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02
702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이 바로 김인철 이사일 테니 동기動機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맞아.”
혁권은 탁자에 놓여 있는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뱃재를 가볍게 털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김성균 사장 측이 우호 지분을 다 확보한 상황에서 그대로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다면 꼼짝없이 내쳐질 수밖에 없었을 텐데, 검찰 수사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고 뒤에서 모든 걸 주도하던 박상빈 비서실장을 제거해서 한꺼번에 판을 뒤집어 버리다니 대단해.”
단순히 비꼬는 것뿐만 아니라 약간의 감탄까지 섞여 있는 투였다.
처음엔 분명히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재벌가에서 태어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제 부모 형제에게까지 서슴없이 흉수를 뻗으며 점점 악을 더해 가는 모습이 일종의 진화 과정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끝없는 향상심과 야망이 만약 좋은 쪽으로 발휘되었다면 과연 어찌 되었을까.
혁권은 부질없는 추측을 떨쳐 내고는 눈빛을 서늘하게 번뜩였다.
전혀 상관이 없는 사이라면 김인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서로 악감정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언제든지 비수를 들이밀 수 있는 상대가 큰 힘을 얻는 걸 그냥 두고 볼 순 없었다.
“지난번에 태일 그룹 주요 계열사 주주 명부를 조사해 둔 것이 있지?”
“예.”
주주의 이름과 보유 주식 수는 물론이고 주소를 비롯한 각종 정보가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는 주주 명부는, 경영권하고 관련해 안 좋은 쪽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컸기에 각 기업에서 각별히 신경을 써서 관리했다.
“그걸 가져와 봐.”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여 답한 하킴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혁권은 소파 등받이에 체중을 싣고 짙은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허공에서 흐려지는 뿌연 연기를 보면서 혁권은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상념에 잠겼다.
꽝!
접견실에서 박상빈의 죽음을 전해 들은 김성균 사장은 앞에 있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눈을 부릅떴다.
“박 실장이 죽다니 무슨 헛소리야!”
김귀원 변호사와 함께 찾아와 소식을 전한 고동욱 비서실장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태일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렸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나하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게 말이 돼?”
“혹시나 싶어서 유가족의 동의를 받아 경찰 입회하에 부검을 했습니다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허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김성균 사장이 몸을 뒤로 기댔다.
“그럼 정말 누가 뒤에서 손을 쓴 것이 아니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인연도 있었지만, 김종원 회장이 쓰러진 이후 뒤에서 그를 든든하게 밀어주는 버팀목 같은 존재였기에 상실감과 충격이 너무 컸다.
시원하게 에어컨이 나오고 있음에도 고동욱 비서실장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임시 주주총회 소집은 잠시 뒤로 연기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으음.”
눈썹을 찌푸린 채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자신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데다 박상빈 비서실장까지 생生을 달리한 상황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는 건 무리였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애써 화를 삼킨 김성균 사장은 한참 만에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지. 내가 못 가 보더라도 부족한 것이 없게 박 실장 장례를 잘 챙겨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담배 하나 줘 봐.”
김성균 사장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예.”
서둘러 대답하며 품속에서 담뱃갑을 찾아 앞으로 내밀자 김성균 사장이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동욱 비서실장이 붙여 주는 불로 담배 연기를 폐 깊숙이 흡입한 그는 좁혔던 미간을 느슨하게 풀었다.
니코틴의 영향 덕분인지 예민하게 서 있던 신경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김 변호사.”
“말씀하십시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김성균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김귀윈 변호사와 시선을 맞췄다.
“내일에는 여길 나갈 수 있는 건가?”
긴급체포 형식으로 검찰에 잡혀 와 조사를 받고 있는 거였기에 원칙상 48시간이 지나면 풀어줘야 했다.
하지만 김귀원 변호사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검찰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아무래도 법원에서 발부를 해 줄 것 같습니다.”
오매불망 조사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김성균 사장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나보고 여기 계속 처박혀 있으라는 거야!”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증거가 워낙 확실한 상황이라 구속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젠장!”
짜증이 치밀어 오른 김성균 사장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욕을 내뱉었다.
그러자 김귀원 변호사가 얼른 입을 열어 김성균 사장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바로 보석保釋 신청을 할 테니 곧 밖으로 나올 수 있으실 겁니다.”
“그건 확실한 건가?”
다그치듯 묻자 김귀원 변호사가 머리를 끄덕였다.
“사장님만큼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법원 쪽에도 적당히 손을 써 놨으니 어렵지 않게 신청이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고 계십시오.”
