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02
502
김포 공항 입국장에는 정오부터 카메라를 가진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오늘 들어오는 거 확실하지.”
둥그런 기둥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선 선배 기자의 말에 카메라를 점검하던 후배가 고개를 들면서 대답했다.
“초청한 곳에서 알려 준 정보니까 정확할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나타나는 거야?”
“곧 나오겠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쯧.”
지루한 표정을 지은 선배 기자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다가 공항 안에서는 금연이라는 걸 떠올리곤 다시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세금은 에누리 없이 다 거둬 가면서 담배 하나 마음대로 못 피우다니 정말 지랄 같네.”
“그러게 저처럼 끊으시라니까요.”
“차라리 밥을 먹지 말라고 해.”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다른 기자들을 둘러보면서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방문 목적이 주얼리 쇼 참석이라고 했지.”
“예. 미리내라고 이번에 새로 론칭하는 주얼리 브랜드라던데요.”
“나탈리 포트만 같은 거물 할리우드 여배우를 불러오려면 돈을 꽤 줘야 될 텐데, 사장이 누군지 몰라도 돈질을 엄청 하는 모양이구먼.”
“듣기로는 내일 열리는 주얼리 쇼에 국내 톱 여자 연예인들도 대거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안 그래도 편집장 잔소리 때문에 귀가 아팠는데 오늘하고 내일은 이걸로 기사를 때우면 되겠네.”
사내의 말에 피식 웃던 후배는 갑자기 웅성거리면서 기자들이 입국 게이트 쪽으로 몰려가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선배!”
“씨팔! 다른 게이트였잖아. 뭐 하고 있어? 좋은 자리 뺐기기 전에 어서 카메라 들고 뛰어!”
“예. 옛.”
언제 봤는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어느새 사내가 저만치 앞서 달려가자 후배 기자는 허둥지둥 뒤를 따라갔다.
소위 대포라 불리는 커다란 카메라를 든 국내 팬부터 시작해서 각종 신문 기자들이나 연예 방송 리포터들까지 죄다 게이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마침내 문이 열렸다.
“나탈리 포트만이다!”
“와아아!”
“꺄아아악!”
공항 보안 요원들이 나와 미리 포토라인을 만들어 둔 상태에서 덩치 큰 흑인 보디가드 둘에게 둘러싸여 모습을 드러낸 나탈리 포트만은 손을 살짝 흔들어 팬들의 환호성에 답했다.
그녀는 검은 스키니에 첼시부츠 그리고 어깨선이 드러나는 느슨한 니트를 걸친 차림새였는데, 평상시 입는 옷 그대로인 듯 자연스럽고 편한 복장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약간 피곤한 기색도 보였으나, 막상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자 기분이 좋은 듯 밝은 표정이었다.
시원스러운 입매로 활짝 웃으면서 게이트 사이를 걸어 나온 나탈리 포트만은 손을 내미는 팬들 사이로 다가가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 주기도 하면서 할리우드 스타답게 확실한 팬서비스 정신을 보여 줬다.
입술에 가볍게 립스틱만 발랐을 뿐 거의 화장을 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워낙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큼직하다 보니 타고난 미모가 빛을 발했다.
경호원이 와서 이제 이동해야 한다고 말리자 나탈리 포트만은 여전히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 팬과 기자들에게 손 키스를 날리곤 인파를 헤치고 공항을 벗어났다.
밴에 타는 순간까지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나탈리를 연신 외치던 사람들은 팬을 대하는 매너가 최고였다며 아직 흥분에 겨운 표정으로 서로 할리우드 여배우를 직접 코앞에서 본 감상을 나누며 떠들어 댔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하고 기사들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나탈리 포트만의 이름과 관련 단어들이 단숨에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다 차지했다.
차고에서 먼지만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가 오랜만에 끌고 나온 벤틀리 컨티넨탈 GT 운전석에 앉은 혁권은 스마트폰으로 포털 연예 뉴스난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탈리 포트만 기사를 훑어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시작은 좋네.”
