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38
538
게라슈첸코가 죽었다는 소식이 이안 파블로프한테 전해진 건 시장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여당 인사와 여러 지지자들과 저택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멋들어지게 옷을 차려 입은 이안은 여당 사무총장인 칼핀을 비롯한 서너 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한 손에 샴페인을 든 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 놈들이 멋대로 떠들어 대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소피아만 해도 이안 회장님 덕분에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엉뚱하게 비난이나 하다니 정말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내 말이 그겁니다.”
일부러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았지만 이안은 그리 나쁘지 않은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씀을 해 주니 위로가 되는 것 같군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곧 있을 시장 선거에 집중을 하십시오.”
“이안 회장님 정도면 시장직은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것도 그렇소이다.”
“솔직히 탁 까놓고 이야기를 해서 다른 후보들은 회장님의 상대가 안 되지요.”
이미 당선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걸 들으면서 이안이 샴페인 잔을 입으로 가져갈 때 측근인 다셰바가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회장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즐거운 분위기를 방해받은 이안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말해 봐.”
일부러 대화 중간에 끼어들 정도라면 중요한 이야기겠지, 하면서 그가 다셰바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시답잖은 용건일 때에는 각오하라는 뜻도 담겨있었다.
“여기선 좀…….”
다셰바가 머뭇거리며 이안과 얘기하던 손님들 쪽을 힐끔거렸다.
품위 있는 상류층 인사들답게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저번에 본 오페라가 어떠니, 요트를 새로 샀느니 같은 잡담을 나누면서 귀는 쫑긋 세우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군요.”
“하하,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나 봅니다.”
“별건 아닙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파티를 계속 즐겨 주십시오.”
이안은 돌아서면서 근처에 있던 웨이터에게 샴페인을 더 건네주라고 눈짓한 후 다셰바와 함께 파티장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안은 나비넥타이를 살짝 고쳐 매면서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무슨 짓이야!”
따가운 질책에 다셰바는 살짝 머리를 숙이고는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알려 드려야 되는 일이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평상시와 다른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챈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급한 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야?”
“게라슈첸코가 시내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받아 피살被殺됐다고 합니다.”
“……!”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에 잠시 말이 없던 이안은 이내 핏발선 눈으로 앞에 있는 다셰바를 노려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실입니다. 키쉬세프가 현장에서 게라슈첸코의 얼굴을 확인하고 죽은 조직원들과 함께 병원으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이안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인 소피아에서 조직의 간부가 피살당하다니 이건 그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이안은 씹어뱉듯 말했다.
“어떤 놈이 한 짓이야!”
당장이라도 달려가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놓을 것처럼 화가 난 이안의 모습에 다셰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존슨이 벌인 짓 같습니다.”
“지금 존슨이라고 했어!”
뜻밖의 이름에 눈썹을 치켜 올린 이안은 다그치듯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그놈 이름이 왜 나오는 거야!”
“저도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현장에 메시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메시지라니?”
“그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안이 눈을 부라리면서 재촉했다.
“신경을 건드리지 말고 어서 이야기를 해 봐!”
채찍과도 같이 매서운 노호성에 어깨를 움찔거린 다셰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다음 차례는 회장님이라고…….”
그러자 거짓말처럼 방 안이 조용해졌다.
“…….”
잠시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터져 나온 것은 이안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감히 나를 지목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이안 파블로프를?”
마치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이안의 얼굴엔 분노보다 오히려 헛웃음이 가득했다.
“설마 그사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는 듯 이안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이안을 상대로 다셰프가 용기를 내어 조언했다.
“그렇게 허투루 넘어가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안이 정색을 하며 앞에 서 있는 다셰프를 무섭게 노려봤다.
“내가 놈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거야!”
“아닙니다. 불가리아에서 누가 회장님께 위해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살짝 말끝을 흐린 다셰프는 이안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추격을 뿌리 치고 소피아로 다시 돌아와 시내 한복판에서 게라슈첸코를 죽인 만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조금 있다가 시장 선거가 시작되면 외부 활동이 많아지실 텐데 그러면 더욱 위험해질 겁니다.”
“으음.”
이안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당선이 거의 확실하다지만 최소한의 유세 활동은 해야 됐고, 그런 과정에서 경호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공격을 받을까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건 더욱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봤을 때 받았던 찝찝한 느낌이 결국 이렇게 돌아온 것에 이를 부드득 갈면서 이안이 차갑게 말했다.
