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80
780
“으음.”
충격적인 사실에 혁권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솔직히 천 회장이 당한 건 특별한 일이 아니오. 나 역시 비슷한 꼴을 겪었지 않소. 모르긴 해도 요즘 재계에서 돈을 좀 굴린다는 기업가들치고 밤에 잠을 편히 자는 이가 거의 없을 거요.”
시진핑 주석이 장기 집권 체제로 가기 위해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자금줄이 되는 재계도 함께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머릿속을 정리한 혁권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제게 한 제안과 이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왕민린 회장이 말했다.
“김 대표의 도움으로 운 좋게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언제 또다시 저들의 재물이 될지 모르는 처지요. 그래서 모든 걸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내 것을 지킬 자구책을 세울 생각이오.”
번득 떠오르는 생각에 혁권이 미간을 찡그렸다.
“투자금을 핑계로 거액의 자금을 외국으로 옮기려는 겁니까?”
“그렇소.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가져갈 수 없도록 꽁꽁 묶어 놨으니, 그런 편법이라도 써서 내 걸 지켜야 되지 않겠소.”
이야기는 그럴싸했지만 어찌 됐건 회사 자금을 빼돌려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려는 거였기에 엄연한 범법 행위였다.
당국 역시 멀쩡한 기업인들을 압박하고 목숨을 위협해서 강제적로 재산을 강탈하고 있으니 양쪽 다 피장파장이었다.
골치 아픈 일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혁권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을 텐데 왜 저한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왕민린 회장이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바로 대답했다.
“시진핑 주석의 측근인 백수광 부부장이라는 든든한 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예전과 달리 정부 당국의 통제가 심해진 상황에서 거액의 외화를 국외로 반출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 뒤에서 힘을 써 줘야만 일을 성사시킬 수 있소.”
왕민린 회장은 이미 한번 공안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이력이 있으니 더욱 외화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 대표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데다가 잡음 없이 이번 일을 끝낼 능력이 있어서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혁권을 보며 왕민린 회장이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짜로 일을 해 달라는 것은 아니요. 투자금 가운데 10%를 김 대표에게 주겠소. 물론 백수광 부부장 몫도 따로 떼어 줄 거요.”
왕민린 회장이 내는 투자금의 10%면 무려 6억 달러였다.
순간 바로 며칠 전에 용산드림타워 지분을 인수하는 데 쓴 돈을 떠올린 혁권은 내심 참 공교로운 상황이라 생각했다.
“날 도와주겠소?”
보상이 크긴 했지만 그는 왕민린 회장의 부탁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꽌시 관계인 백수광 부부장까지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하는 사업에 완다 그룹과 엮여 있는 것이 많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거절했을 터였다.
그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제가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니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왕민린 회장 역시 이 자리에서 바로 확답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순순히 수긍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하지만 시간이 많이 없으니 오래 끌지는 말아 주시오.”
“그러지요.”
혁권은 그렇게 답한 다음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위험부담이 큰 만큼 백 부부장한테 많은 걸 양보해야 될 겁니다.”
“알고 있소.”
각오를 단단히 굳힌 듯한 왕민린 회장의 모습에 그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든 대화가 끝나고 왕민린 회장과 헤어진 혁권은 자신의 객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조용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자니 유리처럼 반질반질하게 금칠이 된 출입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누가 보아도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제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혁권이지만, 방금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라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킴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보스.”
그러자 상념에서 깨어난 혁권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왕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아직 고민 중이야.”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흥미를 보이며 묻자 하킴이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우선 챙길 수 있는 이득이 적지 않지 않습니까. 아닌 말로 리비아에 있는 후세인 준장한테 받아 오는 원유를 1년 내내 팔아도 그 정도 돈을 벌기는 힘들 겁니다.”
유전과 정유 시설이 위치한 라스라누프를 장악한 후세인 준장은 이제 트리폴리 정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된 군벌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려울 때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후세인 준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혁권은 라스라누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전량 독점적으로 거래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주면서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안 될 것 같으면 백 부부장이 먼저 거절할 테니, 말 한마디 건네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번 일을 진행한다면 완다 그룹하고는 지금보다 관계가 더욱 끈끈해질 수밖에 없으니 중국에서 하시는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흐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킴의 이야기가 맞았다.
