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61
561
“조금 아쉽지만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르는 것이 되겠군요.”
-대신 중간에 감형이나 가석방 없이 형량을 꽉 채우고 나와야 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지그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른 소식이 들리면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알겠소. 다음번엔 밥이라도 같이 합시다. 내가 괜찮은 데로 안내하지요.”
-하하, 사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곳이라면 기대해 봐도 좋겠군요. 언제든지 전화만 주십시오.
그렇게 지석영 변호사와의 통화를 끝낸 혁권이 막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군지 확인해 보니 소현이었기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전화를 다 했네. 촬영이 빨리 끝났나 보지?”
-오빠죠?
다짜고짜 묻는 말에 혁권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뭐가.”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 봐요.
혁권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최근에 뭔가 잘못한 일이 있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입으로 실토해야 할 만큼 나쁜 짓을 한 게 없었다.
적어도 소현이 알 만한 범위 내에서는 없었다.
-채상우 씨 말이에요.
좀처럼 대답하지 않는 혁권이 답답했는지 소현이 먼저 답을 꺼내놓았다.
“그놈이 왜?”
툭 튀어나온 이름에 반사적으로 혁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늘 갑자기 분장실로 찾아와서 직접 사과하지 뭐예요,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굴던 사람이 왠일로 머리까지 숙이면서.
“아, 그랬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린 혁권은 느긋하게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랬어.’가 아니죠! 하루아침에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가 싹 바뀌었는데 진짜 뭘 잘못 먹었든가, 아니면 머리가 홱 돌아 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게 아니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고요.
“이쪽에서 엄중하게 항의했으니까 거기 소속사에서도 크게 혼을 냈겠지.”
-그러다가 촬영을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걱정을 하는 소현과 달리 그는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불쾌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지.”
-오빠!
소현의 반응에 혁권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상대편 잘못인 데다 마음대로 촬영에 나오지 않는다면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되니까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채상우하고 함께 드라마 촬영을 하는 게 불편하지 않아?”
-솔직히 편하지는 않죠. 하지만 저번에도 이야기했다시피 나 하나 때문에 작품을 망칠 수는 없잖아요.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야 돼.”
-그럴게요.
“집에 가고 있는 거야?”
-아까 내려서 집 안에 들어왔어요.
“오늘은 일찍 끝났나 보네?”
-대신 내일 촬영은 이른 아침부터 잡혀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야 돼요.
“많이 피곤하겠네.”
-솔직히 집에 들어오면 지쳐 뻗어 버리지만 이렇게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힘든 건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항상 소현만 앞에 두면 잔걱정이 늘어나는 혁권의 말에 소현이 낮게 웃었다.
-알아서 컨디션 잘 챙기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매니저도 있고,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무리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요. 이러다가 응석만 늘어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럼 다행이야. 내일 일찍 나가야 한다니까 푹 쉬고 자.”
서로 먼저 끊으라고 또 한동안 질질 끌던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혁권의 고집에 소현이 두 손 두 발을 다 드는 것으로 끝났다.
몇 모금 피우지도 않았건만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필터 앞까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빈 종이컵에 비벼서 끈 혁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디 다시 한 번 공을 쳐 볼까.”
마음 같아서는 채상우를 좀 더 혼내 주고 싶었지만 그건 소현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경고를 잊고 채상우가 또다시 허튼짓을 한다면 그때는 이번 일까지 더해서 가차 없이 응징을 가할 생각이었다.
티박스 위로 올라간 혁권은 새로 놓인 골프공을 내려다보며 신중하게 자세를 갖추고는 이내 있는 힘껏 손에 쥔 채를 휘둘렀다.
휘이익. 탁!
며칠 뒤. 인천국제공항.
새로 산 캐리어를 끌고 부모님 대신 직접 수화물로 부친 혁권은 돌아서면서 두 분을 보고 말했다.
“자, 이제 짐도 다 보냈으니까 비행기만 타시면 돼요.”
“우리 몇 시 비행기라고 했지?”
“오후 2시 30분이에요.”
혁권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아직 여유가 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시라고 했다.
그에게야 익숙하다 못해 제2의 집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한 장소였지만, 어머니한테는 난생처음 와 보는 국제공항이라 눈에 보이는 것 전부 다 신기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손님을 태우고 공항 청사 앞까지만 왔었지 실내에 들어 와 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항에 은행이랑 식당도 다 있구나. 마치 백화점 같네.”
“인천을 경유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여행자들도 많으니까요. 어지간하면 이 안에서 안 나가도 웬만한 볼일은 다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거죠.”
혁권은 부모님을 이끌고 가까운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면세점에서 물건은 사셨어요? 어머니 친구분들한테 부탁도 받으셨다면서요.”
“아유, 해외 나간다니까 어찌 알고 그리 전화가 오는지. 거절하느라 아주 혼쭐이 났다.”
여자들이 염치가 없다면서 어머니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머니가 먼저 해외여행을 간다고 자랑을 했기 때문에 친구분들이 알게 된 건 쏙 빼 놓으셨다.
