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01
701
목적지까지 앞으로 10여 분.
잠깐이지만 그래도 눈을 붙여 둘 요량으로 박상빈 비서실장은 길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동차 엔진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조용히 앞에 앉아 있던 이두현 과장의 눈동자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위에 달려 있는 룸미러에 박상빈 비서실장이 여전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형형한 안광이 살아 있으며 허리도 꼿꼿하여 젊은이 못지않은 박력을 자랑하는 박상빈 비서실장이지만,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서인지 주름살이 깊게 파인 얼굴에 마치 한순간의 안식을 구하듯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자동차는 여전히 도로를 계속 달려가다가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팔각정에 천천히 멈추어 섰다.
야심한 시각이라 주홍빛 가로등만이 주차장을 밝히고 있었는데, 어둠이 짙어 그마저도 단숨에 집어삼켜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긴장한 얼굴을 한 이두현 과장은 안전벨트를 풀면서 뒤의 박상빈 비서실장을 불렀다.
“도착했습니다.”
“······.”
“실장님?”
룸미러로 훔쳐본 박상빈 비서실장의 표정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이두현 과장은 차에서 먼저 내린 후 뒤로 돌아가 뒷좌석의 문을 열고 조심스레 박상빈 비서실장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실장님, 일어나 보십시오.”
하지만 박상빈 비서실장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피곤했다고 해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이렇게 곯아떨어질 수 있을까.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도, 이름을 불러도 눈꺼풀조차 희미하게 떨리지 않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박상빈 비서실장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이두현 과장은 몸을 일으켜 살짝 흐트러진 박상빈 비서실장의 넥타이를 가지런히 정돈해 주면서 깊은 회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을 상대는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건만, 그래도 이두현 과장은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실장님.”
일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막상 박상빈 비서실장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진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과, 과장님, 이제 어쩝니까?”
운전석에 있던 기사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묻자 정신을 차린 이두현 과장은 얼른 혹시 누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실장님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돌아가신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무섭게 쏘아보는 시선에 기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니까 겁낼 필요 없어.”
“정말 그렇겠지요.”
“이 차 안에는 블랙박스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걸 자네도 알잖아.”
박상빈 비서실장이 이용하는 차량이다 보니까 외부에 노출돼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것들이 많았기에, 아예 처음부터 영상 녹화 기능이 있는 블랙박스 장치를 빼 버리고 운행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기사는 슬쩍 이두현 과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약속하신 돈은 제대로 주시는 거겠지요?”
그러자 이두현 과장이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얼른 봉투를 건네받은 기사가 안을 열어 보자 여러 번 손을 거쳐서 세탁이 된 10만 원짜리 수표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대충 봐도 5천만 원은 넘어 보였다.
“먼저 준 것까지 합쳐서 정확히 1억이야.”
누가 뺏어 가기라도 할까봐 기사는 얼른 수표가 들어 있는 봉투를 윗도리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갑자기 돈을 쓰면 의심을 받게 될 테니 한동안은 깊숙이 묻어 두는 걸 잊지 말도록 해.”
“염려 마십시오.”
몸을 바로 한 이두현 과장은 뒷좌석에 자는 듯 누워 있는 박상빈 비서실장을 잠시 쳐다보고는 추적이 어려운 대포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일은 다 끝났습니까?
대포폰을 타고 들리는 차민성 대리의 목소리에 이두현 과장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수고하셨습니다. 평소 지병이 있으셨으니 아무도 살인을 의심하지 않을 못할 겁니다. 뒤처리를 확실히 하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잔금이나 확실히 넣어.”
-사망이 확인되면 매번 이용하던 계좌로 돈이 송금될 겁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에 통화를 끝낸 이두현 과장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평소 복용하던 고혈압 약 대신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약품을 건넨 대가로 그가 받기로 한 돈은 20억 원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살인자로 평생을 교도소에서 썩어야 될지도 몰랐으나, 이만한 액수라면 충분히 모험을 걸어 볼 만했다.
상황이 전부 마무리되면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남은 평생을 여유롭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이두현 과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글러브박스에서 약통을 꺼내 안에 들어 있던 독약을 전부 하수구에 버렸다.
그러고는 빈 약통을 멀리 주차장 옆에 있는 풀숲에다가 힘껏 던져 버려 증거를 깨끗이 인멸했다.
끈적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바 안.
세계 각국의 술병들이 높다란 천장까지 빼곡하게 놓여 있는 진열장을 마주 하고 김인철이 혼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바텐더가 진열장에서 코냑을 꺼내 잔에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술잔에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던 김인철은 특유의 타인을 비웃는 듯한,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금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렇게 두 번째 잔이 반절 이상 비워졌을 때쯤 차민성 대리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이 끝났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허공에서 술잔을 든 김인철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럴고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차민성 대리를 쳐다보면서 입을 뗐다.
