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77
477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남자의 탄탄한 근육 위로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나무 향이 나는 아로마 오일을 잔뜩 바른 덕에 여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약간 젖은 소리가 났다.
묘하게 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 목 뒤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마사지 베드에 누워 있던 오주호는 만족스러운 신음성을 흘렸다.
전문적으로 근육을 풀어 주려면 차라리 맹인 마사지사를 부르는 것이 더 나았겠지만, 남자의 딱딱한 손바닥보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손바닥이 훨씬 기분 좋은 것은 당연했다.
오주호는 눈을 살짝 뜨고 마사지 베드 아래로 보이는 여성 마사지사의 가는 다리를 구경했다.
아까 들어올 때 얼굴을 제대로 못 본 게 새삼 아쉬워졌다.
다리만 보아서는 제법 호리호리하니 날씬한 몸매 같은데, 과연 얼굴도 그만큼 예쁠지 궁금해진 것이다.
‘팁을 듬뿍 주면서 나중에 따로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슬쩍 꼬셔 볼까.’
우우웅.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오주호는 나른한 얼굴로 팔을 뻗어 한쪽에 놔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오주호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나야.”
-형님, 재광입니다.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오주호가 화를 냈다.
“인마, 직책으로 부르라고 했잖아.”
-아. 죄송합니다, 실장님.
“상섭이한테 연락이라도 온 거야?”
-아닙니다.
“이 새끼는 일을 시킨 것이 언젠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짜증을 내던 오주호는 그때서야 심복인 피재광의 목소리가 상당히 다급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미간을 좁혔다.
한쪽 팔을 들어 마사지를 잠시 멈추게 한 오주호는 얼굴을 굳힌 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무슨 일이야?”
-병원에 계시던 사장님이 납치당하셨습니다.
“뭐야!”
오주호는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옆에 붙여 놓은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병원 관계자로 변장해서 접근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당했다고 합니다.
“멍청한 새끼들!”
보나 마나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욕설을 내뱉은 오주호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어떤 놈들이 그딴 짓을 벌인 거야?”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 그리고 경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단속 확실히 시키고.”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오주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번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황급히 김상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참 동안 들리더니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다시 전화를 걸어도 똑같이 연결이 되지 않자 오주호는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 새끼가!”
혁권을 잡으러 간 김상섭하고 연락이 끊기고 같은 날 도정인이 납치되다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촤아아악.
“흐어억.”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도정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팔다리에서 지독한 통증이 몰려 왔다.
낡은 철제 의자에 손발이 케이블 타이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밤인지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나무를 넣고 불을 피운 커다란 드럼통이 한쪽에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도정인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팔을 빼내 보려고 했지만, 아프기만 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 창고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깨어났나 보군.”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 순간 도정인이 튀어 오르듯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상대가 백성균인 것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나, 날 어쩌려는 거야!”
기죽지 않으려는 것처럼 큰소리를 쳐 대던 도정인은 백성균이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자 흠칫하여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벅, 저벅.
바닥에 있는 작은 흙과 자갈들이 구둣발 아래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에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의자에 묶인 몸으로는 손발을 꿈틀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제 코앞에서 소리가 딱 멈추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턱을 콱 움켜쥐고는 위로 들어 올렸다.
“윽!”
우악스러운 힘에 도정인이 신음을 흘렸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게 무슨…….”
찔리는 것이 많았지만 도정인은 우선 오리발부터 내밀고 봤다.
“그래서 아무런 잘못이 없으시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 컥!”
말을 하고 있는 중간에 백성균이 느닷없이 상대의 뺨을 세게 후려 갈겼다.
머리가 옆으로 휙 젖혀진 채 신음을 흘리자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이러지 말고 우리 말로 합시다.”
“안 되겠군.”
“이, 이보시오.”
“일단 맞고 시작하자고.”
퍽!
“끄윽.”
명치에 제대로 주먹이 꽂히자 도정인은 숨이 턱하고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백정균은 무심한 얼굴로 쉬지 않고 구타를 이어 갔고 창고 안은 도정인의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 시각 혁권은 이태원에 위치한 샹그릴라Shangrila라는 바에 혼자 앉아 있었다.
조명을 어둡게 낮춘 가게 안은 70년대 올드 재즈 음악이 끈적끈적하게 흘렀는데, 입구 정면에 디귿 자 형태의 카운터가 있고 벽 쪽으로 박스 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주한미군으로 보이는 머리를 짧게 자른 외국인 서너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쯤 있었을까 문을 열고 들어온 심인성 과장이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으면서 맥주를 시켰다.
“샹그릴라라…… 가게 이름이 멋지군요.”
종업원이 생맥주를 가져다주자 심인성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인세의 혼잡한 격정과 풍파가 멀리 있고 늙지도 않는 그런 이상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혁권은 잠시 상대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어차피 소설 속에 있는 허상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로 샹그릴라가 있다고 해도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없군요. 불로장생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사는 건 너무나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심인성이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 웃었다.
