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67
467
“도착했습니다.”
소현이 보낸 사진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혁권은 하킴의 말에 스마트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에 닿았다.
이제 해가 져서 대낮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승용차가 멈춰 선 곳은 인천에 위치한 빈 보세 창고 앞이었다.
공터에는 커다란 컨테이너 트레일러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바로 종합운동장 야외 주차장에서 비자금이 든 탑차를 통째로 실어 갔던 그 차량이었다.
컨테이너는 문이 활짝 열린 채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인기척이 나면서 다른 걸로 옷을 갈아입은 백성균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보스?”
“다친 곳은 없나?”
“예.”
“일을 아주 잘 처리했어.”
혁권은 믿음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백성균의 어깨를 두드렸다.
“돈은 어디에 있나?”
“가져가기 쉽도록 따로 옮겨 뒀습니다.”
백성균이 한쪽 팔을 들어 창고를 가리켰다.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자 환하게 밝힌 조명 아래 짙게 선팅이 된 대형 밴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밴을 지키고 서 있던 임영식과 지병하가 그를 보고는 깍듯한 태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 준 혁권은 밴에 시선을 줬다.
“열어 봐.”
임영식이 뒤쪽 해치게이트를 열자 비닐도 뜯지 않은 5만 원짜리 신권 뭉치가 빼곡히 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건 본 혁권은 혀를 내두르며 농담을 하듯 말했다.
“돈을 다 세어 보려면 한참이 걸리겠군.”
“친절하게 1억씩 뭉치로 묶어 놔서 액수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비자금이 실려 있던 탑차는 어떻게 처리했어?”
“근처에 있는 폐차장으로 가져가서 압착기로 눌러 고철로 만들어 버렸으니, 경찰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뒤져도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잘했어.”
깔끔한 뒤처리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돈을 안전한 곳에 옮겨 놓고 너희들은 원래대로 복귀해서 평상시처럼 행동하도록 해. 괜히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혁권은 밴 뒷자리에 빈틈없이 꽉꽉 들어찬 돈더미들을 바라보며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걸 보면 김성균이 골치 좀 썩겠군.”
그는 꽤 고소하다는 것처럼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창고를 떠났다.
이태원에 위치한 김종원 회장의 저택 서재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박상빈 비서실장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김성균 사장은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한쪽 벽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괘종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던 김종원 회장이 싸늘한 눈빛으로 김성균 사장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철저히 보안을 지켰기 때문에 저희 쪽에서 비밀이 새어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닥쳐!”
뺨을 때리듯이 말한 김종원 회장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질책을 계속했다.
“설사 천대업 의원 쪽에서 말이 샜다고 해도 네놈이 똑똑하게 행동했다면 일을 망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불만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더 변명을 했다가는 오히려 김종원 회장의 화를 돋울 뿐이었기에 김성균 사장은 마지못해 머리를 숙였다.
“그나마 제몫을 하는 것 같아서 일을 맡겼더니 변변치 못한 놈 같으니라고. 계집질이나 하고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쯧.”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자 자존심이 상한 김성균 사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무릎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김종원 회장은 그걸 보고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박상빈 실장을 봤다.
“이걸로 수습이 될 것 같나?”
그러자 박상빈 실장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성균 사장을 슬쩍 쳐다보곤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노성웅 청장과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고 주요 언론 데스크들도 협조를 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일부 조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도 포털 사이트들이 손을 써 주기로 했으니 곧 정리가 될 겁니다.”
“여론이 쏠려 있으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우니까 적당한 걸로 하나 스캔들을 터트리도록 해. 그게 제일 효과가 좋잖아.”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연예인 마약 복용 스캔들이 보도될 겁니다.”
“마약 사건이라…… 나쁘지 않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다음 슬그머니 사건을 묻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뻔한 방법이었으나 이것만큼 효과가 확실한 것도 없었다.
“대신 올해 그룹 광고 예산이 2배 정도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협조해 주는 대가로 주요 언론과 포털 사이트에 광고를 대거 집행해 주기로 하는 뒷거래가 있었다.
“이번 일이 드러나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비자금 사건이 터진다면 그 후폭풍은 가늠이 안 될 정도였기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뒤로 기댄 김종원 회장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지금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그랬지?”
“고동욱 실장입니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는 않겠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자네가 잘 단속을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종원 회장은 큰아들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 실장한테 모든 걸 맡기고 넌 이제부터 여기서 손을 떼도록 해.”
당연하게도 그 말에 김성균 사장이 크게 반발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일을 그따위로 망쳐 놓고 아직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있을 생각이냐? 헛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굴어!”