“내 짐도 산더미인데 어떻게 남의 물건을 챙겨. 나중에 기념품이나 돌리지, 뭐.”
“잘하셨어요. 거기서도 사고 싶은 게 많으실 텐데.”
“그나저나 우리가 뭐 주의해야 할 건 없냐. 비행기는 처음 타 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게 걱정인 듯 아까부터 유독 긴장한 것처럼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별거 없어요. 좀 좋은 고속버스 타신다 생각하시면 돼요. 어차피 게이트만 통과하면 스튜어디스가 다 알아서 해 줄 거니까.”
바깥에 있는 이런 프랜차이즈카페보다 게이트 안쪽의 퍼스트 클래스 전용 라운지가 훨씬 아늑하고 편했겠지만, 부모님 두 분이선 중간에 길을 못 찾고 헤매실 것 같아 체험을 못 시켜 드리는 게 아쉬웠다.
“퍼스트 클래스는 의자만 조작하면 침대처럼 다리도 쭉 펼 수 있으니까 괜히 불편하게 주무시지 마시고요, 모르면 무조건 물어보세요.”
“그 사람들도 바쁘지 않을까?”
어머니는 너무 귀찮게 굴면 싫은 티를 낼 것 같다고 사뭇 염려스러워했다.
“전혀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하시라고요.”
“어휴,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일투성이니 원.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공부라도 하고 올 걸 그랬어.”
“왜, 같은 책이라도 있을까 봐?”
“설마 없을까요?”
“없지, 이 사람아!”
또다시 시작된 부모님의 말다툼에 혁권은 모른 척 커피 잔을 기울였다.
“슬슬 일어나 보죠.”
적당히 여유 시간을 30분 정도 남겼을 즈음, 혁권이 먼저 일어나 말했다.
출국 게이트 쪽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지만 퍼스트클래스가 들어가는 게이트 쪽은 반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전 여기까지밖에 못 바래다 드리니까 조심하시고요. 하와이에 도착하시면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사람만 따라가시면 돼요.”
“여보, 잊어버린 건 없지? 여권 가지고 있나 잘 챙겨 봐.”
“당연히 여기 있죠. 제일 먼저 가방에 넣은 게 여권이랑 티켓이라고요.”
어머니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당당하게 아버지와 본인의 여권을 꺼내 내밀었다.
항공사 직원의 간단한 신분 확인을 거친 후 마침내 출국장 안으로 들어선 부모님은 혁권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자, 갑시다.”
“그냥 사람들 따라가면 되겠죠?”
두 사람은 약간 어색한 태도로 출국장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저 끝에 또 긴 줄이 보이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퍼스트 클래스 전용 게이트로 들어왔기 때문에 순서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지만 부모님이 줄을 서자마자 그 뒤로 사람들이 무섭게 늘어서는 것이 조금만 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간 엄청나게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보안 검사까지 다 끝내고 나서 마침내 비행기 안에 들어선 부모님은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안락하기 그지없는 의자에 앉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이제야 진짜 한국을 떠난다는 느낌이 드네요.”
어머니는 앞 의자에 붙어 있는 TV 화면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만져 보면서 채널을 돌리다가 남편을 보고 말했다.
“그런 말 하기엔 아직 일러.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을 봐야 아 내가 비행기를 탔구나~ 싶지 않겠어?”
말대꾸하는 아버지 역시 싱글거리며 웃는 모습이 들뜬 게 절로 느껴졌다.
“아들 덕분에 비행기도 다 타 보고 정말 호강을 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침대처럼 편하고 널찍한 퍼스트클래스 좌석을 한쪽 팔로 스윽 만져 보면서 아버지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여객기는 활주로를 힘차게 박차고 날아올라 흰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제시간에 부모님을 태운 여객기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공항 청사를 나온 혁권은 대기하고 있는 벤츠 승용차에 올라탔다.
승용차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혁권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날세. 바쁜데 전화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리는 홍성완 지사장의 목소리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거 말이야. 적당한 인물을 찾았네.
“그렇습니까.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지사장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 일이라 신경을 좀 썼지.
“감사합니다. 이번에 도움을 주신 건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 쑥스럽게 왜 그러나? 여태까지 자네가 해 준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덕분에 조만간 본사로 돌아갈 것 같네.
“그럼 승진을 하시는 겁니까?”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네.
“드디어 별을 달게 되시는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조금 이르지만 어찌 됐건 고맙네.
홍성완 지사장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는데 승진을 하면 이제 샐러리맨의 꿈인 임원任員이 되는 거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자네 덕분이야.
“제가 무슨 한 일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자네가 아니었으면 실적 미달로 승진이 아니라 문책을 당해 한직閑職으로 밀려나 얼마 안 있어서 회사를 그만둬야 됐을 거야.
“그럴 리가요. 지사장님이시라면 제가 없었더라도 분명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가셨을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니 기분은 좋구먼. 나중에 귀국하게 되면 내가 살 테니까 밥이나 한 끼 하세.
“그러시죠.”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아테네 지사장으로 있던 홍성완을 통해 처리해 왔기에 조금 아쉬웠지만 승진을 하게 됐다니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