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51
751
“쯧. 잘도 여기에 얼굴을 들이미는군.”
대놓고 싫은 티를 냈지만 김인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주주가 총회에 참석하는 거 당연한 일 아닙니까?”
“이 자식이.”
서로 숨김없이 적의를 드러내며 팽팽하게 맞서는 두 사람의 모습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단 한 사람, 이영순 여사만은 달랐다.
그녀가 비록 장남의 손을 들어 주긴 했지만 다른 한쪽도 제 배로 낳은 자식이었기에 이렇게 눈앞에서 다투는 꼴을 보면서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만들 하렴.”
이영순 여사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아들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보고 있는데 이 무슨 추태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먼저 한발 물러난 것은 김성균 사장이었다.
김인철 역시 한껏 험악했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어머니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이영순 여사가 대꾸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됐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바로 알아차린 김인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인 이영순 여사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말했다.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형제끼리 좋게 해결할 수도 있었지 않니?”
“그럴 수 없다는 걸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작게 한숨을 내쉰 이영순 여사는 굳은 얼굴로 한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이두현 과장을 보며 말했다.
“대기실로 안내해요.”
“아. 예.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사모님.”
안내를 하는 이두현 과장을 따라 이영순 여사가 먼저 자리를 뜨자 김성균 사장이 사나운 눈빛으로 동생인 김인철을 노려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번에는 네놈의 비겁한 꼼수가 통했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을 거야.”
“글쎄. 다음 기회가 있을까?”
“뭐야?”
“큰형은 날 못 이겨.”
“이게 정말!”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김성균 사장이 김인철의 멱살을 잡으려는 걸 옆에 있던 고동욱 실장이 황급히 막았다.
“사장님, 다른 주주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느새 주주총회 시간이 다 됐는지 하나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주주들의 모습에 김성균 사장은 얼굴을 구긴 채 잇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응. 언제까지 네놈이 이럴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싸늘하게 말을 내뱉고는 씩씩거리며 몸을 돌려 멀어지는 김성균 사장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김인철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빨리 보고 싶군.”
개회 시간이 가까워지자 주주들이 자리를 조금씩 채우고 있는 가운데 김인철도 측근들과 함께 앞쪽 귀빈석으로 가서 앉았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국민연금 쪽 인사들을 힐끔 쳐다본 김인철은 손을 까딱여서 차민성 대리를 가까이 불렀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저쪽하고 말을 확실히 맞춰 뒀겠지?”
턱짓을 하며 묻자 차민성 대리가 바로 알아듣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정대로 중간에 안건을 상정시키면 거기에 표를 던져 줄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 번 더 단속을 해 둬.”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인 차민성 대리가 자리를 뜨자 김인철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느긋한 얼굴로 주주총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사전에 공지한 시간이 되자 주요 귀빈과 주주들이 착석해 있는 가운데 사회를 맡은 이두현 과장이 연단 위로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아아, 주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먼저 바쁘신데도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정관 제21조에 의거해서 192회 정기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을 맡은 중역이 의사봉을 쳐서 개회를 알리자 참석자들이 박수를 쳤다.
식순에 따라 모두 일어나서 애국가를 제창한 뒤 바로 3/4분기 태일산업의 현황 보고가 이어졌다.
“총매출액 5,700억 원에 영업이익은 1,900억 원을 기록했고, 680억 원의 당기 순이익을 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배포해 드린 회계 자료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분기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작년에 비해서 현저하게 떨어진 순이익 액수에 실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순이익이 줄어든 건 태일산업만의 일이 아니었는데 김종원 회장이 쓰러진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악재들이 겹치면서 태일그룹 전체 계열사들이 매출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태일건설의 상황이 가장 심각해서 아파트 분양 부진과 용산드림타워에 들어가는 사업비 증가로 이번 분기에만 1천억 원이 훌쩍 넘는 적자를 내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별도의 사업을 하고 있어도 매출 대부분을 그룹 계열사들을 통해 올리는 태일산업의 실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도 실적 하락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당기 순이익이 1천억 원 아래로 내려갈 만큼 안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어닝 쇼크Earning shock였다.
실망하는 주주들의 모습에 의장을 맡은 중역이 얼른 분위기를 정리하고 넘어가려는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2분기 연속 당기 순이익이 줄어들었습니다만 그동안 그룹 안팎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악재들이 해소되고 있기에 다음 분기부터는 반등을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주 여러분께서 저희 경영진을 믿고 다시 한 번 힘을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단상에 있던 의장과 다른 중역들이 허리를 꾸벅 숙였지만 워낙 실적이 안 좋게 나와서 그런지 주주들의 반응이 차가웠다.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두현 과장은 짧게 헛기침을 하곤 황급히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대고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흠흠, 그럼 다음 의제로 넘어 가겠습니다. 1호 안건은 새로운 사외 이사와 감사 선임에 관한 겁니다. 후보자들의 이력에 대해서는 미리 나눠 드린 자료를 통해 충분히 확인하셨을 겁니다. 2호 안건은 태일 백화점과 유통의 계열 분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을 사전에 공지했으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고개를 든 이두현 과장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좌중을 들러보면서 말했다.
