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02
602
옆에 있는 둥그런 방풍창 너머로 의미 없는 시선을 보내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또다시 위성 전화기가 울렸다.
이번엔 자드란에게서 온 전화였다.
혁권은 상대방을 확인하자마자 욱한 기색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덴항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지요.
차분한 목소리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여기서 화를 내 봤자 득 될 것이 없었기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분명히 아덴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설마 사우디아라비아 공군이 직접 출격해 폭격을 해 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군수품을 실은 화물선뿐만 아니라 어제부터 지금까지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들이 십여 차례 이상 출격해 아덴 곳곳을 폭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신속하면서도 강력한 반격에 UAE 역시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수심이 얕아 화물선이 완전히 침몰하지 않고 좌초만 된 덕분에 꽤 많은 화물을 건졌다고 하니, 회장님께서 제대로 인도받은 걸로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먼저 성의를 보이자 혁권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서로 잘잘못을 따져 봤자 좋을 것이 없으니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요. 그것보다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사상자들을 데려가려는데 폐쇄된 아덴 공항을 개방해 줬으면 합니다.”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야 되겠지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 겁니다.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되니까 가급적 빨리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군요.”
-그러지요. 참,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남부평의회를 반란 세력으로 지목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뉴스로 봤습니다.”
하디 대통령을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아랍 동맹군 명의로 이번 일을 쿠데타로 규정하는 동시에 주도 세력인 남부평의회를 반란군으로 지목했다.
물론 UAE가 반대했지만 이미 서로 등을 돌린 사이였기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냥 무시해 버렸다.
남부평의회를 지목했지만 사실상 배후에 있는 UAE를 겨눈 거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진 자드란의 이야기에 혁권은 미간을 좁혔다.
-아덴을 교전 지역으로 선포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가 시내 주요 시설들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계획에 큰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그래서 급히 대공 장비가 필요해 졌는데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잠깐 머뭇거려졌지만 이미 예멘 내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데다 화물선을 공격해 큰 피해를 준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에 복수를 해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예산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습니까?”
-금액에 상관없이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거면 됩니다.
이렇게까지 배팅하는 걸 보면 UAE도 주도권 다툼에서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괜찮은 물건이 있나 찾아보지요.”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서둘러 주십시오.
위성 전화기를 내려놓은 혁권은 길게 숨을 내뱉고는 매섭게 눈을 번들거렸다.
일행을 태우고 푸른 하늘을 쉬지 않고 날아간 비즈니스 제트기 두 대가 수도인 지부티 도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불리 국제공항Ambouli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둠이 짙게 깔린 깊은 밤이었다.
명색이 국제공항임에도 불구하고 조명이 대부분 꺼져 있어 적막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그나마 어두운 활주로 한쪽 편에 세워진 건물 주변으로 두세 대의 여객기들이 주기되어 있는 모습이 여기가 공항이라는 걸 알려 줬다.
아래로 내려진 트랩을 밟으면서 비즈니스 제트기 밖으로 나오자 먼저 도착해 있던 이반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언제 도착했나?”
가볍게 악수를 나누면서 그가 묻자 이반이 특유의 러시아 억양이 강한 영어로 대답했다.
“저희도 이제 막 왔습니다.”
“피곤하겠지만 장비와 물품을 옮겨 실으면 바로 아덴으로 가야 될 것 같아.”
지부티에 도착하기 직전 자드란한테 다시 연락이 와서 남부평의회가 아덴 공항을 개방해 주기로 허락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들의 공습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언제 공항이 사용 불능 상태가 될지 몰랐기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역시 든든하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이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이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는 사이에 일행이 하나둘 비즈니스 제트기에서 내렸다.
이런 일에 익숙한 혁권의 부하들과 달리 동행한 의료진은 장시간 비행과 적도 부근에 위치한 나라답게 후덥지근한 공기에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그걸 본 혁권은 조용히 등 뒤에 서 있는 하킴을 불렀다.
“의료진들이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잠시 쉴 만한 곳을 찾아봐. 막상 도착했는데 이쪽이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그것만큼 웃긴 일도 없으니까.”
“금방 조치해 놓겠습니다. 보스께서도 눈 좀 붙이시지요.”
“난 괜찮아. 어쨌든 비행에는 익숙하잖나.”
하킴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이를 불러 혁권의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현지 작업자들이 싣고 온 의약품과 장비를 수송기 화물칸에 옮기는 동안 혁권은 고개를 들어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습관적으로 담배에 손이 가려고 했으나 도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별들이 무수히 떠 있는 것을 보자 금방 그런 생각 따위는 날아가 버렸다.
몇 시간 뒤.
이제는 익숙한 AN-26 쌍발 터보프롭 수송기가 긴 활주로를 박차고 새벽 여명이 밝아 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의료진을 포함해 20명 가까운 인원이 타고 각종 의료 장비와 물품까지 한가득 실었지만 수송기답게 탑재량이 넉넉해서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목적지까지 3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일체형 승무원복에 어깨를 가로질러 가죽으로 된 권총 홀더를 찬 알란의 말에 접이식 시트에 앉아 있던 혁권이 머리를 끄덕였다.
“꽤 오래 걸리는군.”
