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60
560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소현이 눈을 부릅뜨며 표독스럽게 소리치자 카메라 앵글이 줌인Zoom in되면서 바스트 샷을 잡았다.
“컷!”
정현태 PD의 외침에 소현이 표정을 풀면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휴.”
연습을 많이 했지만 아무래도 처음 해 보는 악역 연기다 보니까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수고했어요.”
“아. 고마워요.”
입술에 바른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게 긴 빨대를 꽂은 콜드 컵을 도형석이 내밀자 소현은 반갑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촬영장 한쪽에 앉아 방금 찍은 걸 모니터로 확인하고 있는 정현태 PD한테로 걸어갔다.
“감독님, 어때요?”
계속된 촬영에 면도할 시간도 없는지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정현태 PD가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좋았어. 이틀을 쉬어서 감정 선이 흐트러졌을까 봐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나 봐.”
그러자 소현이 머리를 살짝 숙이면서 말했다.
“촬영장을 마음대로 비워서 죄송해요.”
“아니야.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다 이유가 있었는데, 뭘.”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은 정현태 PD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살짝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했다.
“채상우하고 있었던 일은 정 이사님한테 전해 들었어. 그런 트러블이 있었으면 진즉에 이야기를 해 주지 그랬어.”
문제를 삼지 않기로 한 이상 원래는 촬영 스태프들한테 안 알리고 그냥 조용히 덮고 넘어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새파란 신인이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것도 그런데 제작사 백을 믿고 제멋대로 한다는 오해를 받거나 불만이 나올 수 있었기에, 정현태 PD와 표제은 작가한테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괜히 저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가 안 좋아질까 봐…….”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정현태 PD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줬다.
“그래도 앞으로는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이야기를 해 줘야 돼. 알겠지?”
“네. 그럴게요.”
“그리고 채상우는 내가 따로 따끔하게 이야기를 해 놓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여튼 이 자식은 여성 편력이 심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언제고 한번 사고를 칠 줄 알았어.”
외부에 이야기라도 새어 나갔다간 한창 찍고 있는 드라마에까지 똥물을 튀길 판이었으니,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편을 들어 주는 PD의 말이 고마웠다.
“어쨌든 소현 씨 오늘 분량은 다 끝났으니까 일찍 들어가서 쉬어.”
“네, 감독님.”
인사를 한 소현은 약간 피곤한 얼굴로 매니저인 도형석과 함께 세트장을 나왔다.
촬영 장비와 세트로 어수선한 복도를 지나 분장실에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최현정과 방영실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 다 끝난 거예요?”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빵을 집어넣고 있던 최현정이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응, 집에 가도 되는데 대신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야 된대요.”
“으아아.”
말이 끝나자마자 죽겠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엎어진 최현정의 뒤통수를 방영실이 탁 때리며 일어났다.
“어딜 편하게 월급을 받아 먹으려고 해. 사람이 가끔은 성실하게 일도 해야지.”
“아침잠이 많아서 일어나는 게 힘들다고요. 연예인도 일반 직장인처럼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딱 칼 퇴근시켜 주면 얼마나 좋아.”
“그럼 애초에 이 업계에 들어오질 말았어야지.”
“영실이 언니 진짜 너무 냉정하다. 안 그래요, 소현 씨?”
뜬금없이 최현정이 물고 늘어지자 다른 소지품과 함께 분장실에 놔뒀던 스마트폰을 살펴보던 소현이 안타까운 듯 답했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영실 언니 말이 맞아요.”
“세상에, 믿었던 소현 씨마저!”
“자, 자, 계속 늘어져 있지 말고 얼른 가방이나 들어.”
여기저기 늘어놓은 화장품과 의상을 하나씩 챙기고 있을 때 누군가 분장실 문을 두드리며 노크를 했다.
“네.”
대답을 하며 무심코 문을 연 도형석은, 채상우와 매니저인 김지호가 나란히 복도에 서 있는 걸 보곤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슨 일이시죠?”
잔뜩 경계하는 시선에 채상우가 짜증이 난 듯 살짝 표정을 구기자 옆에 있던 김지호가 얼른 나서며 말했다.
“소현 씨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지난번 일도 있었기에 도형석은 앞을 막아선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전해 드릴 테니까 저한테 하십시오.”
그러자 채상우가 인상을 쓰면서 입을 열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했잖아!”
“왜 이러는지는 채상우 씨가 더 잘 아실 텐데요.”
“이 자식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진정해. 대표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정색을 한 채 김지호가 제지하자 채상우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젠장.”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조용한 들렸다.
“들어오라고 해요.”
“소현 씨!”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미소가 사라진 차가운 얼굴로 소현이 서 있었다.
“전 괜찮아요. 혼자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잠시 머뭇거리던 도형석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길이 열리자 채상우가 먼저 성큼 안으로 들어왔고 뒤에서 말리던 김지호 역시 그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세라 서둘러 뒤따랐다.
“왜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끝내 주셨으면 좋겠네요.”
소현은 차분한 눈길로 채상우의 시선을 맞받아치면서 말했다.