“방금 말씀드린 안건에 대해 이의가 있으시다면 지금 밝혀 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에 앉아 있던 주주 한 명이 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소리를 쳤다.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앉아있던 모두의 시선이 중년인한테로 쏠렸다.
어머니인 이영숙 여사와 함께 귀빈석에 나란히 자리한 김성균 사장 역시 이맛살을 찡그리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자는 뭐야?”
그러자 뒤에 있던 고동욱 실장이 살짝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총회장 뒤편에 앉아 있는 걸로 볼 때 소액주주들 가운데 한 명인 것 같습니다.”
“개나 소나 총회장에 나와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원. 이거 참석 자격에 제한을 두든지 해야지. 쯧.”
김성균 사장이 짧게 혀를 차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주주 신분을 확인받은 중년인은 진행 요원한테 무선 마이크를 받아서 계속 발언을 이어 갔다.
“아까 다음 분기부터 실적이 반등될 거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태일그룹이라는 커다란 배를 이끌어 갈 선장이 마땅히 없는 현재 상황으로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언론 보도에 나왔다시피 병상에 누워 있는 김종원 회장님의 병세가 금방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그룹 수장은 물론이고 지주사인 태일산업 대표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다고 봅니다.”
민감한 발언에 주주총회장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무슨 뜻이냐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나오는 가운데, 몇몇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주변을 살피는 이들도 있었고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런 가운데 단연코 가장 강하게 반발한 인물은 김성균 사장이었다.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성난 기색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저놈 저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나가게 해!”
하지만 중년인은 시선이 집중된 채 온갖 말들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룹을 조속히 정상화시키기 위해 태일정유 김인철 이사를 부회장으로 선임하는 걸 제의하는 바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몇 주주들이 몸을 일으켜 박수를 치면서 중년인의 의견에 동조했다.
“옳소!”
“제청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헛소리하지 말고 앉아!”
김성균 사장을 지지하는 쪽에서 바로 반발을 하면서 총회장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욕설과 고성으로 시끄러워졌다.
“주주가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데 뭐가 문제야?”
“의견도 의견 나름이지.”
점점 분위기가 과격해지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면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조용! 조용히 해 주십시오.”
억센 외침에 간신히 조금씩이나마 분위기가 진정되어 갈 듯했으나, 그때 나서서 누군가가 기름을 부었다.
“의장, 회사 정관에 따라 의견이 나왔으니 안건으로 상정해서 투표를 하는게 맞지 않겠소. 주주총회인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끼어든 것도 아니고. 다른 주주들도 동의를 하니 충분히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소?”
김인철이 그렇게 말하자 의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단 한 주라도 주식을 보유한 주주는 총회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안건을 상정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에 직접 연관된 아주 민감한 문제였기에 의장을 맡은 중역은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편 그때서야 이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동생인 김인철이 꾸민 일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김성균 사장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짓을 벌이려고 어머니와 내가 아버지가 가진 지분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꼼수를 쓴 거였어.”
곁에 있던 이영순 여사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곤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있는 동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김성균 사장은 속이 들끓는 와중에도 아들이랍시고 제 어머니를 챙겼다.
“괜찮습니다. 저래 봤자 셋째가 가진 지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 그렇겠지.”
“절 믿으세요.”
두 사람이 가진 지분을 합치면 8%나 되고 그 외에도 우호지분이 있으니 고작 3%밖에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김인철이 투표에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순 여사는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 쉽사리 떨쳐 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잠시 총회 진행을 멈추고 다른 중역들과 긴급히 회의를 한 의장은 결국 김인철에 대한 그룹 부회장 선출 의견을 기존 안건들하고 함께 투표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김성균 사장의 눈치가 보였지만 그렇다고 주주가 안건을 낸 걸 그냥 무시했다가는 자칫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모두 세 가지 안건에 대한 투표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주주분들은 나눠 드린 용지를 가지고 차례대로 단상 옆에 마련된 기표소로 가셔서 투표를 해 주십시오.”
의장의 말에 주주들은 급히 새로 만들어서 배포한 투표용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표소로 향했다.
애초에 총회에 참석한 주주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투표는 금방 끝났고,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단상에서 바로 개표가 이루어졌다.
으레 하던 것처럼 심심한 주주총회가 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룹의 경영권이 걸린 안건이 갑자기 상정되면서 점점 흥미진진한 전개로 이어지자 주주들은 단상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잠깐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마침내 개표가 마무리되자 의장은 긴장한 얼굴로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1호와 2호 안건은 투표에 참석한 주주의 과반이 넘는 찬성을 받아 원안대로 통과가 됐습니다.”
태일그룹 경영권 분쟁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총회장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침묵한 채 다들 이어지는 의장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지막 안건인 김인철 이사의 그룹 부회장 선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바로 앞 귀빈석에 앉아 있는 김인철과 김성균 두 형제를 번갈아 쳐다본 의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결과를 마저 발표했다.
“총참석 주식수 3,500만 주 가운데 기권 800만 주, 찬성 1,200만 주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탕탕!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총회장은 환호와 탄식이 뒤섞인 채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이건 무효야! 이럴 수는 없어.”
설마하고 있던 김성균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지만 투표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