“하긴 나도 그럴 것 같군요.”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자고 심인성을 부른 것이 아니었던 혁권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이거, 그렇게 정색을 하니 무슨 이야기를 할지 벌써부터 겁이 나는군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뭔지 말을 해 보시죠.”
쉽게 들어주겠다는 확답은 못 해 주겠다는 듯 심인성이 한 발을 슬쩍 빼면서 물었다.
“강남에 있는 조직 하나를 치려고 하는데 뒤를 좀 봐줬으면 합니다.”
그러자 심인성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지난번 마장동 올림픽파도 그렇고 이쪽으로 영향력을 넓히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의심에 찬 시선에 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전에도 밝혔다시피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되갚아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보면서 혁권이 차분하게 말했다.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심인성은 몸을 뒤로 기대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김 사장님을 건드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군요.”
“도와주실 겁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가뜩이나 요즘 이런저런 시끄러운 뉴스가 많아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이라 때가 그리 좋지는 않군요.”
“물론 그냥 도와 달라는 건 아닙니다.”
“…….”
혁권은 느린 동작으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온갖 이야기들을 듣게 되지요. 그중에 심 과장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지 궁금해지는군요.”
그가 옆자리에 놔둔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자 심인성이 집어서 내용물을 꺼내 보고는 눈썹을 좁혔다.
“이건……!”
“우크라이나에 있는 유즈마슈Yuzhmash사에서 개발한 액체 연료 로켓 엔진인 RD-250의 사진입니다.”
사진을 다시 서류 봉투 안에 집어넣은 심인성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왜 보여 주시는 겁니까?”
“추진력이 강해서 몇 개를 연결하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엔진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이지요. 실제로 러시아에서 우주로켓용으로 사용을 하고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의 차이는 탄두 부분에 뭘 실었느냐가 다를 뿐이지 기본 기술은 똑같았다.
“암시장을 통해 북쪽에서 은밀하게 이 엔진을 여러 개 구입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마 최근 북한이 개발해서 발사한 탄도미사일에 이게 사용됐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거금을 주고 구매할 이유가 없겠지요.”
“으음.”
생각지도 못한 큰 건수에 심인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내뱉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에 관련된 정보는 국정원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최우선 순위로 올려놓고 있는 거였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심인성은 그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매번 절 깜짝 놀라게 하시는군요.”
“부탁을 들어주시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대신 이번에는 가급적이면 총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명심하도록 하지요.”
머리를 끄덕이자 심인성이 서류 봉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혼자가 된 혁권은 오래된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색소폰 소리를 들으면서 맥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편 종일 김상섭과 연락이 되지 않자 오주호는 강남 중심가에 위치한 ‘람세스’로 들어섰다.
람세스는 사거리파에서 운영하는 기업형 룸살롱으로, 방만 30개가 넘고 텐프로급 아가씨 수십 명이 매일 출근하는 곳이었다.
규모에 걸맞게 이곳에서 하루에 올리는 매상만 무려 수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말단 조직원 한 명이 오주호를 보고는 꾸벅 허리를 숙이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게를 맡고 있는 마담이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어머, 오셨어요. 요즘 왜 이렇게 얼굴을 보기 힘든 거예요? 다른 데다 새 애인을 만드셨나 봐.”
나이를 모를 정도로 어려 보이는 얼굴에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마담은 가만히 있어도 은은한 색기가 흘렀다.
“사장님은?”
“룸에 계세요.”
눈치가 빠르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마담은 곧장 오주호를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왔나.”
심복인 피흥수와 함께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노석대가 오주호를 보고는 한쪽 팔을 가볍게 들었다.
눈이 찢어져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노석대는 폭력조직 우두머리답지 않게 체격과 키가 그리 크지 않고 평범했다.
손 속이 잔인하고 인정사정없어 누구든지 신경에 거슬리거나 시비가 붙은 상대의 발목 인대靭帶를 끊어 버리는 걸로 유명했다.
“그쪽에 앉아.”
“예.”
빈자리에 앉자 노석대 왼편에 있던 아가씨가 얼른 잔을 세팅하고는 얼음을 채운 뒤에 위스키를 따라 줬다.
노석대는 양쪽으로 아가씨를 끼고 앉아 있었고 피흥수 역시 한 명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봐, 마담, 옆구리가 시릴 테니까 괜찮은 애로 한 명 더 들여보내.”
“네, 사장님.”
대답을 한 마담이 일어서려는 걸 살짝 제지한 오주호는 상석에 있는 노석대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 봐.”
“도정인 사장이 납치를 당했습니다.”
술잔을 집어 들던 걸 멈춘 노석대는 정색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방금 한 말이 사실이야?”
“예.”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 눈치를 보던 마담이 얼른 아가씨들을 데리고 룸 밖으로 나가며 자리를 비켜 줬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노석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오주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