그때서야 잔뜩 화가 나 있던 김성균 사장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박 실장마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는 자칫 반대파들한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빨리 여길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성균 사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돼. 돈은 얼마를 써도 좋으니까 무조건 결과를 만들어 내란 말이오!”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석 신청이 기각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김귀원 변호사는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원하시는 대로 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김성균 사장은 거칠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검장실 앞에 걸음을 멈춘 전병주 검사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변호사 접견을 끝낸 김성균 사장의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가 호출을 받고 급히 올라온 거였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아주 경직된 조직 문화를 가진 검찰에서는 지검장이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하급 검사를 바로 부르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전병주 검사는 이쯤에서 지검장이 자신을 불러들일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리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검찰 조직에서도 최상층부에 속하는 지검장을 독대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표정을 풀지 못했다.
어깨를 올려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전병주 검사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부속실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그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검장님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여직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팔을 들어 안쪽 내실을 가리키면서 말을 받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들어가 보세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전병주 검사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책상 사이를 가로질러 가서는 조심스럽게 내실 문을 두드렸다.
내실로 들어선 전병주 검사는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다가 상체를 드는 오귀남 지검장을 보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왔나.”
오귀남 지검장은 결재 서류를 덮고 일어나면서 한쪽에 놓여 있는 응접세트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쪽으로 앉게.”
“예.”
깐깐한 인상을 한 오귀남 지검장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찰 수뇌부답게 온몸에서 오만함과 권위를 가득 풍겼다.
상석에 자리한 오귀남 지검장은 잠시 왼편에 앉은 전병주 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법원에 김성균 사장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자신 있나?”
“······.”
“김종원 회장의 장자이자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들어가는 거대 기업 집단인 태일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야.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냐고?”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전병주 검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사장실에서 마약인 캡타곤을 찾아냈고 국과수에 의뢰한 모발 검사에서도 양성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것 말고도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아 혐의를 입증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워낙 민감한 사안인 만큼 수사 상황을 자세하게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오귀남 지검장 역시 대략적인 내용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끝까지 공소 유지가 가능하겠냐는 거야?”
오귀남 지검장이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면서 말을 이었다.
“저쪽은 태일그룹 법무팀뿐만 아니라 대형 로펌인 한율에 소속된 거물급 변호사들이 잔뜩 달라붙어서 기소를 못 하도록 막을 텐데, 자네 혼자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고?”
이런 경우에는 수사팀을 보강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전병주 검사만 닦달했다.
어쩌면 이미 태일그룹 쪽에서 오귀남 지검장한테 줄을 대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연결될 정도로 좁은 곳이 바로 법조계였기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정계에 관심이 많은 야심가였기에 든든한 스폰서가 되어 줄 수 있는 태일그룹에서 손을 내민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스폰을 기대하고 같은 태일그룹 3세인 김인철이 꾸민 대로 일을 벌이고 있는 거니까 서로 피차일반이었다.
“심려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인 곧 끝까지 밀고나가 김선균 사장을 기소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직접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데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목을 세우고 하는 말에 오귀남 지검장이 사나운 눈빛을 띄었다.
“흠.”
그는 턱을 괴고서 품평이라도 하듯 노골적인 시선으로 전병주 검사를 스윽 훑어보았다.
사뭇 불쾌했지만 겉에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서 있으니 이내 생각지도 못한 말이 오귀남 검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좋아. 뒤는 내가 밀어줄 테니 마음대로 해 보게.”
“······?”
예상치 않은 전개에 전병주 검사가 오히려 흠칫하여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왜, 이런 말을 해서 당황스럽나?”
“아, 아닙니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오귀남 지검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경제에 적지 않은 파장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녹祿을 먹는 입장에서 재벌가라고 해서 죄를 그냥 묻어 줄 수는 없지. 특히나 마약 같은 중범죄를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평소 오귀남 지검장이 보여 주던 행동하고 완전히 상반되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쳐 줬다.
그리고 검찰 최고층 중에 한 명인 오귀남 지검장이 힘을 실어 준다면 한결 수사에 탄력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내일부터 평검사 둘을 붙여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만 나가 보도록 해.”
“감사합니다.”
몸을 일으킨 전병주 검사가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밖으로 나가자 오귀남 지검장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오귀남 지검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삐를 풀어 줬으니 한동안 꽤 시끄러울 겁니다. 예······ 예.”
오귀남 지검장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을 덮고 있던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 올리곤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 다니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한국 사람들 냄비근성 아시잖습니까. 조 실장님 일은 금방 묻힐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제가 찾아뵙지요.”
짧은 통화를 끝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바깥 거리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거두어 들였다.
원래는 청탁을 받아 사건을 축소해서 벌금형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로 박상빈 비서실장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청와대에서 측근 비리 스캔들을 수면 아래로 잠재우기 위해 도움을 청해 오자 얼른 배를 갈아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