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30
530
마음 같아서는 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연료 재보급도 받아야 했고, 아르빌까지 왕복을 하느라 이반과 부하들이 많이 지친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서 하루를 쉬어 가기로 했다.
샌더슨이 신경을 써 줘서 막사 하나를 통째로 일행이 쓰게 됐다.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진 혁권은 의자에 잠시 축 늘어져 앉았다.
막사 지붕이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 주는 데다 얼음 팩을 어깨에 얹고 선풍기 바람까지 쐬고 있으니 그나마 좀 살 만했다.
그렇게 땀을 식히고 있는 중에 하킴이 노크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웨이터로 전업이라도 했나?”
한쪽 팔에 식판을 들고 있는 걸 보고 혁권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하킴이 허리를 숙여 한쪽에 있는 탁자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출출하실 것 같아 식당에서 받아 왔습니다.”
하킴의 말마따나 음식 냄새를 맡으니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던 참이었다.
“어디 메뉴 좀 볼까.”
턱 하니 올려 뒀던 두 다리를 바로 한 혁권은 뚜껑 삼아 얹어 놓은 빈 식판을 치우고 제대로 먹을 자세를 취했다.
역시나 전쟁을 돈으로 한다는 미국답게 메뉴 역시 기대 이상으로 호화판이었다.
일단 두툼한 스테이크와 고소한 향이 나는 수프, 그리고 구운 야채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고, 치즈를 얹은 통감자라든가 비록 통조림이긴 하지만 비타민을 보충해 줄 과일까지 나름대로 영양 성분도 고려한 괜찮은 구성이었으니, 전장戰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에서는 거의 사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사 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용케 음식들이 남아 있었군.”
“미군은 어딜 가나 보급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왠지 냉소적인 하킴의 말투에 그는 피식 웃으면서 식판에 있던 빵을 집어 들어서는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다가 샌더슨을 만났는데 조금 있다가 여길 떠날 거라고 합니다.”
혁권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었으니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겠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수천 명의 미군과 동맹군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 대량 살상 무기인 더티 밤을 놔두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으니, 다른 안전한 장소로 옮겨 가는 것이 맞았다.
“샌더슨이 보스께 전하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뭔데?”
“쿠르드 자치 정부가 밀어붙이던 독립을 포기할 거라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아르빌 공항에서 봤던 사림 대령만 독립을 위해 싸울 의지가 충만해 있는 데다 수천 년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서럽게 살아오다가 건국建國을 할 최상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걸 너무나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러 가운데 하킴의 말이 이어졌다.
“이라크 정부가 최정예 부대인 황금사단Golden Division을 쿠르드 자치 지역으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황금사단이라면 IS와의 전투에 투입되어 있는 부대잖아?”
“맞습니다.”
이라크 정부군 가운데 미군이 신뢰하는 유일한 부대라고 할 정도로 전투 능력이 뛰어나고 최신식 무기를 갖춘 병력이 바로 황금사단이었다.
IS 대원들이 유령사단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할 정도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 특이한 것은 이라크 정규군이 아니라 이라크 총리가 직접 지휘하는 친위대라는 거였다.
“아무리 IS가 점령지를 대부분 잃고 거의 다 몰락했다고 해도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인데, 그런 핵심 부대를 빼내다니 미쳤군.”
“IS보다 쿠르드족의 독립을 저지하는 걸 이라크 정부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하킴의 말에 그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황금사단이 강하다고 해도 페쉬메르가 역시 만만치 않은 전투력을 가진 조직인데, 너무 쉽게 싸움을 포기한 것 같군.”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라니?”
“강하게 독립 투표를 밀어붙인 자치 정부와 달리 야당인 PUK는 무모한 행동이라며 중앙정부와 협상을 통해 자치권을 강화해야 된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페쉬메르가 조직 역시 반으로 쪼개졌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란계인 쿠르드애국동맹(PUK) 소속의 페쉬메르가 부대가 전투를 벌이지 않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이라크 정규군이 키르쿠크를 너무나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더군요.”
“내분이라…… 그렇군. 그게 사실이라면 더 버틸 수가 없었겠군.”
오랜 민족의 염원이 다른 것도 아니고 내분으로 인해 스스로 좌절시켰다는 것에 혁권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림 대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혁권은 반쯤 먹고 남겨 둔 생수병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다른 인원들은 뭘 하고 있나?”
“식사를 끝내고 다들 각자 방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밤을 꼬박 새웠으니까 조금이라도 잠을 자 두는 것이 좋겠지. 자네도 그만 가서 쉬도록 해.”
‘예.’ 하고 대답한 하킴이 문을 닫고 나가자 돌연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 안에 혼자 남은 혁권은 더운 공기를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하려고 힘겹게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음식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도는 것 같았는데, 하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니 그사이 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너무 피곤해도 사람이 밥을 먹을 기력이 없어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혁권은 빵만 조금 뜯어먹었을 뿐 나머지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음식을 약간 죄책감이 담긴 눈빛으로 보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옆으로 밀어 버렸다.
어차피 억지로 배를 채워 봤자 소화도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속이라도 따뜻하게 데울 요량으로 종이컵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빳빳하게 굳은 뒷목을 다른 한 손으로 주물렀다.