왕민린 회장이 제시한 대가도 적지 않았지만 중국 내 영화와 방송 업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완다 그룹이 뒤를 밀어준다면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를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기울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됐으나 원래 시련이 없는 성공은 없는 법이었다.
결심을 굳히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순간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살짝 머리를 숙인 하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줬다.
“아니야. 많은 도움이 됐으니까 앞으로 충고해 줄 것이 있으면 개의치 말고 언제든지 하도록 해.”
“······예.”
때마침 객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리자 혁권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발걸음을 뗐다.
다음 날 예정대로 4D 상영관 재개장 행사에 참여한 혁권은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서울이 아닌 북경으로 날아갔다.
잠시 호텔에서 머문 뒤, 연락을 받고 로비 앞으로 나가자 백수광 부부장이 보낸 벤츠 승용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십시오.”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하킴과 수행원들을 쳐다보자 경상이라고 이름을 밝힌 백수광 부부장의 비서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한 분은 함께 가시고 나머지 분들은 다른 차량을 타고 뒤를 따라오도록 준비해 놨습니다.”
벤츠 승용차 바로 뒤에 있는 검은색 밴을 본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하킴과 함께 뒷좌석에 올라탔다.
혁권을 태운 벤츠 승용차는 넓은 대로를 빠르게 달려갔다.
교통 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한 북경 시내 도로였지만, 중국 정부 관용차 번호판을 본 공안公安들이 우선적으로 길을 열어 줬다.
유명한 천안문天安門 광장을 지나 서쪽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자 차창 밖을 쳐다보던 혁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그러자 앞에 탄 경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남해中南海로 모시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
중남해라는 말에 혁권은 깜짝 놀라 눈썹 끝을 치켜올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는데 오랫동안 여러 중국 황조를 이어 오면서 황실의 원림이자 별궁이 위치해 있던 중남해는 현재 당, 정, 군의 전현직 최고 지도자들의 공관과 중요 기관 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총면적이 약 100만 ㎡로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하는 중남해는 그 자체가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구역인 만큼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항상 무장한 공안과 군 병력이 배치돼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난데없이 이런 곳에 간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백 부부장님의 집무실로 가는 거요?”
“그렇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직속 기관인 만큼 백수광 부부장이 속한 국가감찰위 사무실도 중남해 구역 안에 위치해 있었다.
만남이 외부에 드러나서 좋을 것이 별로 없을 텐데 바깥이 아니라 지켜보는 시선이 많은 중남해로 자신을 데려온 건지 도통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복잡한 생각이 계속 가지를 뻗어 나가려고 했으나,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직접 만나서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여기고 마음을 편하게 여겼다.
그렇게 긴장을 풀고 편안한 의자에 파묻혀 앉아 있으니 중남해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나타났다.
성벽처럼 높다란 담장을 좌우에 두고 고풍스러운 성문 형태를 한 출입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문화재였다.
검문소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해 보이는 바리케이드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고 자동소총을 휴대한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면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미리 통보를 해 놨는지 경상이 신분증을 내보이면서 뭐라고 병사에게 말하자 슬쩍 뒷좌석에 앉아 있는 그를 한번 쳐다보기만 하곤 그대로 통과시켜 줬다.
담장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호수와 함께 키가 큰 나무들이 주욱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멋들어진 건물들이 세워진 모습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쯤 갔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걸려 온 전화를 받은 경상이 운전사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곤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집무실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 계신다고 하니 그리로 가겠습니다.”
“알겠소.”
어디서 보든 딱히 상관이 없었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들어간 벤츠 승용차는 석조로 지어진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어서 오게.”
차에서 내리자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백수광 부부장이 아주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자네 덕분에 편안했지.”
손을 쥔 채 백수광 부부장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린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참, 지난번에 다친 건 괜찮나?”
“예.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구먼.”
그러자 백수광 부부장은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를 확인하곤 말했다.
“이런 너무 반갑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군.”
“다른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혁권의 물음에 백수광 부부장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바로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맞네.”
“······?”
“주석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네. 지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나하고 함께 들어가도록 하세.”
갑작스러운 말에 혁권이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