“뒤처리는 확실히 했겠지?”
“예.”
약간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말했다.
“지시한 대로 움직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차민성 대리가 물러나자 김인철은 흐느끼는 재즈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술을 한 모금 입안으로 넘겼다.
한차례 뜨거운 열풍이 지나간 방 안, 엉클어진 침대에 혁권이 소현과 함께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붙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혁권이 입을 열었다.
“사랑해.”
“정말요?”
고개를 살짝 들며 소현이 묻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면서 대답했다.
“너만 보면 이렇게 심장이 뜨겁게 뛰잖아.”
“풋.”
어디 책이나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문구에 소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예요? 완전히 바람둥이 같아.”
입으로는 핀잔을 줘도 입꼬리가 동그랗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것이 썩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소현의 탐스러운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한 혁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이번에 영화를 찍기로 했다고?”
“회사로 들어온 것들 가운데 너무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서 하기로 했어요.”
아직 신인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는 못했지만 연달아 드라마 두 편이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회사로 출연을 요청하는 제안이 꽤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은신영도 인지도를 크게 높이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광고를 두 편이나 찍었고 박보미와 윤세아도 상당히 바쁘게 활동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것이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의 수익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소속 배우들이 많은 매출을 올려 주고 경쟁력을 갖춰 나가는 건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원래부터 매니지먼트 일에 애착이 컸던 정동식 이사는 더욱 의욕적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하반기에 정 PD가 구상 중인 드라마에도 출연을 해야 되는데, 너무 힘들지 않겠어?”
KBN 방송국을 나와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로 이직한 정현태 PD는 휴식을 끝내고 ‘태양의 전사’와 ‘수호령’을 쓴 히트 작가인 왕은정하고 손을 잡고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소현과 소속사 배우 몇이 함께 출연하기로 이미 계약이 된 상태였다.
“영화 촬영이 먼저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게다가 조연이라 그렇게 분량도 많지 않을 것 같으니 드라마 시작하기 전까지는 다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소현은 생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본을 보니까 배역이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이전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캐릭터라 솔직히 욕심이 나요.”
“흠······.”
혁권은 소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거리며 일부러 놀리는 듯한 기색으로 짓궂게 웃었다.
“이젠 아주 배우 다 되셨어. 안 그래?”
“그래도 모델 일 그만둔 건 아닌 거 알죠. 둘 다 성공하고 싶다고 하면 너무 욕심이 많은 건가?”
“아니야. 하고 싶은 건 해야지.”
혁권은 자기만 믿으라며 눈썹을 찡긋거렸다.
“힘들면 언제든 이야기를 하고 난 항상 네 편이라는 거 알지.”
“칫. 말은 정말 잘한다니까.”
그러면서 소현은 발그레 달아 오른 얼굴로 더욱 깊이 그의 품에 안겼다.
함께만 있어도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둔 스마트폰 액정에 불이 들어오면서 진동이 가볍게 울렸다.
우우웅.
소중한 순간을 방해하는 소리에 그는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고는 한쪽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박상빈 비서실장 사망.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혁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고개를 든 소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묻자 혁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풀면서 말했다.
“별일 아니야.”
“······.”
무언가 일이 있는 것 같았지만 혁권이 괜찮다고 하자 그녀는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혁권은 그녀를 안은 채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며 매섭게 눈을 번득였다.
정오가 다 되어서 소현을 보낸 혁권은 거실 소파에 앉아 하킴한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자세히 보고받았다.
“심장마비라고?”
“그렇습니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까 고혈압과 심혈관 쪽이 안 좋았다고 합니다.”
정년을 훌쩍 넘긴 6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아무리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다고 해도 몸 이곳저곳이 고장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을 뒤로 기댄 혁권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지병에 의한 돌연사란 말인데, 그렇다고 해도 시기가 정말 공교롭군.”
김종원 회장이 의식불명인 가운데 두 아들이 그룹 경영권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박상빈 비서실장의 죽음은 후계 구도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마약 복용과 밀수 혐의를 받아 구속 상태로 검찰 조사를 받으며 곤욕을 치르고 있는 김성균 사장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하킴이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지포 라이터를 켜서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얀 담배 연기를 두어 모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은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러면 김성균 사장 쪽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밀어붙이던 임시 주주총회 소집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다고 봐야 되겠군.”
“조금 더 지켜봐야 되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연다면 김성균 사장 측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편의 공격을 받아서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컸다.
“김성균 사장이 검찰 수사를 받자마자 박상빈 비서실장이 심장마비로 죽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딱 맞아떨어진단 말이야.”
“김인철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시선을 받은 하킴이 신중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