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19
719
그렇게 얼마쯤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자 꺼내서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미간을 좁혔다.
그냥 무시해 버릴까 하다가 이내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나요.”
-사고를 아주 크게 쳤더군.
심인성 과장의 말을 들은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을 벌인 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이오. 내가 오히려 피해자라고.”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진 않지만 심인성 과장도 난데없이 터진 사건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이번엔 수습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요.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라니, 지금 우리 쪽은 물론이고 청와대에서도 난리가 났단 말이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자 상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먼저 습격을 당했고 맞서 싸운 것뿐이오.”
-그러니까 정당방위를 한 거다?
“죽이겠다고 자동소총을 들이미는데 그냥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이렇게 겁 없이 일을 벌인 상대가 누구요?
“아직 파악하고 있는 중이오.”
-이것 참.
난감한 태도를 보이면서 심인성 과장이 말을 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어서 빨리 상황을 수습해야 되니까 만납시다.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러자 혁권이 바로 제안을 거부했다.
“그거 어렵겠소.”
-이보시오, 김 대표. 지금 분위기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요. 당장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고 요원들을 동원해서 잡아 오라는 걸 겨우 막고 있단 말이오.
딱딱하게 굳은 말투에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대로 느껴졌다.
“나도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거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만나는 건 나중으로 미룹시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급하긴 마찬가지지만 저렇게 단호한 태도로 나오니 더 이상 재촉할 수가 없었다.
-알겠소. 하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끌진 마시오, 기다려 주는 것도 한도가 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이 있소.”
-뭐요?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혁권이 말했다.
“부상을 당한 부하들이 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줬으면 좋겠소.”
한국 총기 소유와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에 병원으로 총상 환자가 들어오면 무조건 경찰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질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서 국정원의 힘을 빌리려는 거였다.
-내 말은 무시하고 이런 일이나 시키다니 그쪽 뒤치다꺼리나 하는 사람인 줄 아시오.
“부탁하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도록 하겠소.”
-······쯧. 알았소.
심인성 과장은 마지못해 혁권의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한 편으론 한마디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대가는 비싸게 받을 테니까 각오해 두는 것이 좋을 거요.
“도움을 받은 건 잊지 않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 말 기억해 두겠소.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그는 일단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 놔두고 온 부하들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걸렸는데 심인성한테 부탁을 해 뒀으니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노린 자를 찾아내 복수하는 일만 남았다.
소파에 앉은 채 차분히 머릿속으로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을 하나씩 떠올려 봤다.
이쪽 세계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거물로 커 가는 과정에서 악연을 맺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당장 의심이 가는 자들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넘어갔다.
그중에서 누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고심하고 있을 때 탁자에 놓아 둔 스마트폰이 작게 진동했다.
이번에는 샌더슨의 전화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뜸을 들이던 혁권은 이내 전화를 받았다.
“어쩐 일이오?”
-서울에서 큰 일이 벌어졌다는 얘길 들었네.
“그쪽에서 상관할 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관계가 있으니 연락을 한 것이 아니겠나?
그러자 순간적으로 혁권의 눈빛에 예기가 감돌았다.
“······무슨 뜻이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도록 하지.
“그쪽에서 꾸민 일은 아니겠지?”
-그랬다면 전화를 걸지 않고 킬러들을 보냈을 거야.
“흥.”
그는 한쪽 뺨을 실룩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만나면 그쪽을 노린 배후가 어디인지 알려 주도록 하지.
혁권이 스마트폰을 움켜쥐고는 와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구 꾸민 일인지 알고 있다는 거요!”
-어디든 우리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어.
“그런 거라면 습격을 당하기 전에 미리 알려 줬어야지.”
책망하는 것처럼 날선 어조에 샌더슨이 사뭇 미안하다는 투로 답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도 놓친 게 있었소. 유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권은 가늘게 눈을 뜨며 불신의 빛을 내비쳤다.
“정말 실수였는지 의심스럽군.”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쪽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인데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 리가 없지 않나.
“뒤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나름 지금까지 서로 신뢰를 쌓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서운하군.
혁권은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친구인지 적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니까 말이오.”
-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혁권의 의심을 가볍게 흘려 넘긴 샌더슨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내일 한국에 도착하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도록 하지.
“알겠소.”
CIA를 믿지는 않았지만 샌더슨의 말대로 지금은 그에게 해코지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중동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이란과 이스라엘의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혁권을 보호해야 될 입장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차가운 밤공기가 몰려들었다.
