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65
465
그 시각 탈취 현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잠실 종합운동장의 야외 주차장.
비자금이 가득 실린 탑차가 도착하자 백성균이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서둘러!”
언제 수배가 내려져 뒤를 추적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백성균의 외침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임영식과 지병하가 컨테이너 트레일러에 마련해 둔 단단한 철판을 아래로 내렸다.
덜컹.
철이 바닥에 닿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만들어진 발판 위로 백성균이 지체 없이 가속 페달을 밟아 탑차를 위로 올렸다.
요란한 엔진음을 내면서 움직인 탑차가 커다란 컨테이너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곧장 철판을 올리고 문을 닫아 걸으니 그야말로 감쪽같았다.
“CCTV는 확인했지?”
야외 주차장 한쪽 구석에 높이 세워진 CCTV를 보며 백성균이 묻자 임영식이 얼른 대답했다.
“몇 달 전부터 고장 난 채 방치되어 있는 데다 여긴 사각지대라 찍힐 염려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설치된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투박한 모양에 군데군데 칠까지 벗겨진 모습에 백성균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여길 뜨자.”
“예.”
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본 백성균은 곧장 컨테이너 트레일러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럼 출발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1종 특수면허를 따서 트레일러를 운전할 수 있는 지병하가 약간 들뜬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크게 선회를 하면서 트레일러가 야외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자 백성균은 그때서야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면서 살짝 긴장을 풀었다.
과천 경마공원.
타아앙!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자 경주마들이 일제히 뛰어 나와 앞만 보며 결승점을 향해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관람객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
통유리로 앞이 가려진 5층 모니터 석에 있던 혁권도 한쪽 손에 마권을 쥐고는 일어선 채 배팅한 경주마를 응원했다.
“그래. 달려!”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지르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조금만 더! 안 돼.”
응원한 보람도 없이 배팅한 경주마가 결승점을 앞두고 선두에서 밀려나 4위로 들어가자 혁권은 인상을 쓰며 좌석에 털썩 앉았다.
“다 와서 역전을 당하다니. 젠장.”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탄식과 우승마를 맞춘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실 때 하킴이 조용히 다가왔다.
옆 자리에 앉은 하킴을 힐끔 쳐다본 그는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물건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대답을 들은 혁권은 선글라스를 쓴 눈을 반짝였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백성균이 물건을 챙겨서 모처로 옮기는 중이고 일을 맡았던 인원들은 오후 4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뜰 예정입니다.”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 뒤를 추적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작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불러온 부하들을 곧장 출국시키는 걸로 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을 시각이었다.
“태일그룹 반응은 어때?”
“아직 별다른 조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찰도 현장을 통제하는 걸 제외하곤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수배령도 안 떨어졌단 거야?”
“그렇습니다.”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던 혁권은 이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황을 짐작했다.
“비자금을 건네려던 걸 숨기려는 거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이 벌어진 곳이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아예 묻어 버리는 건 어려울 겁니다. SNS에도 목격 사진이 올라오고 있으니까요.”
“그래?”
보여 달라며 손을 내밀자 하킴이 화면에 SNS 앱을 띄운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넸다.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나 셀카처럼 일상적인 풍경 가운데 유독 조회와 공유 수가 높은 것이 눈에 띄었다.
급하게 찍은 듯 화면이 마구 흔들리는 데다 초점이 맞지 않아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일체형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의 모습만은 분간할 수 있었다.
크고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사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씩 대박이라며 영상을 찍은 당사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섞이기도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들 시커먼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영상 밑으로 달린 댓글 또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영화 아니냐며 어디서 촬영하고 있는 건지 묻는 이가 있는 반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리 없다고 단박에 조작이라 몰아 가는 사람도 많았다.
어찌 됐든 진짜 벌어진 사건이라곤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댓글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미 영상이 나온 이상 만약 언론에서 냄새를 맡기라도 한다면 어느 순간 TV에서 이 화면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댓글까지 빠르게 훑어본 혁권은 스마트폰을 돌려주고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아무리 태일그룹이라고 해도 이걸 다 막으려면 꽤나 애를 먹겠군.”
정부 기관에서 나서지 않는 이상 SNS로 소문이 번지는 것까지 틀어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김성균 사장의 입지를 흔들어 놓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기에 손해 볼 게 없었다.