그러다가 문득 라스라누프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진 혁권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한쪽에 놔둔 위성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옆으로 접혀 있는 굵은 안테나를 바로 세우고 버튼을 누르자 낮은 전자음과 함께 전원이 들어왔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보안장치를 해제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라스라누프에 있는 자말한테 전화를 걸었다.
작은 액정에 위성과 연결되고 있다는 표시가 나타나고 얼마 안 있어서 연결음이 울렸다.
-보스.
“그래. 나야.”
-가셨던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뭐, 그럭저럭. 그쪽은 어때?”
삐걱거리는 침대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서 혁권이 물었다.
-자밀 의장의 공세가 점점 거세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후세인 준장이 잘 막아 내고 있습니다.
“그렇군.”
유전과 원유 저장 시설이 있는 라스라누프가 자밀 의장의 손에 들어간다면 손해가 막심했기에 전투 상황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급히 보고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
-함단이 불가리아에서 현지 마피아 조직한테 납치를 당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혁권은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소리를 질렀다.
“납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불가리아군이 보관하고 있는 대량의 구 소련제 잉여 군수물자를 불하拂下받을 방법이 없는지 군부 쪽에 선을 대려고 수도인 소피아에 갔다가 일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끄으응.”
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면서 군수품 수요가 점점 더 늘어 가는 가운데, 욕심이 많은 코자레바 중장 대신 다른 공급처를 찾아내 보라고 지시했던 걸 떠올린 혁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위성전화기를 고쳐 쥔 혁권은 눈을 무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경호원 없이 혼자 움직인 거야?”
-아닙니다. 조직원 두 명과 함께 소피아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당했다고!”
어이없어하는 투로 화난 음성을 내뱉자 자말이 면목 없다는 듯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도 아닌데 엉뚱한 사람이 사과하는 것을 들으니 더욱 열이 뻗쳤다.
혁권은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면서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는 걸 눌러 참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직원들도 같이 납치당한 거야?”
-아닙니다.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조직원도 중상이라고 합니다.
“제길!”
가족과 같은 조직원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말에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냥 납치를 한 건 아닐 테고 놈들이 원하는 것이 뭐야!”
혁권의 물음에 자말이 바로 대답했다.
-돈입니다. 함단을 풀어 주는 대신 몸값으로 200만 달러를 요구해 왔습니다.
“200만 달러라고?”
-그렇습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그가 신뢰하는 측근을 납치하고 부하를 죽였다는 것에 혁권은 크게 분노했다.
“내가 아주 우습게 보였나 보군.”
-불가리아 마피아는 뒷골목은 물론이고 정, 재계까지 손아귀에 넣고 국가 전체를 주물럭거리는 놈들이라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특급 호텔에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경찰조차 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대로 그냥 참고 넘기라는 거야!”
날 선 목소리에 자말은 순간 움찔한 것 같았으나 그래도 차분한 태도로 혁권에게 대꾸했다.
-섣불리 반응하면 오히려 일이 더 꼬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피아 따위 두렵지 않아. 내 부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 주겠어.”
-두렵고 두렵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당한 채 있으라고? 놈들의 기만 살려 주는 꼴이 될 걸!”
-하지만 보스…….
자말이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무턱대고 덤벼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함단을 납치해 간 조직이 어디야?”
-저도 이제 막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지 못하지만, 소피아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파블로프 조직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파블로프 조직이라…….”
두목인 이안 파블로프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파블로프 조직은 혁권도 익히 알고 있는 불가리아 최대의 마피아 조직이었다.
불가리아의 수도인 소피아를 기반으로 성장한 파블로프 조직은, 국제 인신매매와 매춘 같은 섹스 산업을 통해 급격하게 세력을 불려 지금은 불법 무기 거래는 물론이고 마약, 담배 밀수 등 손을 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두목인 이안 파블로프는 하는 짓하고 어울리지 않게 엔젤그룹이라는 기업을 세워 건설과 식품 유통 그리고 패션 산업까지 영역을 확장시키고는 견실한 기업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자동소총 같은 중화기로 무장한 조직원들만 무려 1천여 명이 넘어갈 정도로 세력이 컸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혁권이 쉽게 생각할 상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버겁다고 여겨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입술을 짓씹으면서 냉정을 되찾은 혁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요구한 돈이 200만 달러라고 했지.”
-예.
“일단 몸값을 주고 놈들한테서 함단을 구해 내도록 해.”
뜻밖의 지시에 약간 당황한 자말이 얼른 물었다.
-그럼 이번 일은 이대로 넘기실 겁니까?
“누가 그런댔어.”
-하지만 방금 몸값을 지불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자 혁권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함단을 구해 낸 다음에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버릇을 고쳐 줄 생각이야.”
-보스.
깜짝 놀란 자말이 그를 불렀지만 혁권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넨 맡은 일에만 신경을 쓰도록 해.”
-……후우. 알겠습니다. 대신 만만치 않은 상대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먼저 전화를 끊은 혁권은 납치당한 함단을 떠올리며 이를 꽉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