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66
566
통화 연결음이 정확히 세 번 울렸을 때, 상대측에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오?
투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CIA 중간 간부인 샌더슨이었다.
“보안이 되는 회선이오?”
-……잠시 기다리시오.
약간의 잡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샌더슨이 다시 말을 했다.
-이제 괜찮으니 이야기를 하시오.
혁권은 위스키가 든 유리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 시스템이라고 알고 있소?”
-중국에서 스텔스 전투기 킬러라고 떠들어 대는 레이더 시스템 아니오?
“잘 알고 있군.”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 거요?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샌더슨이 추궁하듯 물었다.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 차량 5대와 예비 부품이 든 컨테이너를 이란으로 가져가야 될 것 같은데, 양해를 좀 해 줬으면 좋겠소.”
핫, 하고 샌더슨의 입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차라리 잘못 들은 거면 좋겠군.
“지난번 이라크에서 나한테 진 빚이 있을 텐데…….”
-물론 그렇지만 대가가 너무 큰데. 균형이 맞질 않잖소.
“부탁할 때는 뭐든지 해 줄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딴말을 하다니. 천하의 CIA도 믿을 상대가 못 되는군.”
혁권이 약간 강한 어조로 밀어붙이자 샌더슨이 이를 갈았다.
-역시 그쪽한테 빚을 지는 게 아닌데 그랬어.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일이 진행될 것 같은데, 그럴 바에는 날 통해서 실리를 챙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이제 아주 뻔뻔하게 나오는군.
“그럴 만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겠소.”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뱉은 샌더슨은 잠시 고심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상대의 말에 일단 한고비를 넘겼다고 판단한 혁권은 귀에 댄 위성 전화기를 고쳐 쥐면서 바로 대답했다.
“내일까지 대답을 해 줘야 되니까. 그 전에 연락을 주시오.”
-쯧. 알았어.
짜증을 내며 샌더슨이 전화를 끊자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위성 전화기를 탁자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치이익.
담배 끝에 붙은 불이 빨갛게 타오르면서 하얀 연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다시 바깥으로 내뱉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만약 CIA에서 부정적으로 나온다면 아쉽지만 굳이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백수광의 제안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버지니아 주, 랭리 CIA 본부.
국장실 가죽 소파에는 러셀 CIA 국장과 샌더슨 그리고 마르틴 중동 담당 간부가 심각한 얼굴로 둘러앉아 있었다.
“중국이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 시스템을 이란에 판매한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정말 골치 아픈 놈들이군.”
샌더슨의 대답에 러셀 국장이 이맛살을 찡그리자 왼편에 있던 마르틴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답게 CIA는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 시스템을 이란에 판매하려는 중국 정부의 움직임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다.
“자꾸 슬금슬금 아시아에 이어서 중동과 인도양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 눈에 거슬린단 말이야.”
소련이 붕괴되고 짧은 평화 이후에 다시 시작된 신냉전 시대에 새롭게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슈퍼 파워인 미국과 기 싸움을 벌이며 세계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양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 남중국해 남부의 남사군도南沙群島와 원유가 대량으로 매장된 중동이었다.
특히나 중동은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민감한 지역이었기에, 중국이 새롭게 끼어들어 판을 어지럽히는 걸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야?”
러셀 국장이 미간을 좁히면서 묻자 마르틴이 시선을 맞춘 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를 했다.
“이미 HQ-9 대공미사일이 이란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아무리 방해를 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가 넘어가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블랙래빗이 이야기한 것처럼 실리를 취하는 것이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가령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의 작동 프로그램을 확보한다면, 정확한 성능을 파악하는 건 물론이고 대응 방법까지 수월하게 개발해 낼 수 있을 겁니다.”
팔짱을 낀 채 몸을 뒤로 기댄 러셀 국장을 보며 마르틴이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최근 시오니즘Zionism의 완성을 주장하면서 중동 지역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가, 군사적 우위를 믿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는 해도 확실히 이스라엘에 스텔스 기체인 F-35 전투기를 대량으로 판매한 건 군사적 균형을 너무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행동이기는 하지.”
러셀 국장이 동의하듯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좀 더 우호적인 외교 정책을 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략적 요충지인 중동 지역이 불안정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란에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가 배치되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샌더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중동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거나 패시브 레이더가 확산되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마르틴이 샌더슨의 말을 가볍게 일축했다.
“중국의 확장을 억제하는 건 따로 방책이 세워져 있으니까 자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
샌더슨은 눈썹을 불만스러운 듯이 꿈틀거렸다.