나탈리 포트만의 한국 방문으로 집중된 대중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다음 일정인 주얼리 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내일로 예정된 브랜드 론칭도 대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을 안주머니 안에 집어넣던 혁권은 때마침 소현이 마지막 리허설을 끝내고 다른 모델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는 걸 보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오늘 하이힐을 신고 얼마나 무대를 걸어 다녔는지 발에 물집이 다 잡힐 지경이야.”
“나도 그래.”
울상을 지으면서 동갑 친구인 박보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던 윤세아는 옆에 있는 소현을 보며 물었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바로 무대에 서는 거라서 너도 많이 힘들겠다.”
그러자 한 살이 어린 소현이 장난스럽게 불쌍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요즘은 매일 보약을 챙겨 먹지 않으면 기력이 딸릴 지경이라니까요.”
“말은 잘한다. 보약은 고사하고 리허설 하는 내내 입에 물 한 방울 대지 않는 거 내가 봤거든. 오랜만에 서는 런웨이라고 기합이 확실히 들어갔던데 뭘.”
“뭐, 진짜 그랬어? 독하다, 독해.”
소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그냥 웃고만 있자 박보미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먹는 얘기하니까 더 배고프잖아. 떡볶이 먹고 싶다. 양념에 튀김이랑 만두도 환상의 조합인데.”
“거기다 어묵 국물 원 샷 때려 줘야지?”
“으아아~!”
두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를 지르니 소현도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탄수화물의 집합체나 다름없는 떡볶이는 1인분의 칼로리가 하루 권장량을 거의 채울 정도로 모든 다이어터들의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지금처럼 쇼를 준비할 때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박보미와 윤세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둘 다 먹고 싶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 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순간의 유혹에 못 이겨 한 개라도 입에 넣었다간 바로 그다음 날 얼굴이 퉁퉁 부어 티가 날 텐데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그렇게 아쉬움을 삼키며 건물을 나와 타고 갈 차량을 기다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소현의 이름을 불렀다.
“소현아.”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혁권이었다.
소현이 반가운 표정으로 낯을 확 밝히는 것과 동시에 옆에 있던 두 사람도 그를 알아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대표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아.”
박보미와 윤세아는 서로 알겠다는 듯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사실은 회사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런 늦은 시각에 그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도 대강 짐작이 가는 것이었다.
박보미가 눈치를 주면서 얼른 자리를 비켜 주려고 할 때 은근히 백치미가 있는 윤세아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소현이랑 데이트하러 오셨구나. 그렇죠?”
잘 익은 복숭아처럼 금방 소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가운데 혁권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하하하. 맞아요. 미안하지만 소현 씨는 제가 데려가도 되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이니까, 봐 드릴게요. 대신 내일 무대에 서야 되니까 일찍 집에 보내 줘야 돼요.”
“그럴게요.”
“소현아, 가자.”
“매니저 오빠가 차를 가지고 올 텐데…….”
“내가 데려다준다고 먼저 보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래요.”
고개를 돌린 소현은 뭔가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언니들 저 먼저 갈게요.”
“그래. 내일 봐.”
한쪽에 세워 둔 컨테넨탈 GT 조수석에 탄 소현은 때마침 도착한 밴을 타고 박보미와 윤세아가 먼저 떠나는 걸 보며 살짝 울상을 지었다.
“내일 만나면 언니들이 하루 종일 놀려 대겠네요. 어휴, 이걸 어째?”
“다른 사람들 다 갈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됐어요. 호텔에서는 사람들 눈이 더 많은 걸요. 몰래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어요.”
“으음.”
혹시 소현이 곤란할 만한 일을 해 버린 건 아닌가 싶어 혁권이 낮게 신음하자 소현이 애교 있게 웃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와 줘서 기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언니들도 눈치가 있으면 너무 심하게 하진 않을 거고.”
대기할 때나 서로 얘기할 여유가 있지 막상 리허설이 시작되면 각자 워킹에 집중하느라 그럴 겨를도 없다며 소현이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시동을 켠 혁권은 부드럽게 가속 페달을 밟아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을 이었다.
“어때, 힘들지는 않았어?”
그러자 소현이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듯이 기대면서 대답했다.
