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헤어 디자이너가 칭찬을 건넸다.
보통 연예인들은 고대기 같은 걸로 스타일링을 매일 하기 때문에 결이 상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소현은 워낙 모발이 튼튼해서 그런지 손상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커트 하신다고요?”
“네. 배역 때문에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거든요.”
“어머, 아까워라…….”
“안 그래도 요즘 좀 자를까 했는데 마침 잘됐죠, 뭐.”
“그래요?”
“머리카락이 기니까 무겁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을 때 너무 힘들어요. 거의 빨래하는 기분이라니까요.”
“호호, 그건 그렇죠. 그럼 어느 정도까지 자르실래요?”
그러자 소현이 대충 귀 밑 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음. 여기까지?”
“조금 더 짧은 게 나을 것 같은데. 혹시 정해진 길이도 있나요.”
“감독님은 그냥 단발이면 다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별로 상관없을 거예요.”
“일단 샴푸부터 먼저 하고 조금씩 잘라 보죠.”
헤어 디자이너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떼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가 ‘샴푸실로 가시겠습니다.’ 하고 소현을 안내했다.
자동으로 눕혀지는 의자에 앉아 스태프의 정성 어린 두피 마사지와 샴푸 서비스를 받고 다시 돌아온 소현은 경쾌하게 찰캉거리는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거울로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에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막상 자르니까 너무 이상해요. 아, 망한 거 같아.”
“원래 처음엔 다들 어색해하세요.”
헤어 디자이너는 걱정 말라며 예쁘게 스타일링 해 주겠다고 소현을 안심시켰다.
샴푸를 하러 갔다 온 사이 매니저도 숍 안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미용실에서는 그가 할 일이 없으니 뒤의 소파에 앉아 속 편하게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 괜히 심술이 났다.
“형석 씨, 이것 봐요.”
너무 가벼워서 머리가 휙휙 돌아가는 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매니저가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소현 씨, 단발도 괜찮은데요? 뭔가 갑자기 확 상큼해졌어!”
“진짜요.”
“응, 목이 길어서 그런지 훨씬 가녀린 느낌도 들고…….”
“소현 씨는 턱이 갸름하고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라인이 예뻐서 이 부분을 드러내는 쪽이 나아요.”
헤어디자이너도 너무 잘 어울린다며 옆에서 칭찬을 해 주니 소현이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현은 매니저가 잠시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운 틈에 스마트폰을 꺼내 최대한 예쁜 표정과 각도로 찰칵 셀카를 찍었다.
“오빠한테 보내야지.”
그리고 친구들의 의견도 들을 겸 지수와 도연이 초대되어 있는 단체 채팅창에도 올렸다.
혁권은 다른 일을 하는지 금방 답장이 없었으나 친구들에게선 0.1초 만에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야, 정소현! 드디어 머리 자름!
-헐, 시발!
-와!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잘했어, 우리 애기. 궁디 팡팡!
-이참에 거꾸로 지수 네가 머리 길러 보는 건 어때?
-닥치셈. 아나운서는 단발이 생명이거든. 나 말고 네가 해라.
-옛날에 나 긴 머리였는데 네가 조선시대 아낙 같다고 놀린 건 생각 안 나지, 이년아?
-아, 몰라.
-그거 내 트라우마라고! 정신적 피해보상 언제 해 줄 거임?
-문지수 님이 채팅장을 나가셨습니다.
“풉.”
실제로 모였을 때보다 더 시끄러운 채팅창을 보면서 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요?”
“친구들한테 사진 보내 줬더니 반응이 너무 웃겨서요.”
“하긴 머리 자른 지 되게 오래 됐다니까 그럴 만도 하죠.”
매니저 역시 확 달라진 소현의 모습에 적응을 못 하겠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헤어 디자이너와 스태프들이 달라붙어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일자로 펴 주는 동안 혁권에게서도 답장이 왔다.
-머리카락 잘랐어? 너무 예쁘다.
간단했지만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문장이었다.
-긴 머리일 때도 예뻤지만 단발도 잘 어울려.
아무래도 너무 짧게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뒤늦게 한 번 더 도착한 메시지에 소현은 입꼬리가 하늘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드라이해 드릴게요.”
어느새 거의 손질을 다 끝낸 헤어 디자이너가 드라이기로 도톰하게 뿌리 볼륨까지 넣어서 스타일링을 끝마쳤다.
훤하게 드러난 뒷목을 어색한 듯 자꾸 만지작거리던 소현은 한결 가벼워진 머리카락의 무게에 만족해서 숍을 나왔다.
“내일 촬영장 가면 다들 깜짝 놀랄 거예요.”
“감독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매니저의 말에 소현도 기대된다는 것처럼 웃으면서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