의견을 단박에 묵살당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가 여기서 토를 달 입장도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곱지 않은 눈초리를 하고 있으니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한 분위기를 해소하려는 것처럼 러셀 국장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방해를 한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중국이 만든 DWL-002 패시브 이동식 레이더가 이란에 넘어가는 건 막기 어렵다는 거지.”
상석에 앉은 러셀 국장이 좌우를 둘러보며 묻자 샌더슨과 마르틴 둘 다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작동 프로그램을 빼낼 우리 요원들을 몰래 태워 주는 조건으로 이번 일을 눈감아 주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러셀 국장이 몸을 뒤로 기대면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작동 프로그램이 확보되면 모사드Mossad에 정보를 슬쩍 흘리도록 해.”
“……!”
모사드라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로 유명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었기에,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묵인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물건이 순순히 들어가게 놔둘 수는 없지 않겠어.”
이스라엘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모사드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고, 그럼 혁권이 위험해질 테지만 그런 건 러셀 국장의 안중에 없었다.
블랙래빗이라는 암호명까지 붙어 있었지만, 어차피 CIA한테 혁권은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러셀 국장의 의중을 알아차린 마르틴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말씀대로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샌더슨 역시 침묵으로 지시를 받아들였다.
CIA의 결정을 전해 들은 혁권은 곧장 백수광한테 전화를 걸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정동식 이사가 직원 두 명을 데리고 급히 북경北京으로 날아왔다.
2천만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한 도시의 관문답게 북경 국제공항은 평일인데도 오가는 사람들로 크게 북적거렸다.
정동식 이사가 한 손에 캐리어를 끌고 일행과 함께 입국장으로 나오자, 마중을 나와 있던 백성균이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친하지는 않지만 안면이 있었기에 정동식 이사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보니 반갑소, 백 대리.”
혁권이 소유한 사업체인 솔 루시두스에 대리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기에 직급을 불렀다.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놨으니 그리로 가시죠.”
“그럽시다.”
같은 오너를 모시고 있지만 소속된 회사가 다른데다가 혁권의 측근이라는 걸 알기에 정동식 이사는 의식적으로 백성균한테 말을 놓지 않았다.
공항 청사를 나온 일행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대형 밴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두 번째 좌석에 백성균과 나란히 앉은 정동식 이사는 차창 밖으로 자욱한 잿빛 스모그를 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국에 스모그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래 가지고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는지 모르겠군.”
“그나마 오늘은 그리 심하지 않은 편입니다.”
바람도 없어 움직이지도 않고 자욱하게 끼어 있는 스모그를 쳐다만 보고 있어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이게 그나마 괜찮은 거라니 정동식 이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백성균한테 시선을 주면서 물었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제작 중인 드라마 판권 계약을 하러 오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요?”
연락을 받고 급히 준비를 해서 달려오기는 했지만 자세한 상황을 듣지 못했기에 중국 정부의 검열이 심한 상태에서 아직 방영도 안 된 드라마 판권을 계약하게 된 것이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내용이었으나 백성균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전 잘 모르니 보스께 들으십시오.”
딱 자른 대답에 정동식 이사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오너의 수행원으로서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입이 무거워야 되는 거였기에,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살짝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일행을 태운 차량은, 짙은 스모그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 도로를 천천히 달려 북경 시내로 진입했다.
호텔에 도착한 일행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혁권이 머물고 있는 프레지던트 룸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쪽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는 하킴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혁권이 가죽 소파에 앉아 영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킴하고 눈인사를 한 정동식 이사가 잠시 가만히 기다리자, 이내 통화를 끝낸 혁권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모그 때문에 비행기가 회항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잘 도착했군.”
혁권이 한쪽 손을 내밀자 정동식 이사가 얼른 맞잡으면서 말했다.
“갑자기 드라마 판권 계약을 하게 됐다고 연락을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자세한 이야기는 차근차근 하도록 하고 일단 자리에 앉지.”
“예.”
소파로 가서 앉자 혁권이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물었다.
“드라마 촬영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겠지?”
정동식 이사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네. 8회 차 촬영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본 역시 순조롭게 나오고 있고 말입니다.”
“그러면 방영 예정일 전까지 사전 촬영 분량을 끝내 놓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일정이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지만 염려하지는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행이군.”
혁권은 앞에 있던 서류를 집어 정동식 이사한테 내밀며 말했다.
“이걸 한번 살펴보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