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98
698
-방금 피의자 신분으로 두 사람 모두 대검에 연행되어 간 걸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이번 재보궐 선거에 나갈 수는 없겠군요.”
푹신한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혁권이 스마트폰을 든 채 묻자 지석영 변호사가 바로 대답했다.
-후보자 등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완전히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리고 저희 쪽에서 건넨 자료 말고도, 이번 압수수색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들을 많이 확보한 데다 몇 가지 죄를 추가로 찾아냈다고 하니까, 아마도 기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입니다.
“호오. 그래요?”
-슬쩍 귀띔을 해 주기로는 뇌물 장부와 유력 정치인의 비리 내용이 담긴 음성 파일이 나왔다고 합니다.
혁권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혹시 유력 정치인이라는 자가 양익현 의원이오?”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크게 놀라지 않고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동안 심치국의 뒤를 봐준 사람이 양익현 의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대검에서도 사건 사이즈가 커지자 검사 두 명을 추가로 투입해 수사 인력을 보강한다고 합니다.
“양익현 의원까지 손을 대려는 거요?”
-3선 중진인 데다 야당 최고위원이라 조심스럽기는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습니다.
“흐음.”
처음 생각한 것보다 일이 커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양익현 의원 역시 깨끗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이내 신경을 껐다.
“뭐, 검찰에서 알아서 하겠지. 이제부터는 손을 떼고 진행 상황만 보고하시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얼마 있지 않아 혁권이 탄 벤츠 승용차는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미리내 브랜드 매장에 도착했다.
혁권이 차에서 내리자 미리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최정욱 부장이 직원 두 명과 서 있다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바쁠 텐데 수고가 많군.”
혁권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외벽 장식이 끝난 매장 건물을 바라보았다.
미리내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광고 모델이나 상품 이미지를 걸어 놓는 대신, 산뜻한 화이트와 우아한 골드의 두 가지 색상을 이용해 모던하게 외관을 꾸몄다.
1층은 전시장의 역할도 겸하므로 전면 유리창을 통해 밖에서 안을 볼 수 있게 해 놨고, 밤에는 은은한 주홍빛 조명이 환하게 빛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지금은 아직 내부 정돈 중이라 가림막을 쳐 놨지만 대부분 설계도면을 보면서 설명 들은 그대로라 혁권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인가 보군.”
“예. 이대로라면 예정된 기한 안에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옆에 붙어 선 최정욱 부장이 대신 출입구를 열어 주며 얼른 말했다.
일단 실내로 들어오자 새 건물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훅 풍겼다.
작업자들의 건강을 위해 천장에서 공기 청정기와 환풍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양쪽에서는 이미 설치가 다 끝난 장식장과 선반에 직원들이 물건을 옮기며 디스플레이에 열중인 모습이 보였다.
상품 하나하나가 최소 몇백만 원의 가치를 지녔기에 물건을 직접 만지는 직원은 모두 얇은 손장갑을 껴서 흠집이 나지 않게 조심히 다뤄야만 했는데, 그 와중에 상품 코드와 감정서를 두고 다시 진품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느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매장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거의 다 끝났고, 위층의 VIP룸과 사무실도 마무리만 하면 되는 단계입니다. 그 외에도 기본적인 수도나 전기 배선은 모두 완료되었는데, 특히 CCTV를 비롯해 보안과 관련되는 시설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음, 잘하고 있어.”
얘기를 들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혁권은 바닥에 떨어진 먼지와 박스 더미 들을 손수레에 싣고 있는 직원들을 발견하곤 잠시 대화를 멈췄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중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나이였는데, 혁권하고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바로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 동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분이었다.
주민대표하고 있었던 문제는 해결이 됐지만 결국 자동방범장치 설치로 줄이기로 한 경비원과 청소부 들은 해고가 되고 말았다.
부모님처럼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의 아파트 주민들이 인원 감축을 찬성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처지인 데다 나이까지 많아 다른 곳에 재취업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매일 얼굴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던 사이인데 졸지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걸 부모님이 딱하게 생각하시는 걸 보고, 때마침 매장을 새로 준비하면서 직원들을 뽑고 있던 혁권이 모두 받아들였다.
오지랖 같았지만 그도 아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데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기뻐하신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상대편도 이쪽을 보았는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수레에 내려놓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계속 걸음을 옮겨 최정욱 부장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삑.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김인철은 벨 소리에 머리를 들고는 한쪽 손을 뻗어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여비서의 말에 콧잔등을 살짝 찡그린 김인철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안으로 모셔.”
-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오차돈 사장이 뭔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절 부르시지 번거롭게 직접 내려오셨습니까.”
“마음이 급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네.”
대충 오차돈 사장의 용건이 뭔지 짐작한 김인철은 차분한 태도로 사무실 한쪽에 놓인 응접세트를 가리켰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머리를 끄덕인 오차돈 사장이 소파로 가서 앉자 김인철도 맞은편에 자리를 했다.
“임시주총 때문에 오신 겁니까?”
“김 이사가 먼저 말을 꺼내 주니 편하게 이야기를 하겠네. 들리는 소문에 김성균 사장 측에서 사모님의 동의를 받아 일부 계열사들을 그룹에서 분리시키는 걸로 경영권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던데, 사실인가?”
어차피 알게 될 내용이었기에 김인철은 숨지기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맞습니다. 저한테는 태일가스를 준다고 하더군요.”
