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78
478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굳은 표정에서 화가 많아 난 걸 알아차린 오주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괴한들이 변장을 하고 입원해 있는 병원을 습격해서 도정인 사장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리고…….”
“숨기는 것 없이 다 이야기를 하도록 해. 안 그러면 네놈부터 박살 낼 거야.”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걸 알기에 바짝 긴장한 오주호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섭이한테 일을 하나 맡겼는데 종일 연락이 안 됩니다. 아무래도 같은 놈들한테 당한 것 같습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노석대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면서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세게 집어 던졌다.
“야! 이 새끼야!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쨍그랑!
다행히 몸에 맞지 않고 옆으로 비껴간 술잔은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 났다.
“죄송합니다.”
오주호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화가 안 풀리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노석대가 말했다.
“누구 짓이야?”
날이 바짝 선 목소리에 오주호가 얼른 대답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놈들이 벌인 일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노석대의 부릅뜬 눈에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놈 이름.”
“예?”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을 듣고 오주호가 고개를 슬쩍 치켜들었다.
“이름 말이야, 김혁권이라고 했나?”
“아, 예. 그렇습니다.”
오주호가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대답했다.
잠깐이긴 했지만 마주친 눈동자가 번들번들하게 빛나고 있어 온몸에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었다.
“그냥 둬선 안 되겠어.”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어조로 노석대가 말했다.
“흥수야, 네가 나서야겠다. 가서 그 자식을 잡아 와.”
“알겠습니다, 형님.”
“팔다리 중에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도 괜찮으니 내 앞에 끌고 와서 무릎 꿇려 놔. 하는 김에 도 사장도 같이 데리고 오고.”
피흥수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그렇게 룸을 나가는 피흥수의 뒤를 오주호도 황급히 뒤따랐다.
안 그래도 열받아 있는 노석대와 단둘이 남게 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오주호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혼자가 된 노석대는 다른 술잔에 술을 잔뜩 따라 그대로 한입에 털어 넣었다.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등에 성난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속초에 위치한 비치 로얄 호텔에 들어선 소현은 짐 가방을 들고 옆에서 따라오는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
“내가 들어도 되는데……. 안 무거워요.”
“괜찮습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될 일인데요.”
그러자 함께 있던 최현정이 대화에 툭 끼어들었다.
“놔둬요. 이럴 때 힘쓰지 언제 쓰겠어요.”
옳은 말인데 말하는 투가 얄미워 매니저가 주먹을 드는 시늉을 하자 최현정도 왜요, 하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졸지에 중간에 끼어 버린 소현은 어설픈 웃음을 흘리면서 도와 달라는 뜻으로 방영실을 쳐다보았다.
“자기네들끼리 노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런 거예요?”
“사실은 은근히 사이좋거든.”
“아니에요!”
“아닙니다!”
동시에 고함을 빽 지른 두 사람은 또다시 시선을 맞부딪치고는 두고 보자는 듯 으르렁거렸다.
“그건 그렇고 꽤 빠듯한 일정이었네.”
방영실이 어깨에 멘 작은 배낭을 추켜올리면서 말했다.
“진짜요. 갑자기 스케줄이 잡혀서 속초까지 내려가야 된다고 해서 부랴부랴 짐 꾸린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도 사진과 함께 인터뷰까지 실어 준다니까 괜찮은 기회예요.”
최현정의 투덜거림에 이어 매니저가 달래듯이 말했다.
잡지에 할애되는 지면은 약 두 장 정도겠지만, 그것도 신인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대우였다.
“하지만 정작 촬영은 내일 오후라면서요? 그럼 오늘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잖아요.”
“어차피 호텔 비는 회사에서 내주니까 우리야 좋죠, 뭐.”
“그렇긴 한데…….”
최현정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당일치기보다는 하루 먼저 내려와서 푹 쉬고 찍는 게 더 낫잖아.”
방영실은 오히려 오랜만에 바다를 볼 수 있어서 휴가라도 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프런트에서 객실 키를 받아 온 매니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서 내리니 깔끔한 하얀색 복도가 나타났다.
소현이 코너 쪽에 위치한 전망이 제일 좋은 방을 쓰고, 최현정과 방영실은 그 옆의 2인실이었으며 매니저는 유일한 남자인 관계로 혼자 객실을 독차지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일단 짐부터 갖다 놓고 다시 모여요.”
방영실의 말에 따라 일행은 각자 카드키를 나눠 받고 자기 객실로 뿔뿔이 흩어졌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덜컥이며 열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킹사이즈 침대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실도 보통 객실보다 훨씬 넓었고, 욕실은 두 발을 쭉 뻗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의 크기에 자동으로 커튼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리모컨도 있어 바다를 바라보면서 반신욕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소현은 제일 큰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고 간단한 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 베란다에 나가서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아, 기분 좋다.”
역시 바다 쪽이라서 그런지 공기의 맛이 서울하곤 확실히 다른 것 같았다.
대충 객실을 둘러보고 캐리어를 벽 쪽에 세워 놓는 것과 동시에 밖에서 매니저가 문을 두드렸다.
“네, 나가요.”
소현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와 함께 최현정과 방영실이 함께 쓰는 객실에 모였다.
“우리 이제 뭐 할래요?”