“주얼리 쇼는 처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서 봤던 무대라 오히려 드라마 촬영을 할 때보다 마음은 더 편했어요.”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드라마 중간에 먼저 빠져서 조금 섭섭하지 않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감독님하고 작가 선생님이 좋게 봐 주신 덕분에 원래보다 분량이 훨씬 많아졌었잖아요.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되죠.”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대단한데. 맞아.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잖아. 차근차근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운전을 하며 혁권이 손을 살짝 잡아 주자 소현은 지친 몸이 풀리면서 기분이 좋아져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참. 그리고 조만간에 정식으로 이야기를 해 줄 텐데. 회사에서 아침 일일 연속극을 하나 제작할 거야.”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소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봤다.
“우리 회사에서 드라마를 제작한다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다른 소속 연예인들하고 함께 소현이도 배역을 하나 맡게 될 거야.”
“아. 그래서 갑자기 두 언니들한테도 연기 수업을 받게 한 거였네요.”
“그렇지. 아무리 제작사 입장에서 배역에 꽂아 주더라도 최소한의 실력은 갖춰야 되는 거니까.”
좀처럼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지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으면서 말했다.
“드라마를 제작한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아요.”
“내가 그랬잖아. 한번 제대로 해 볼 거라고.”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는 혁권을 보고 소현은 샐쭉하게 눈을 떴다.
“엄청 멋진 대사긴 한데…… 으음, 솔직히 인정할게요.”
“뭘?”
“가끔씩 그런 식으로 행동할 때 가슴이 설렌다고요.”
제 입으로 그런 부끄러운 소리 하지 않게 작작하라며 소현이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내일 중요한 무대가 있었기에 혁권은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 날 오후.
주얼리 쇼가 열리는 워커힐 호텔 컨벤션 센터 앞은 취재진과, 유명 연예인들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마치 시상식 장처럼 입구에 레드 카펫이 길게 깔려 있는 가운데 초청장을 받은 유명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제일 처음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얼굴을 보면 누구나 알 법한 여배우들이었다.
평소 보기 어려운 여배우들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기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쉬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여배우들은 미리내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판넬이 세워진 포토존에 서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고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저 머릿수만 채운 것이 아니라 몸값이 높은 주연급 여배우들이었기에 행사의 수준을 한층 더 높였다.
그 뒤로도 여러 유명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절정은 역시 제일 마지막에 입장한 나탈리 포트만이었다.
정열적인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나탈리 포트만이 등장하자 일순간 건물이 들썩일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카메라 플래시에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창가에 선 혁권은 한쪽 손에 샴페인을 든 채 바깥 상황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러는 걸 보면 나탈리 포트만이 대단하긴 한가 보군.”
그러자 옆에 있던 김덕현 전무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유명 스타 아닙니까.”
“하긴.”
김덕현 전무는 평소와 달리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늘 행사에서 호스트Host로 초청객들을 맞이하고 무대에 올라가 브랜드를 소개해야 됐기에 어색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는 사장인 혁권이 해야 될 일이었으나 사업상 얼굴을 공개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김덕현 전무를 대신 내세웠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나?”
“페이만 맞는다면 나탈리 포트만 쪽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잘됐군. 성사가 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요구를 맞춰 주도록 해.”
“예.”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나탈리 포트만의 인기를 확인한 혁권은 내친김에 그녀를 미리내의 메인 모델로 쓸 생각을 했다.
만약 계약을 하게 된다면 단번에 브랜드 인지도를 올릴 수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소현을 쓰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그 정도 네임 벨류가 없었기에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사장님, 이제 곧 식이 시작됩니다.”
“그럼 가 봐야지.”
직원의 말에 몸을 돌린 혁권은 김덕현 전무와 함께 행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얼리 쇼는 기대한 대로 대성공을 거뒀는데 정빛나 실장과 해외 유명 보석 디자이너인 제니퍼 와츠의 감각적인 작품들이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코델리아라고 이름이 붙은 20캐럿짜리 최상급 블루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공개되자 감탄과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 날 강남 본점 매장이 정식 오픈이 되자마자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미리내는 고급 주얼리 브랜드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