“설마 그걸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큰형님과 각을 세우지도 않았겠지요.”
“그랬겠지.”
안도해하면서도 오차돈 사장은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성년 후견인 신청도 했다던데 사모님이 와병 중인 회장님의 지분까지 대리로 행사해 김 사장을 밀어준다면, 임시주총에서 큰 낭패를 보게 되지 않겠나?”
오차돈 사장의 지적에 김인철은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차명 지분과 함께 큰형인 김성균 사장에게 확실히 주도권을 쥐여 주기 위해 박상빈 비서실장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바로 성년 후견인이었다.
예전에 있던 한정치산자와 금치산자처럼 질병이나 노령으로 정신적 제약을 가진 사람을 대신해서, 법정대리인 역할을 맡는 것이 바로 성년 후견인 제도였다.
법원에서 배우자인 어머니를 성년 후견인으로 선정하게 되면, 그 즉시 김종원 회장이 가진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었다.
박상빈 비서실장이 꾸미는 대로 된다면 균형추가 큰형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꽤 머리를 굴린 모양이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느긋해 보이는 태도에 오차돈 사장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대비책을 세워 둔 모양인데, 어쩌려는 건지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보게.”
“조금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겁니다.”
쉽게 입을 열 기색이 없는 그를 오차돈 사장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상대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미 한 배를 탔으니,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오차돈 사장은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알겠네.’ 하며 일단 한 발 물러났다.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으니 김 이사를 계속 믿고 가는 수밖에.”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경영권 다툼에서 진다면 오차돈 사장 자신도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야 했기에 배수진背水陣을 친 간절한 입장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오차돈 사장이 밖으로 나가자 혼자가 된 김인철은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고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겁을 먹고 오차돈 사장이 허둥지둥 달려올 정도면, 정덕진 태일증권 사장을 비롯한 다른 주요 임원들도 큰형 쪽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크게 동요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머니까지 큰형 편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더 이상 균형추가 기울어졌다가는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꽈득 이를 깨문 김인철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대학 동창인 전병주 검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거친 손놀림으로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여보세요.
“나야.”
-저번에 말한 일 때문에 연락한 거야?
지난번과 달리 어쩐지 심드렁한 태도에 김인철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그래. 이제 슬슬 움직여야 되는 거 아냐?”
-성격이 급하기는 자료를 넘겨 받은 지 보름밖에 안 됐어.
“그 정도면 벌써 견적이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 아니야? 괜한 핑계대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뭣 때문에 미적거리는 거야.”
직설적인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전병주 검사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맡겼던 일은 조금 뒤로 미뤄야 될 것 같다.
하루라도 빨리 큰형이 검찰 조사를 받게 만들어서 박상빈 비서실장이 일을 꾸미고 있는 임시주총을 무산시켜야 되는데 기대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정하라고.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나쁜 걸 어쩌겠어.
당장 손에 든 스마트폰을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김인철은 애써 화를 꾹 누르면서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이유가 뭐야?”
그러자 전병주 검사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는 일을 진행시키지 않고 뒤로 미루려는 이유를 알려 줬다.
-조만간 대검 쪽에서 거물 정치인이 연관된 비리 사건을 하나 터트리려고 하는 모양이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분위기를 흐려 놓으면 좋아할 리가 없잖아.
한마디로 대검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몸을 사린다는 거였다.
“얼마나 거물이기에 이러는 거야!”
-양익현 의원이야.
“······!”
김인철의 표정이 구겨졌다.
3선 중진으로 제1야당 최고위원을 맡고 있는 양익현 의원의 비리 스캔들이라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정국을 뒤집어 놓을 폭탄이 될 수 있었다.
“제길! 왜 하필 지금······.”
-이제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겠지?
이런 큰 사건이 터진다면 다른 것들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비리 스캔들이 정리될 때까지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잠시 말이 없던 김인철은 이내 눈을 번들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전 검사, 우리가 먼저 터트리자.”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귓등으로 흘려들은 거야?
상대가 짜증을 냈지만 김인철은 상관하지 않고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양익현 의원 같은 거물을 수사하려면 검찰 수뇌부는 물론이고 청와대 승인까지 받아야 되니까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발부받고 정식으로 조사를 시작하려면 하세월일 거 아냐. 거기다가 정치권에서 어떤 합의가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사건 자체가 묻힐 수도 있고 말이야.”
-아무래도 파장이 클 테니 대검에서도 신중하게 움직이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일을 벌이잔 말이야. 이쪽은 모발 검사만 해도 확실한 증거가 나올 테니 속전속결로 사건을 처리할 수 있잖아.”
-대검에서 떨떠름하게 생각할 텐데······.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면 지들이 어쩌겠어. 그러고 나서 윗선에 적당히 약을 치면 그 정도 일은 금방 잊을 거야. 그룹 경영권만 손에 들어오면 확실하게 스폰을 해 줄 테니까 나만 믿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김인철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내 말대로 한다면 오늘 저녁에 집으로 사과 상자를 하나 보내도록 할게.”
-······.
당연히 김인철이 보내 준다는 사과 상자에는 과일 대신 5만 원권 지폐 뭉치가 가득 들어 있을 터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전병주 검사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까 어쩔 수 없지. 내일 법원에 긴급 체포 영장을 신청하도록 할게.
“절대 실수가 있으면 안 돼.”
-염려하지 마.
김인철은 눈을 매섭게 뜬 채 스마트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