“밥 먹기도 좀 애매한 시간인데…….”
“아까 휴게소에서 저녁 먹었으니까…… 그럼 이대로 그냥 자요?”
뭔가 아쉽다는 최현정의 말투에 방영실이 손을 들어 제안했다.
“날도 더운데 맥주 한 캔씩 하는 건 어때요?”
“오, 그거 좋다.”
최현정이 엄지를 척 치켜들자 매니저가 곤란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일 일해야 되는데 음주는 좀…….”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아요.”
“매니저 오빠가 운전할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람.”
순식간에 2 대 1로 불리한 형상이 된 매니저는 이번엔 소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현 씨는 어때요? 술 먹으면 얼굴 부을 텐데…….”
“으음.”
소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간절히 술을 바라는 두 여자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저는 반 캔만.”
“와!”
“역시 우리 소현 씨.”
동시에 환호성을 지른 두 사람은 매니저에게 빨리 사 가지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잠깐만. 돈도 안 주고 내보내깁니까!”
“에이, 나중에 후불로 줄 테니까.”
“누가 믿어요, 그런 말!”
“회사에서 준 카드 있잖아요.”
“끄으응. 알았어요.”
매니저는 억울한 얼굴로 최현정과 방영실의 등살에 떠밀려 억지로 신발을 주워 신었다.
그렇게 반강제로 편의점에 보내진 매니저가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돌아오자 재빨리 술상이 차려졌다.
안주라고는 미니바에 무료 서비스로 놓여 있던 견과류 한 봉지뿐이었지만, 창문을 활짝 열고 바다 쪽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곁들여지니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 그럼 내일 화보 촬영을 위하여!”
“위하여!”
맥주 캔을 요란스레 부딪치고 꿀꺽 한 모금 삼키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저마다 입에서 크으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맛에 산다.”
“세상에 맥주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몰라요.”
꿀꺽꿀꺽 시원스레 맥주를 삼킨 최현정은 벌써 취기가 도는 것처럼 싱글 웃는 얼굴로 자리에 늘어졌다.
어차피 방 안에서 마시는 거라 여자들이 취해도 뒷정리를 할 걱정이 없는 매니저 또한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조금씩 홀짝거리며 맛을 음미했다.
그동안 운전대를 책임지느라 본의 아니게 음주를 자제해야 됐던 터라 오늘처럼 편하게 마시는 술이 빨리 없어져 버릴까 봐 아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서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혁권은 진동이 울리자 스마트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댔다.
-방금 도착해서 숙소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동식 이사의 보고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갑자기 속초로 내려 보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잡지사 인터뷰 화보를 촬영하는 거로 했으니까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을 겁니다.
“잘했어.”
-대신 다음 달에 발행되는 잡지 5천 부를 저희가 사 주기로 했습니다.
예정에 없던 인터뷰 화보를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니 잡지사에 로비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혁권은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홍보비용을 지출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괜찮아.”
-어떤 식으로든 언론에 얼굴을 자주 노출시켜서 나쁠 건 없겠지요.
“드라마 촬영 일정에는 영향이 없겠지?”
-조연인 데다 방송국 쪽에서 소현 씨를 잘 봤는지 흔쾌히 일정을 조정해 줬습니다.
“다행이군.”
사거리파를 정리하기에 앞서 상대편에 노출된 소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인터뷰 화보 핑계를 대고 속초로 급히 피신시킨 거였다.
만약 방송국에서 드라마 촬영을 이유로 일정을 빼 주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로 곤란했을 텐데, 그게 잘 해결됐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참. 돈은 다 들어왔지?”
혁권의 물음에 정동식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입금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보다 더 들어왔습니다.
“매번 돈을 넣어 주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니까 그냥 한 번에 넉넉하게 보냈어. 그 정도면 당분간 회사를 운영하는 데 부족하지 않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괜찮은 연예인들 몇 명하고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니 조만간 성과가 있을 겁니다.
“당분간은 회사를 재정비한다 생각하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일을 진행하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그럼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길게 숨을 내뱉은 혁권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조수석에 타고 있는 하킴을 보며 입을 뗐다.
“방갑수가 보낸 애들은?”
“두 팀으로 나눠 대기 중입니다.”
“바로 작업을 시작하라고 해.”
“옛.”
짧게 대답한 하킴은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 지시를 전달했다.
우우웅.
12인승 봉고차 조수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윤정식은 진동이 오자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체중이 100킬로나 나가는 거구인 윤정식은 유도 공인 3단의 실력자였다.
은퇴한 허종철의 부하였지만 새로 우두머리가 된 방갑수한테 충성을 맹세하고 현재 마장동 올림픽파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윤정식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차창 밖으로 집어 던지면서 입을 열었다.
“오더가 떨어졌다. 다들 연장 챙겨라.”
“예, 형님.”
차 문을 열고 나가 서 있자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를 든 조직원들이 우르르 따라 내렸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조직원이 건넨 야구 방망이를 한 손에 잡고 가볍게 흔들어 본 윤정식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부하들을 둘러보고는 크게 외쳤다.
“자, 가자!”
선두에 선 윤정식을 따라 올림픽파 조직원들은 살벌한 기세를 풍기면서 사거리파에서 운영하는 성인오락실을 급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