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78
778
#왕민린
다음 날 태일건설은 김성균 사장이 지시한 대로 500억 원을 한꺼번에 풀어서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과 동시에, 아르헨티나 화력발전소 공사 대금 문제와 용산드림타워 지분 매각에 관련된 공시를 내보냈다.
가뜩이나 주가가 수개월째 맥을 못 추고 있는 상황에서 400억 원이 넘는 공사 대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하게 된 건 큰 악재였다.
하지만 용산드림타워 지분 일부를 5억 달러에 매각해 그동안 불안 요소였던 자금난을 해소하고 자사주 매입으로 주가가 반등하자, 김성균 사장의 꼼수가 제대로 먹혀 안 좋은 소식이 바로 희석되어 버렸다.
이런 가운데 뒤늦게 공시 내용을 알게 된 김인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바닥에 던져 부숴 버렸다.
“제기랄!”
좀처럼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김인철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차민성 과장이 재빨리 라이터를 켜서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줬다.
뒤로 몸을 기댄 김인철은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용산드림타워 지분을 매각하다니,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군.”
“이런 강수를 둘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혁권의 압박을 받아 김성균 사장도 어쩔 수 없이 용산드림타워 지분을 매각한 거였지만, 결과적으로 자금줄을 하나씩 끊어서 태일건설의 목을 틀어쥐려던 김인철의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김성균 사장과 현 경영진이 퇴진할 수밖에 없도록 거의 고사枯死시키기 직전이었는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격이었다.
5억 달러가 넘는 거액이 태일건설에 흘러들어 가 자금난이 해소된 것도 짜증이 났지만, 그것보다 더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있었다.
“용산드림타워 지분을 인수한 곳이 오로라 펀드라고?”
“그렇습니다.”
“이런 대형 거래가 이루어졌다면 양쪽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이면 계약이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뭘 묻는 건지 바로 알아차린 차민성 과장은 슬쩍 김인철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오로라 펀드가 큰형과 손을 잡았다면 이번 임시주주총회는 해 보나 마나겠군.”
“미리 움직임을 파악하고 막았어야 됐는데, 죄송합니다.”
“하아······.”
김인철은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하얗게 피어오른 연기가 눈앞에서 흩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또다시 날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
“예.”
“만약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지는 말 안 해도 잘 알 거야.”
폐부를 찌르듯 날카로운 눈빛에 차민성 과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노조를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떻게 되고 있어?”
“위원장과 간부들을 접촉해 회유 중입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눈치를 채고 방해를 하고 있어서 설득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김인철이 미간을 찡그리며 차민성 과장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래서 어렵다는 거야?”
“아닙니다. 곧 노조를 우리 쪽으로 돌려놓겠습니다.”
“돈이든 여자든 얼마든지 안겨 줘도 좋으니까 어떻게든 녀석들을 회유해 놓도록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죽 소파에 파묻듯이 몸을 기댄 김인철은 여전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원래는 이번 임시주주총회에서 가볍게 압박만 가하고 조금씩 태일건설을 장악해 나가려고 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변수의 등장에 자칫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김인철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부회장이 되고 태일증권까지 손에 넣었지만 큰형인 김성균 사장이 핵심 계열사인 건설을 잡고 버티는 이상 그룹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호텔 내에 있는 휘트니스 클럽에서 가볍게 운동을 한 뒤 샤워를 하고 나오자 하킴이 다가와 말을 했다.
“보스, 정동식 이사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무슨 일로?”
“용건은 밝히지 않고 나오시는 대로 연락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인 혁권은 스마트폰을 건네받아 소파에 앉으면서 정동식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 회사에 뭔 일이라도 있나?”
대뜸 묻는 말에 정동식 이사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사 일이 아니고 다른 것 때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다른 일이라니?”
-양위 대표라고 기억하십니까?
잠깐 생각을 한 혁권은 이내 어렵지 않게 누군지 떠올렸다.