“안전을 위해 공해상으로 조금 돌아가는 항로를 잡았습니다.”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자말과 부하들을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기에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알았어.”
“그리고 탑승 전에 아테네에서 보내온 겁니다.”
가죽 커버로 싸인 태블릿을 건네고 알란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혁권이 액정을 켜니 아무 설정도 하지 않은 기본 화면에 폴더 몇 개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폴더 안에 있던 문서 파일을 클릭하자 각종 대공 장비들의 목록이 상세한 제원과 함께 질서 정연하게 카탈로그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함단이 연락을 받고 당장 입수가 가능한 것들로 급히 자료를 만들어서 파일을 보내온 거였다.
한참 동안 그걸 주의 깊게 살펴 본 혁권은 품속에서 위성 전화기를 꺼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보안장치를 해제한 그는 저장된 목록에서 원하는 이름을 찾아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은 액정에 위성과 연결됐다는 표시가 뜨면서 연결음이 들렸다.
곧이어 자드란이 전화를 받자 혁권이 말했다.
“어제 얘기했던 대공무기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덮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자드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전화 바꿨소.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서 무기를 구한 거요?
때마침 바로 옆에 있었는지 대리인이 아니라 의뢰주 본인인 만수르였다.
“상황이 급한 만큼 최대한 일을 서둘렀습니다.”
-역시 존슨 씨로군.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처리하진 못했을 텐데.
칭찬을 가볍게 받아넘기면서 혁권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몇 가지 물건들 중에서 남부저항군이 당장 가져가서 쓸 만한 것들로 ZSU-23-4 쉴카와 SA-16 이글라 정도면 어느 정도 사우디아라비아 공군기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둘 다 구소련 시절 만들어진 대공무기였다.
ZSU-23-4 쉴카는 궤도식 자주 대공포로 장착된 레이더를 이용해 목표를 추적하면서 분당 4천 발을 쏟아 낼 수 있는 23mm 2A7 4연장 대공기관포로 요격을 수행했다.
대공목표뿐만 아니라 고각을 조종해서 장갑차나 보병, 차량 등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SA-16 이글라는 1980년에 실전 배치돼 여러 개량형이 개발되면서 현재까지 동구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휴대용 대공미사일이었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개발한 휴대용 대공미사일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성능에 저렴한 가격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파편형이 아니라 충격식 신관을 쓰고 있어서 일단 명중하면 적기를 확실히 파괴시키는 성능을 가졌다.
-흐음. 확실히 남부저항군이 이글라 대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면 사우디아라비아도 쉽사리 공군기를 띄울 수가 없겠지. 그리고 쉴카는 일반 전투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말이야.
아무래도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훈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현실적으로 사용 가능한 대공 무기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수량은 얼마나 확보할 수 있겠소?
“여유가 있다면 더 구할 수 있겠지만, 당장 아덴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쉴카 자주대공포 3대와 이글라 대공 미사일 250기 정도입니다.”
잠깐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물론 급하게 물건을 가져오는 만큼 시세보다 절반 정도 비싸게 줘야 될 겁니다.”
-그런 건 상관없으니 얼마면 되겠소?
“넉넉잡아 5천만 달러 정도면 될 겁니다.”
일부러 조금 더 부풀려서 액수를 말했지만 그쯤은 상관없다는 듯이 상대가 말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뜨거운 맛을 보여 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소.
“최소한 지금처럼 적기가 아덴 상공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지는 못할 겁니다.”
-그거면 됐소. 바로 돈을 입금시킬 테니까 물건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그러지요.”
한쪽 손에 위성 전화기를 든 채 혁권이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비록 직접 손을 쓰는 건 아니었으나 이걸로 이번에 당한 걸 조금이나마 복수를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대공무기를 넘기면서 생긴 이득은 부수적인 거였다.
공해로 크게 우회를 했다가 아덴으로 진입한 수송기는 다행히 별다른 문제없이 아덴 공항 활주로에 착륙할 수 있었다.
아래로 활짝 내려진 후방램프를 통해 밖으로 나오자 제일 먼지 혁권과 일행을 맞이한 건 눈이 부시도록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과 온통 회색빛 주변 풍경이었다.
명색이 국제공항이었지만 한쪽에 위치한 커다란 급수탑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청사 건물은 군데군데 녹이 슬고 도장이 벗겨져 낡아 보였다.
멀리 시가지 위로 솟아오르는 시커먼 연기와 간간이 들리는 포성이 여기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란 걸 새삼 깨닫게 해 줬다.
“보스, 저길 보십시오.”
하킴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혁권이 고개를 돌리자 공항 청사 쪽에서 트럭 세 대가 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야?”
“구급차 대신 트럭에 환자들을 태운 것 같습니다.”
“으음.”
오랜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열약한 상황이라는 건 알았지만 중환자들을 트럭에 실어 이송해 오는 모습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사실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환자를 비행기에 태우는 건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가 이루어지는 걸 어려웠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함께 온 의료진한테 우선 환자들 상태부터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괜찮으면 바로 수송기에 태우라고 해.”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하킴은 수송기 옆에 모여 있는 의료진들한테 다가가 혁권의 말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