그녀를 호위하듯 양옆에 서 있는 최현정과 방영실 역시 영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분장실에 쳐들어온 두 남자를 가늘게 노려보았다.
최현정은 휘두르면 거의 흉기급인 메이크업 박스를 보란 듯이 들어 올렸고, 방영실 또한 여차하면 도움이라도 요청할 셈인지 스마트폰을 꽉 쥐고 언제라도 비상 전화를 걸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춘 모양새였다.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적진에 들어온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낀 김지호가 슬쩍 채상우의 어깨를 잡았다.
“야, 야, 예의 바르게…… 알지?”
“아, 알았으니까 좀 놔 봐.”
가볍게 어깨를 떨쳐 김지호를 밀어낸 채상우는 앞으로 한 발짝 나와 그녀의 정면에 섰다.
여전히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눈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는 소현의 앞에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채상우는 크게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들이쉬고는 단숨에 머리를 숙였다.
“지난번 일은 내가 너무 지나쳤어. 진심으로 미안하다.”
“…….”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야. 사과한다.”
뒤에서 최현정과 방영실이 놀라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며칠 전에 복도에서 만났을 때처럼 빈정거리거나 시비를 걸러 온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하게 사과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소현 역시 뜻밖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여전히 침착한 얼굴 표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속셈이신지 모르겠지만…….”
“다른 뜻은 없어, 그저 사과하러 왔을 뿐이야.”
못 믿겠다는 듯 소현이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채상우의 말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소현은 바보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 사람치고는 앞에서 매니저와 벌인 실랑이도 그렇고, 제 성격이 어디 간 것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가 제 입으로 직접 사과를 했다는 것이었다.
소현도 아직 드라마 촬영이 초반부밖에 되지 않는데 앞으로도 한참이나 얼굴을 봐야 할 채상우와 계속 불편한 분위기를 이어 가기엔 여러모로 힘들었으므로 이쯤에서 그냥 받아 주는 게 낫다 싶었다.
“어쨌든 사과를 해 주셨으니 받아들이죠. 대신 채상우 씨와는 친하게 지낼 생각 없으니 계속 동료로서 적절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
차가운 소현의 말에 채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이를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성질대로 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뒤에 있는 혁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사고를 칠까 봐 매니저인 김지호가 옆에서 연신 눈치를 주자 채상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할게.”
억지로 쥐어짜듯 말한 채상우는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매니저와 함께 분장실을 나갔다.
그러자 놀란 얼굴로 그걸 지켜보던 최현정과 방영실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직접 찾아와서 사과를 다 하다니.”
그녀 역시 이런 건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싫은 걸 억지로 와서 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최현정의 말에 방영실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찌 됐건 사과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다시는 찝쩍거리지 않을 거 아냐.”
“어휴.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소현은 문득 혁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채상우가 스스로 뉘우쳤을 리는 없고 분명 누군가의 입김이 있었을 텐데, 그럼 그 사람이 설마 혁권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한테 다 맡겨 두라고 하더니 이걸 두고 했던 거였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에는 그냥 흘려들었던 혁권의 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러다가 밤새겠네. 정리 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요.”
도형석의 재촉에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얼른 겉옷을 걸치고는 개인 스태프들과 함께 분장실을 나섰다.
자세를 잡고 선 혁권은 앞에 있는 스크린을 힐끔 쳐다보고는 양손으로 쥔 드라이버를 뒤로 뺐다가 힘껏 휘둘렀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노란색 골프공이 스크린 중앙을 정확하게 맞히자 화면이 바뀌면서 공이 필드 위를 시원하게 뻗어 갔다.
비거리를 확인한 혁권은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며 티 박스에서 내려왔다.
“컨디션이 안 좋은가. 오늘은 영 비거리가 안 나오는군.”
손에 든 골프채를 백성균한테 건넨 혁권은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 있던 하킴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원래 스크린 골프장 안은 금연이었지만 가게를 통째로 빌려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우우웅.
진동 소리에 스마트폰 액정을 확인하자 지석영 변호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지석영입니다.
“전화를 한 걸 보니 일이 잘 처리된 모양이군요.”
-예. 말씀하신 대로 검찰 쪽에 자료를 넘겼습니다. 아마 며칠 안으로 오주호한테 체포 영장이 떨어지고 도도 엔터테인먼트에도 압수수색이 들어갈 겁니다.
“수고했어요.”
-전 그냥 중간에서 자료만 건네줬을 뿐인데요, 뭘.
“그래도 지 변호사가 나서 주니 검찰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증거 자료도 확실하고 공금 횡령 말고도 몇 가지 자질구레한 죄들까지 다 합치면 못해도 5~6년은 교도소에서 푹 썩어야 될 겁니다.
약속한 대로 녹음 파일에 대해서는 까발리지 않겠지만, 도도 엔터테인먼트를 이용해 온갖 추잡한 일을 다 벌이고 있는 오주호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계획대로 검찰 수사가 진행돼 오주호가 교도소로 간다면 빈껍데기만 남은 도도 엔터테인먼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오래지 않아 자신이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겠지만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