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79
779
“네. 그렇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정동식 이사와 달리 정현태 PD와 일행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작품에 대표님의 기대가 크십니다.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하하하.”
정현태 PD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대형 기획사에서 해외에 한류 콘서트 투어를 돌 때 전세기를 빌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 해외 로케이션을 떠나는데 전세기를 띄우다니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일본 오사카까지 그리 멀지 않다지만 아무리 작게 잡아도 억대는 돈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고도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하니 정현태 PD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달리 스태프와 출연자들은 전세기를 타고 간다는 이야기에 환호성을 터트리면서 크게 기뻐했다.
“우와! 들었어? 전세기를 탄대.”
“신생 제작사라고 하더니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스케일이 장난 아닌데.”
“그러게.”
오래 기다리는 것 없이 편하게 탑승 수속을 끝내고 전세기에 탑승한 스태프와 출연진은 단 한 명만 빼 놓고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로케이션 촬영을 떠났다.
한편 혁권도 서울을 떠나 중국에 도착해 있었다.
바다를 건너야 했지만 상하이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2시간 남짓 짧은 비행만 하고 목적지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공항에는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중국 지사 직원과 함께 정청 완다 시네마 본부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정청 본부장이 미리 손을 써 놓은 덕분에 간단히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따로 나 있는 VIP 통로를 이용해서 공항 청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대기시켜 둔 검은색 리무진을 타고 곧장 상하이 시내로 향했다.
넓은 리무진 뒷좌석에 탄 혁권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바로 하면서 입을 열었다.
“완다 그룹에서 예약해 둔 곳이 상해 그랜드하얏트호텔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거기 프레지던트룸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왕민린 회장의 초대를 받고 왔다지만 대접이 너무 거창하군.”
그랜드하얏트호텔은 상하이의 명물인 동방명주 타워가 있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5성짜리 최고급 호텔이었다.
88층이나 되는 초고층 빌딩에 자리를 잡고 있어 밤이면 휘황찬란한 상하이의 야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는데, 프레지던트룸이면 객실 요금이 적어도 하루에 7천 달러는 넘었다.
“그만큼 보스를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혁권은 영 개운치 못한 표정이었다.
“어떤 종류의 호의든 공짜로 주어지는 건 없는 법이지.”
“······.”
“왕민린 회장에 대해 특별한 정보가 나온 건 없지?”
“네. 지난번에 공안 조사를 받은 이후로 경영에 복귀는 했지만, 외부 노출을 최대한 자제한 채 조용히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큰 고초를 겪었으니 바짝 엎드려서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는 거겠지.”
실제로 왕민린 회장과 함께 공안에 붙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았던 기업인들 대부분이 거의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아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이러니 스스로 자숙하고 몸을 사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날 초대해서 만나려고 하다니, 이거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혁권은 다시 팔짱을 끼곤 차창 너머로 지나쳐 가는 시가지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다음 날.
혁권은 그랜드하얏트호텔에 위치한 중식당 VIP룸에서 비밀리에 왕민린 완다 그룹 회장을 만났다.
“귀한 손님을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소이다.”
“저야말로 명성이 자자한 왕 회장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염색을 했는지 왕민린 회장은 검은 머리에 얼굴이 붉고 주름살도 거의 보이지 않아 나이에 비해 젊게 느껴졌다.
VIP룸답게 실내 장식이 아주 화려했는데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금박이 천장에 쳐져 있고 한쪽에는 상당히 고풍스러운 대형 도자기도 보였다.
별 세 개를 받으며 미쉘린 가이드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 중식당은 완다 그룹 계열사 중 한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넓은 원탁 테이블에는 혁권과 왕민린 회장이 각자 통역을 한 명씩 대동하고 앉았다.
“지난번에는 정말 고마웠소. 김 대표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큰 고초를 겪고 있었을 거요.”
“전 그냥 중간에 다리를 놔 드렸을 뿐입니다. 왕 회장님이 풀려나실 수 있도록 힘을 쓴 건 백 부부장님이시지요.”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 김 대표이지 않소.”
“그리 말을 해 주시니 기분이 나쁘진 않군요.”
얼굴에 미소를 띤 왕민린 회장이 호의적인 태도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의 성장세가 아주 대단하던데 이번에 개봉 예정인 영화도 기대가 아주 큽니다.”
“회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안 그래도 양위 대표에게 이번 영화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라고 지시를 내려 놨소이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의 태도에 무언가 자신한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게 뭔지 좀처럼 짚이는 것이 없었기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혁권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왕민린 회장이 지그시 그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엔터테인먼트 말고도 여러 가지 사업을 한다고요?”
