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59
759
며칠 뒤, 환자복을 벗어 던진 혁권은 새로 사 온 와이셔츠에 팔을 집어넣으며 마침내 병원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에 후련한 표정을 했다.
물론 의사한테선 조금 더 입원해 있는 게 낫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중상도 아닌데 한가하게 병상에 누워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단추를 잠그다가 등허리쯤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혁권이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그것을 본 하킴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보스, 며칠 더 쉬다가 퇴원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직 완전히 다 나은 상태도 아닌데 괜히 무리하시다가 상태가 안 좋아지면…….”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데 뭐 하러.”
혁권은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주일이나 있었으면 많이 쉰 거지.”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괜찮대도.”
더 이상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는 혁권의 단호한 태도에 하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혁권은 간간이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재빨리 단추를 다 잠근 뒤 백성균이 건네주는 윗도리를 받아 어깨에 걸쳤다.
“환자복을 벗으니까 이제 좀 살 것 같군.”
팔을 들어 소매를 정리한 그는 하킴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놈이 은신처를 옮겼다고 그랬지?”
살짝 얼굴을 굳힌 채 하킴이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홍콩과 같은 특별 행정구지만 중국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곳이라 공안에서 수배령을 내리자 불안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별도의 행정장관이 있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2029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는 걸로 되어 있었으나, 마카오는 사실상 중국 정부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도망친 곳이 어디야?”
“필리핀 세부섬입니다.”
그러자 혁권은 눈을 번들거리면서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묏자리로 딱 좋군.”
“직접 가실 생각입니까?”
하킴의 물음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한 걸 갚아 줘야지. 그러려고 일찍 퇴원하는 거잖아.”
온몸으로 살기를 피워 올리는 모습에 하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딱히 만류는 하지 않았다.
피를 봤으면 되돌려 주는 것이 이쪽 세계의 불문율인 데다가 무엇보다 왕전 같은 조무래기한테 당할 혁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병원을 나가지 않고 혁권은 같은 층에 있는 박희도 대좌의 병실을 찾았다.
수류탄 파편에 피부가 조금 찢겨 나가고 타박상에 그친 그와 달리 박희도 대좌는 총알이 옆구리를 관통한 데다 여러 군데 복합 골절까지 입은 중상이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링거가 여러 개 달려 있는 걸 보니 회복을 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혁권을 발견한 박희도 대좌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서둘러 만류했다.
“그냥 누워 있으시오.”
한광성이 뒤로 비켜나자 가까이 다가간 그는 처음 봤을 때보다는 그래도 혈색이 많이 돌아온 박희도 대좌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몸은 좀 어떻소?”
“보시다시피 이제 그럭저럭 살 만합니다.”
이렇게 농담을 할 여유가 생긴 걸 보면 확실히 몸 상태가 상당히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그가 목숨을 구해 줘서 그런지 태도가 그 전보다 깍듯하고 호의적이었다.
“퇴원을 하는 겁니까?”
“사지가 멀쩡한데 병원에 있는 것도 갑갑하고 나가서 해야 될 일도 있고 해서 말이오.”
“그렇군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박희도 대좌가 말을 이었다.
“나도 이틀 뒤에 평양으로 돌아갈 겁니다.”
“몸에 파편 조각이 남아 있어서 제거 수술을 한 번 더 받아야 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었소?”
혁권의 시선을 받은 박희도 대좌가 쓴웃음을 지었다.
“평양에서 소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국경 바로 코앞에 위치한 단둥이었으니 공안 당국이 아무리 정보를 통제시켰다고 해도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을 북한 정부가 파악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북한의 정보 수집 전초기지나 마찬가지인 북한 식당이었으니, 평양에 상황이 전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습격을 당한 거라지만 어찌 됐건 최고 우방인 중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특히 박희도 대좌는 잠수함 밀매를 비롯해 여러 가지 민감한 사안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인물이었기에, 혹시나 엉뚱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지 북한 당국에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병실에 못 보던 건장한 사내들이 있더니 아마도 박희도 대좌를 데려가기 위해서 평양에서 나온 이들인 것 같았다.
평양으로 소환되면 크든 작든 문책을 당할 가능성이 컸지만 그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동까지 초대해 놓고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파서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진심이 담긴 얼굴로 사과하는 박희도 대좌를 혁권이 손을 들어 말렸다.
“아니, 괜찮소. 그쪽 잘못도 아닌데 굳이 그리 생각하지 않아도 되오.”
“그래도 어찌 됐건 주변 정리를 제대로 못한 내 잘못이 큽니다.”
공안과 CIA가 전해 준 정보를 박희도 대좌한테도 말해 줬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일을 벌인 건지 모두 알게 됐다.
박희도 대좌는 분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게다가 김 선생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 신세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이번 일로 박희도 대좌는 그에게 확실히 호감을 가지게 됐는데, 혁권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 기억해 두겠소.”
그러면서 혁권은 상대의 상처 부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니 푹 쉬고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합시다.”