가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김종원 회장의 시선이 차마 견디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균 사장은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당장 사장 직함을 빼앗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라!”
“……큭.”
하지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삼엄한 말투에 김성균 사장은 입술을 깨물고 물러나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마치 큰 모욕이라도 당한 듯 굴욕적인 표정이었다.
고개를 떨군 제 아들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던 김종원 회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것처럼 혀를 찼다.
다음 날 아침.
혁권은 평상시와 똑같이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근처를 뛰었다.
집 안에 설치해 둔 러닝머신을 이용해도 됐지만 아침에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좋아, 비만 오지 않는다면 밖으로 나갔다.
“헉. 헉.”
마지막 100미터 정도를 남겨두고 전력 질주를 한 혁권은 양팔을 무릎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내쉬고는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로 심박수와 달린 페이스를 확인했다.
꾸준히 운동을 계속해 온 것이 성과가 있는지 체력이 처음보다 많이 좋아져 있었다.
숨을 고르고 있을 때 하킴이 다가와 이온음료가 든 물병과 수건을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많이 말랐기에 혁권은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냈다.
“아테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군.”
“예. 말씀하신 대로 보너스를 챙겨 주고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잘했어.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부하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만큼 합당한 대우를 해 줘야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혁권의 지론이었다.
거기에 맞춰 백성균을 비롯해 이번 일에 동원된 부하들에게 일률적으로 10만 달러씩 보너스를 나눠 줬다.
“그리고 예상하신 대로 아침에 이런 기사가 떴습니다.”
하킴이 내민 스마트폰을 보자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아이돌 멤버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포털 뉴스난을 가득 채우며 실시간 인기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예인 마약 사건이라…… 뻔한 스토리지만 효과는 확실하겠군.”
“이게 터진 이후부터 어제 있었던 사건 기사가 빠르게 삭제되고 있는 걸 보면 태일그룹에서 손을 쓴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겠지.”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혁권은 담담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돌려줬다.
그러자 하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저, 보스…….”
“할 말이라도 있어?”
“복잡하게 하실 필요 없이 그냥 가지고 계신 녹음 파일을 공개해 버리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스마트폰에 몰래 심어 둔 도청 프로그램을 통해 태일그룹과 천대업 의원의 은밀한 커넥션을 증명할 수 있는 녹음 파일을 다수 가지고 있었다.
이게 공개된다면 태일그룹에서 제아무리 손을 쓰려고 해도 사건을 덮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혁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수해야 될 위험이 너무 커. 김정균 하나만 잡으면 되는데, 자칫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가는 감당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해 본 하킴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딱 이 정도가 좋아.”
손에 든 이온음료를 마저 다 비운 혁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집으로 올라갔다.
태일그룹이 의도한 대로 아침부터 터진 아이돌 멤버의 마약 스캔들에 현금 탈취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형식적인 조사를 받고 있던 고동욱 실장과 사설 경호원들이 슬쩍 풀려났다.
기자들을 피해 경찰서 후문으로 나온 고동욱은 기다리고 있던 태일그룹 직원을 따라 안이 보이지 않도록 짙게 선팅을 한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고생 많았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박상빈 실장의 말에 약간 초췌해 보이는 얼굴로 고동욱이 대답했다.
“실장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대충 자초지종을 듣기는 했네만, 도대체 어쩌다가 그리 된 건가?”
그러자 고동욱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함정에 완전히 당했습니다.”
“…….”
“처음부터 거기서 현금을 넘겨준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돈을 탈취해 갈 수가 없지요.”
“자네 말대로라면 비밀이 새어 나갔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눈을 번뜩이면서 박상빈 실장이 말했다.
“어디에서 비밀이 샌 것 같나?”
“그게 저도 의문입니다. 정확한 장소를 아는 건 저희 쪽에서는 사장님과 저뿐이었습니다.”
“천대업 의원 측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박상빈 실장의 물음에 고동욱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흐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하지만 설사 짐작이 맞다고 해도 확실한 증거가 없이 천대업 의원 측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자네 의견을 염두에 두도록 하지.”
그러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외부 시선도 있고 그러니 회사에 출근하지 말도록 하게. 유급 휴가로 받은 걸로 처리해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이미 모든 걸 다 결정해 놓고 통보하는 말투였다.
자기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동욱은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박상빈 실장은 격려하듯 등을 두드리고 이번엔 다시 부드러워진 어조로 그를 달랬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어. 그동안 못 갔던 휴가를 즐긴다고 생각하고 편히 쉬게나.”
“……예.”
과연 말처럼 그게 그리 쉽게 될까?
이대로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어렵게 쌓아 온 믿음을 한순간의 실수로 상당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에 고동욱은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