“완다 시네마 대표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갑자기 그 자는 왜?”
-그쪽에서 대표님께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뜬금없이 초대장이라니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완다 시네마가 소유한 상하이 시내 중심가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일부를 중국 최초로 4D 상영관으로 개조해 재개장하는 행사에 귀빈으로 참석해 달라는 건데, 그건 핑계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뭐지?”
혁권이 스마트폰을 귀에 바짝 붙이면서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정동식 이사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대답했다.
-왕민린 완다 그룹 회장이 대표님을 아무도 몰래 은밀하게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
뜻밖의 이야기에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민린 회장이 날 무엇 때문에 보자는 거지?”
-그것까지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라면서 꼭 대표님이 와 주셨으면 좋겠다고 아주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흐음.”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중국 재계의 거물인 왕민린 회장하고는 지난번에 부패 혐의로 공안 조사를 받는 걸 풀려나게 해 준 것 말고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기에 갑자기, 그것도 아무도 몰래 조용히 만나자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섣불리 대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일단 대표님께 여쭤 본 뒤에 말을 해 주기로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용건이 뭔지 짐작되는 건 없나?”
-이것저것 살펴봤지만 아직 딱히 짚이는 건 없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잠시 고심한 혁권은 이내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재개장 행사가 언제지?”
-나흘 뒤 저녁입니다. 저쪽에서는 그 전날에 오셔서 회동을 가지길 원하는 모양입니다.
“딱히 다른 일정이 없으니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그러자 정동식 이사가 반색을 했다.
-중국 사업에서 중요한 협력 파트너 중에 하나라 입장이 조금 곤란했었는데, 대표님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의 대형 극장 체인을 매입해 경영할 정도로 영화 산업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 그룹이었기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호텔을 비롯해 상하이에 계시는 동안 모든 편의는 저쪽에서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딱히 상관없지만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자세한 일정을 확인해서 다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스마트폰을 탁자에 내려놓은 혁권은 무슨 이유로 왕민린 회장이 자신을 만나려는 건지 깊이 고심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뭐, 직접 만나 보면 이유를 알 수 있겠지.”
왕민린 회장이 거물이라 하지만 자신 역시 아무 내세울 것 없는 피라미는 아니었다.
대화를 나눠 보고 만약 왕민린 회장이 마음에 안 드는 태도를 취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 온다면 바로 거절하면 됐다.
예전 같았으면 충분히 긴장될 만한 상황이었으나, 자신감을 가슴에 품은 혁권은 상대와의 만남을 담담히 기다렸다.
밴에서 내리자 인천 국제공항 청사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찰칵. 찰칵.
“소현 씨, 앞에서 포즈 잠깐만 취해 주세요!”
“여기요, 여기!”
아이돌 그룹처럼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될 정도로 많이 모여 있진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수가 되었다.
도형석 매니저는 이것도 인기가 올라간 증거라며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소현에게 협찬으로 받은 가방과 트렌치코트를 들려 주며 말했다.
“소현 씨, 알죠? 사진에 잘 나오게 예쁜 포즈!”
“그건 괜찮은데······ 안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시간에 딱 맞춰 왔지만 기자들 요구를 이리저리 들어주다 보면 늦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공항 패션으로 인터넷에 화제가 되면 그만큼 드라마도 홍보가 되는 건데,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걸요.”
그 말을 듣고 수긍한 소현은 금방 태도를 바꿔 모델다운 당당한 걸음걸이로 기자들 앞에 섰다.
크게 쌍꺼풀이 진 눈동자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볍게 포즈를 취하는데도 등허리가 곧고 자세가 발라서 눈에 확 띄었다.
그렇게 1~2분 정도 있다가 버버리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공항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마저도 마치 런웨이를 연상케 했다.
“역시 사진발이 잘 받는다니까.”
“일단 몸매가 되잖아.”