평양에 돌아가 문책을 무사히 잘 넘기라는 속뜻을 바로 알아차린 박희도 대좌는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 되겠소.”
그렇게 박희도 대좌와 인사를 나누고 다음을 기약한 혁권은 병원을 나와 곧장 시 외곽에 위치한 공항으로 향했다.
사장실 책상 앞에 앉은 김성균은 어제 끝난 울산 신축 아파트 분양 결과 보고서를 확인하고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울산 경기가 최악이라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1,300세대가 넘어가는 대규모 재개발 단지 가운데 조합원 물량까지 합쳐도 절반이 채 분양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울산 현장은 한참 건설 경기가 좋을 때 시공사로 선정되기 위해 손해를 보고 수주한 공사였기에 타격이 더욱 컸다.
미분양이 나면서 기대했던 만큼 자금이 들어오지 않아 이번 달에만 태일건설에서 추가로 부담해야 되는 공사비가 무려 100억 원이 넘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는데 공사를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기에 하루빨리 미분양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금융 이자와 공사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안 그래도 돈을 잡아먹는 하마인 용산드림타워 프로젝트와 건설 경기 악화로 인해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데, 악재가 더해지자 그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이 깊어졌다.
“끄으응. 정말 되는 일이 없군.”
그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서류를 책상에 탁 소리 나게 던졌다.
그러곤 끙 소리를 내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한쪽에 놓인 인터폰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사장님, 재무 이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김성균 사장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금방 답했다.
“들어오라고 해.”
-예.
잠시 뒤 문이 열리더니 구민재 재무이사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사장님.”
허둥대는 그를 보고 김성균 사장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냥 큰일 났다고만 하면 어떻게 알아!”
구민재 재무이사는 죄송하다고 어물거린 후 다급히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방금 신민증권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는 CP(기업어음) 발행을 잠시 보류시키겠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성균 사장이 눈을 부릅 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뭔 헛소리야!”
책상 앞에 선 구민재 재무이사는 사장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김성균의 고함에 어깨를 움츠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회사 분기 실적과 건설 경기 상황이 좋지 않아 이대로라면 CP 발행에 실패할 우려가 있어서, 이율 등 조건을 재조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신민증권 측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려치며 김성균 사장이 소리쳤다.
“지금 장난해? 무슨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하고 앉아 있어!”
회사채에 비해 금리 부담이 큰 데다 만기도 짧았지만 발행 절차가 비교적 간소하고 신용도가 어느 정도 낮아도 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바로 CP였다.
그런데 발행을 일주일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일방적으로 계획된 일정을 연기한다니,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도 납득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막무가내입니다. 확인해 보니 이미 신민증권 홈페이지에 저희 회사 CP 발행을 연기한다는 공지까지 올려진 상태였습니다.”
“이것들이 정말!”
사전 협의도 없이 신민증권 측에서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김성균 사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설사 정말로 CP를 발행하는 데 문제가 있더라도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더 이상 태일건설과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김성균 사장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화가 지나치면 오히려 냉정하게 된다던가.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머리로 다시 자리에 앉은 후 잠시 동안 말을 고르는 듯했다.
갑자기 차분해진 김성균 사장을 보고 불안한 것처럼 상황을 살피던 구민재 재무이사는 그가 자신에게로 시선을 향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누구야!”
“예?”
“어떤 개자식이 내 일에 훼방을 놓는 거냐고!”
눈치 빠른 구민재 재무이사는 김성균 사장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CP 발행을 방해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자네 생각에는 이게 정상적으로 보여!”
“그, 그렇군요.”
더듬거리면서 대답하는 구민재 재무이사를 한심하게 쳐다본 김성균 사장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흥. 확인해 볼 것도 없이 이런 짓을 꾸밀 놈은 하나밖에 없지.”
“김인철…… 부회장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혹시라도 김성균 사장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눈치를 보면서 부회장이라는 명칭을 썼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 자식이 아니라면 신민증권이 갑자기 왜 이러겠어!”
CP 발행이 연기되거나 무산된다면 주관사로서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데다가 수십억 원에 달하는 수수료 수익도 함께 사라지게 되니, 신민증권 입장에서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어깃장을 부린다는 건 분명 누군가 뒤에서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컸다.
김성균 사장은 그게 자신과 그룹 경영권을 두고 다투는 김인철일 거라고 확신했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일부러 태일증권이 아닌 신민증권을 CP 발행 주관사로 했는데, 이러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구민재 재무이사가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달 말까지 돌아오는 어음이 모두 얼마나 되지?”
“1,500억 원이 조금 안 됩니다.”
“뭐가 그렇게 많아?”
조금 진정했다 싶더니 다시 언성이 높아졌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구민재 재무이사는 마냥 눈을 바닥에 둔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울산 재개발 아파트까지 미분양이 나면서 추가로 공사비 부담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금 부족이 더 심해졌습니다.”
“미치겠군.”
와락 얼굴을 구긴 김성균 사장은 한쪽 팔을 뻗어 인터폰 버튼을 누르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중역들을 전부 내 방으로 올라오라고 해!”
-네,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