“찾아내. 놈이 덤벼들기 전에 먼저 찾아내서 싹 다 쓸어버리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손톱에 때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들이대.”
하찮게 여기던 상대한데 자신의 권위와 자존심이 크게 훼손됐다는 것에 이안은 진심으로 분노하면서 두 주먹을 움켜쥐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늦은 밤, 벨체프 마피아 보스인 펜초 게셰프가 자신의 저택 서재 창문에 서서 조명이 켜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는 클럽 뉴욕의 사장이자 최측근인 루멘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죽은 놈이 게라슈첸코라 이거지?”
몸을 뒤로 돌리면서 펜초가 묻자 루멘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수도인 소피아 한복판에서 그것도 총기를 사용해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살해된 사건이었기에 방송 채널마다 속보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보고를 받자마자 펜초는 혁권이 이번 일을 벌였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라슈첸코라…… 단순한 허풍쟁이는 아니었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야.”
혁권이 찾아와서 한 제안은 아무한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펜초는 가볍게 한쪽 팔을 내젖고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직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간부가 피살을 당했으니 소피아가 발칵 뒤집혔겠군.”
“도시 전체에 조직원들이 쫙 깔려 흉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 대던 이안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것이니까 당연히 그럴 거야.”
말을 하는 펜초의 입꼬리가 살포시 위로 말려 올라갔다.
파블로프 조직에 밀려 지금까지 많은 불이익과 굴욕을 감수해야 했기에, 이안이 당했다고 하니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시에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무시해 버렸던 혁권의 제안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했다.
그저 그런 조직 간부가 아니라 파블로프 조직의 핵심 인물인 게라슈첸코를 살해해 이안도 죽일 수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줬다.
무엇보다 펜초의 마음을 흔드는 건 파블로프 조직만 무너뜨린다면, 자신이 이안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동안 마음속 깊숙이 감춰 두고 있던 욕망이 꿈틀거렸다.
한동안 말없이 고민하던 펜초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을 땐 그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 당장 조직에 비상을 걸고 내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놔.”
지시를 받은 루멘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이번 일로 파블로프 조직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펜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이안의 눈치를 보라, 이거야!”
“그, 그런 건 아닙니다.”
루멘이 황급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고개를 숙인 그의 뒤통수를 마뜩찮은 표정으로 노려보던 펜초는 이를 갈면서 거칠게 내뱉었다.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닥치고 내가 지시한 대로 해!”
“예, 예!”
그러곤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는 루멘의 등에 대고 펜초는 영 기분이 나쁜 것처럼 구둣발로 애꿎은 바닥을 내리쳤다.
문이 닫히자 펜초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결무늬가 그대로 살아 있는 마호가니로 만든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고 그날 화장실에서 혁권이 주고 간 메모지를 들고 잠깐 고심하던 펜초는 이내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스마트폰에서 약간 가라앉은 혁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한 걸 보니 마음의 결정을 한 모양이군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상태였지만 노련한 펜초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지?”
-지금 이안의 자리를 대신 가지게 될 거요.
책상 의자에 앉은 펜초는 몸을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건 내 힘으로도 할 수 있는 거고.”
-과연 그럴까?
스마트폰 너머에서 혁권이 낮게 웃었다.
-이안이 죽지 않는 이상 혼자서는 불가능할 텐데.
“흥.”
펜초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과연 이 정도론 넘어가지 않는군. 하긴 그만한 배짱이 있어야 손을 잡을 맛이 나지.”
-서로 원하는 건 다르지만 어차피 목표는 같으니 시답잖은 기 싸움 따위 그만둡시다. 괜히 시간만 아까우니까.
“뭐 맞는 말이야.”
-그래서, 어쩔 거요?
혁권의 물음에 판초가 눈을 번득이면서 대답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럴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혁권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잘 생각했소. 나중에 다시 연락할 테니 파블로프 조직과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해 놓으시오.
“그러지.”
통화를 끝낸 판초는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얼굴로 책상 한쪽에 놓인 나무 상자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이고 하얀 시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위험한 도박일지도 몰랐지만 성공한다면 단숨에 일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으니,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만약 혁권이 이안을 죽이지 못할 때에는 그대로 발을 빼 버리면 되니까 손해 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