“진행 상황을 주시하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백성균하고 나머지 두 명도 그리스로 출국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혁권은 고개를 바로 하고는 다시 경마에 집중했다.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다리 아래에 있는 강변 주차장에 들어와 멈춰 서더니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비대한 체격의 중년인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중년인은 이내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 뒷좌석으로 옮겨 탔다.
“공무로 바쁘신데 이렇게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는데 바로 김종원 회장의 심복인 박상빈 그룹 본사 비서실장이었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중년인의 정체는 노선웅 경찰청장이었다.
답답한지 윗도리 단추를 풀면서 노선웅 청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보고를 들으니 상황이 아주 골치 아프게 엮인 것 같던데, 태일그룹에서는 어떻게 할 작정이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저희 회장님께서 걱정이 크십니다.”
“일단 담당 경찰서에 함구령을 내려놨지만 SNS에 사건 현장을 찍은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기자들이 터트리는 건 시간문제일 거요.”
“주요 언론사 데스크에 협조를 구해 놨습니다.”
상당히 빠른 대처에 노성웅 청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재계 서열 상위권에 들어가는 태일그룹이 가진 영향력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얼마쯤 벌수는 있어도 일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는 미봉책이기에 이렇게 청장님을 만나 뵙자고 한 겁니다.”
노성웅 청장은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노성웅 청장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총기 사건이오. 그런데 그걸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솔직히 그쪽 부탁을 받고 사건을 잡아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거란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 대답이 뭔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알겠구먼.”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지만 박상빈 실장은 이럴 거라는 걸 예상한 듯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사건을 아예 없는 걸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금만 내용을 바꿔 주셨으면 합니다.”
“…….”
다리 밑에 놔둔 하드케이스 가방을 박상빈 실장이 집어 들어 노성웅 청장한테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저희 측에서 준비한 성의입니다.”
그는 박상빈 실장을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말 대신 손을 움직여 하드케이스 가방의 뚜껑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100달러짜리 고액권 지폐 뭉치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50만 달러입니다. 그리고 사건이 잘 마무리되면 세종 시에 위치한 40평대 신축 아파트 한 채를 사모님 앞으로 명의 이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솔깃한 제안에 노성웅 청장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벌써 프리미엄이 2억이나 붙은 곳이니 몇 년 가지고 계시면 나중에 꽤 큰돈이 될 겁니다.”
가방을 닫은 노성웅 청장은 슬그머니 자신의 옆에 놔두면서 말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 주길 원하는 거요?”
“총이 사용된 것과 탑차를 탈취당한 걸 빼 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노성웅 청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없애 달라는 거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맹이를 쏙 다 빼달라는 거잖소?”
짜증이 난 노성웅 청장이 목소리를 조금 높이자 박상빈 실장이 웃으면서 달래듯이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진실을 감춰야 할 경우도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총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국민들이 크게 불안해할 테고, 그 비난과 추궁이 모두 경찰에 쏠릴게 분명한데, 그래서 좋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흐음.”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최근 발생한 몇 건의 강력 사건에 경찰이 초기 대응을 잘못하면서 국민들의 질책을 받고 있는데, 이번 일까지 겹친다면 분위기가 더욱 나빠질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자칫했다가는 청와대에서 분위기를 쇄신하고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선웅 청창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 거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노성웅 청장으로서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건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언론과 국민들한테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라는 거요.”
그러자 박상빈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생각해 둔 변명거리를 말했다.
“회사 운영에 필요한 현금을 찾아 돌아가던 길에 당한 강도 사건이라고 발표한다면 앞뒤가 어느 정도 맞지 않겠습니까.”
“강도 사건이라…….”
“사용된 총기도 살상력이 없는 고무 탄환이라고 하면 여론도 그리 최악으로 흐르지는 않을 겁니다. 솔직히 범인들이 고무 탄환을 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바뀌게 될 테지만 박상빈 실장의 제안대로 한다면 여러모로 부담이 훨씬 적어졌다.
고민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노성웅 청장을 쳐다보면서 박상빈 실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이미 태일증권에서 운용 자금 30억 원을 현금으로 인출해 준 걸로 입을 맞춰 놨습니다.”
하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옷을 벗어야 될지도 모르는 문제였기에 노성웅 청장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년이면 임기가 끝나시는데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유임이 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고개를 든 노성웅 청장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확인하듯 묻자 박상빈 실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으음.”
잠시 고민을 하던 노성웅 청장은 이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소. 말한 대로 해 주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약속은 꼭 지키시오.”
“물론입니다.”
일단 큰 고비를 넘긴 박상빈 실장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