“조회수가 꽤 나오겠지?”
다른 건 몰라도 제작발표회나 공항에서 찍히는 소현의 사진은 클릭 수가 제법 높은 편이었다.
모델 출신이라 다른 연예인들에 비해 몸매나 스타일이 월등히 좋아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액정 화면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보곤 만족스러워하는 기자들을 뒤로하고 공항 청사 안으로 들어온 소현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드라마 스태프들을 눈으로 찾았다.
“아, 저기 있다.”
먼저 아는 얼굴을 발견한 매니저가 소현을 이끌고 의자가 늘어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PD님, 안녕하십니까!”
깍듯한 인사 소리에 정현태 PD가 뒤를 돌아보더니 반가워하는 얼굴로 맞이했다.
“아까부터 밖이 시끄럽다 했더니 소현 씨가 와서 그랬군.”
“오래 기다리셨어요?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야. 나야 기자들이 소란 피워 줄수록 좋지. 그 사람들이 기사를 써 주면 우리 드라마 화제성도 같이 올라가잖아.”
그러면서 정현태 PD는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소리를 했다.
“하는 김에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오르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지?”
“큰 사건 사고라도 터지면 모를까, 무리예요, 감독님.”
옆에서 듣고 있던 젊은 스태프가 야유하는 투로 말했다.
“우리 드라마는 아직 방영도 안 했잖아요. 소소하게 기사만 떠도 감지덕지해야죠.”
“그냥 희망사항이라고 했잖아.”
정현태 PD는 쳇, 장난스레 혀를 차고는 무안한지 끄트머리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이던 조연출을 불렀다.
“야, 막내야~! 우리 이제 어떡하냐? 일행도 거의 모였는데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
“제작사 쪽에서 안내해 줄 사람을 보내 준다고 했는데요.”
그러자 같은 회사 소속인 도형석 매니저에게 스태프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하지만 도형석 매니저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거, 도 매니저도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사람이잖아. 들은 거 없어?”
“저는 현장직이라서요. 소현 씨 스케줄 관리만 하지, 다른 건 잘 모르는데······.”
주변 사람들의 어이없는 눈빛을 받은 도형석 매니저가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정현태 PD 역시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소속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걸 내뱉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슬슬 회사에 전화해 봐야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때쯤 정동식 이사와 임희근 실장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 PD님!”
그러자 정현태 PD가 놀란 눈으로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아니, 정동식 이사님 아닙니까. 게다가 임 실장님까지 오셨네요.”
“하하, 여러분들을 배웅하려고 나왔죠.”
“이거 참.”
회사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실세인 정동식 이사가 직접 공항까지 나온 것에 정현태 PD는 당황해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럼 저희를 안내해 줄 사람이란 게······.”
“저랑 임 실장입니다.”
“아유, 이거 죄송해서 어쩝니까?”
그렇게 한두 번 인사치레가 오간 후 정동식 이사는 시간이 다 되었다며 일행을 출국 게이트 쪽으로 이끌었다.
임 실장이 부하 직원을 시켜 소현을 비롯한 출연진과 스테프들의 여권을 모두 걷어 한발 먼저 수속을 하러 갔으므로 다른 절차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국내외 여행객들로 항상 붐비는 인천 공항 내부를 가로지르며 발걸음을 옮기던 일행은 줄이 길게 늘어선 게이트를 자연스럽게 지나치는 것에 의아한 기색이었다.
쉰 명이 넘는 인원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걱정하던 정현태 PD마저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다 정동식 이사가 여깁니다, 하며 멈춰 선 곳은 공항 직원 이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 특별 게이트 앞이었다.
“설마 여기로 들어갑니까?”
“예. 전세기니까 통로도 따로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정동식 이사의 말에 허허, 하고 정현태 PD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대표님이 해외 로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주신 겁니다. 다른 승객은 없이 스태프와 출연진뿐이니까 편하게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전세기라고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