짠 바다 냄새와 함께 멀리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낸 혁권은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지포 라이터를 켜서 끝에 불을 붙였다.
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자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날려 옆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는 혁권의 눈은 서늘하게 번뜩였다.
“위치 확인했습니다.”
“어디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이스가 위성 지도가 띄워진 태블릿 PC를 샌더슨에게 건네주면서 대답했다.
“서산이라는 도시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들어간 해안 마을입니다.”
포인트가 찍힌 지점을 손가락으로 확대하자 혁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별장의 모습이 그대로 액정 화면에 나타났다.
“어떻게 할까요?”
“괜히 한국 지부 요원들이 움직이면 블랙레빗의 위치가 모사드에 노출될 수도 있으니까 그냥 놔둬.”
“예.”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러셀 국장의 지시를 받아 급하게 CIA에서 운용하는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게 된 샌더슨은 태블릿 PC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모사드 이 멍청한 놈들 때문에 어렵게 진행시키고 있는 협상을 완전히 망칠 뻔했잖아.”
그러자 루이스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말했다.
“정말 모사드가 단독으로 결행한 일일까요?”
“그럼 이스라엘 정부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였다는 거야?”
“처음부터 이번 협상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스라엘이었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샌더슨은 얼굴을 굳힌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에 이란이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자리를 잡고 세력을 굳히는 것만큼 신경 쓰이고 껄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가 전쟁까지 불사하고 이란의 진출을 막으려는 거였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동맹을 맺고 있는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앞서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중동전쟁도 이스라엘군이 뛰어난 전투력을 보인 것도 있었지만, 미국이 뒤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골치 아프고 돈만 들어가는 이스라엘 문제에 미국 정부도 관여하기 싫었지만, 정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내 거주 중인 유대인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국장님은 물론이고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직접 이스라엘 대사를 불러 경고했으니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거야.”
경제 제재를 일부 푸는 통 큰 양보를 해 가면서 협상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하던 만큼 이번 일에 대해 브랜스테드 국무장관과 백악관에서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어찌 됐건 블랙래빗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애써 만든 판이 그대로 깨질 뻔했어.”
중얼거리듯이 말한 샌더슨은 고개를 들어 마주 앉아 있는 루이스를 보며 물었다.
“한국에는 몇 시에 도착한다고 했지?”
“하와이에 있는 히컴Hickam 기지에서 급유만 받고 바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늦어도 새벽 5시가 되기 전에는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한 샌더슨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혁권은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수없이 밀려왔다가 부서지는 파도의 새하얀 포말들을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이 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지만 선글라스 아래로 감춰진 그의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잔잔하기만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하는 사람처럼 미동 없이 서 있던 혁권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다가온 검은 승용차가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이내 샌더슨과 루이스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샌더슨은 호젓하니 제법 운치가 있는 등대와 방파제의 풍경을 보더니 휘익, 휘파람을 한번 불고 말했다.
“작은 어촌 마을의 이름 모를 방파제라······. 좋군, 그림도 멋지고.”
가끔씩 고깃배가 수평선 언저리에서 아른거릴 뿐, 갈매기와 파도 외에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장소였다.
혁권은 백성균과 마찬가지로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루이스를 곁눈으로 흘긋 보고선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이렇게 나왔으니 흉수兇手가 누군지 말해 보시오.”
인사도 건너뛴 채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샌더슨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받았다.
“이제 막 만났는데 그래도 인사 말 정도는 나누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쪽하고 말장난이나 할 여유 따윈 없으니까 묻는 거나 대답하시오.”
뾰족한 목소리에 샌더슨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그를 노린 흉수가 누군지 알려 줬다.
“키돈이야.”
“······!”
고개를 돌린 혁권은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샌더슨을 쳐다봤다.
“모사드의 비밀 암살 조직인 키돈이 미스터 김의 목을 노리고 움직였던 거지.”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잇새로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그러자 샌더슨이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혁권한테 건네줬다.
“이게 누군지 알고 있을 거야.”
“이자는······.”
공항 CCTV에 찍힌 걸로 보이는 사진에는 슈페너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와 있었다.
단 한 번밖에 보지 않은 데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수염을 길렀지만, 인상이 깊게 남아 있던 상대였기에 금방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습격이 있기 이틀 전에 한국으로 들어왔어.”
사진을 손에 든 혁권은 샌더슨의 말을 들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