“예. 이것저것 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거창한 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미국 세일오일 광구를 2억 달러에 매입했다던데, 그런 규모면 절대 소소한 것이 아니지 않겠소.”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하하하. 김 대표는 야망이 큰 것 같소. 하긴 사업가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목표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젊음이 부럽소.”
“회장님도 아직 젊으십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왕민린 회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손에 쥔 재산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할 뿐이오.”
“······.”
굳이 묻지 않아도 왕민린 회장이 눈치를 보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방 안 가득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은 여종업원들이 요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는데 최고급 음식점답게 북경오리부터 시작해 샥스핀과 제비집 수프까지 값비싸고 귀한 요리들이 원탁을 가득 채웠다.
왕민린 회장이 앞에 놓인 요리들을 한쪽 손으로 가리키면서 다시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일단 배부터 채우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러시죠.”
그러자 한쪽에 있던 여종업원들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먹기 편하도록 원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가져다줬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궁금했지만 조급하게 굴어서 득 될 것이 전혀 없었기에 그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식사를 했다.
고기를 작게 잘라서 입에 넣자마자 농후한 육즙이 흘러넘쳤다.
거의 씹지 않아도 될 만큼 부드럽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덕분에 중식이라 해도 크게 느끼하거나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중식은 무조건 기름을 많이 써서 튀기고 볶을 줄만 알았는데, 그런 편견을 깨며 혁권은 크게 만족한 표정으로 음식을 즐겼다.
가벼운 잡담과 함께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원탁을 가득 메웠던 요리들이 거진 빈자리를 드러냈을 즈음, 왕민린 회장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요리는 입에 맞으셨소?”
“아주 훌륭했습니다.”
“맛이 있었다니 다행이군요.”
미소를 지은 왕민린 회장은 손짓을 해서 식사 시중을 들던 여종업원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혁권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니 바로 이야기를 하겠소. 김 대표, 나하고 사업 하나 함께합시다.”
“······?”
뜬금없이 동업이라니 그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업종은 뭐든지 상관이 없고 최대 60억 달러까지 투자를 할 수 있소.”
액수를 듣자마자 혁권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60억 달러면 한화로 6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거액의 돈을 제시하면서 동업을 하자니 순간 왕민린 회장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니면 고약한 농담이던가.
옆에 앉아 통역을 하던 주정화마저 동그랗게 토끼 눈을 하곤 석상처럼 굳어진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분위기를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혁권은 일단 평정심을 되찾고 왕민린 회장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당황했던 기색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냉철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상대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신중하게 입을 뗐다.
“순서가 잘못된 것 같군요.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이유를 말해 주시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왕민린 회장이 쓰게 웃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것 참, 급한 마음에 내가 실수를 했군.”
반주로 나온 고량주를 한 모금 마신 왕민린 회장이 그를 보며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진룡그룹 천 회장이 죽었는데, 혹시 알고 있소?”
“예. 관광을 하던 중에 안타깝게도 실족사를 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수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진 재벌 회장의 죽음치고는 너무 허무했기에 한동안 뉴스에서도 떠들썩하게 다뤄졌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교통사고라면 모를까 실족사라니.
분명히 주변에 경호원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벌어진 일인가 싶어 이런저런 추측 또한 난무했다.
그렇게 여러모로 화젯거리이긴 하나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었기에 혁권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왕민린 회장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속닥였다.
“실족사라······ 정말 그리 믿는 거요?”
“하지만 뉴스에서 그렇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정식으로 발표된 사인인데······.”
“흥, 언론이 언제부터 공신력 있는 집단이었다고.”
왕민린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혁권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사건에 다른 흑막이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오.”
머리를 끄덕인 왕민린 회장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 말을 이었다.
“애초에 중요한 주주총회를 불과 보름 앞두고 회사 오너가 한가롭게 먼 영국으로 휴가를 떠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일반적인 행동은 아닌 것 같군요.”
“회사를 경영할 생각이 없다면 모를까 그런 짓을 하는 오너는 한 명도 없을 거요. 특히나 전 분기에 큰 적자가 나는 바람에 주가가 크게 떨어진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지 않겠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천 회장은 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받고 영국으로 도망친 거요.”
“······!”
깜짝 놀란 혁권이 똑바로 왕민린 회장을 쳐다봤다.
“아니,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반문하는 순간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무언가 깨달은 듯한 태도에 왕민린 회장이 무겁게 말했다.
“말해 주지 않아도 눈치챈 모양이오.”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곳에서 압박을 넣었다는 겁니까?”
“맞소. 그리고 천 회장의 죽음도 그쪽에서 손을 쓴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