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783
783
기껏 자금줄을 묶어 놨는데 용산드림타워 지분 매각에 이어서 태일건설의 숨통을 틔워 줄 또 다른 변수가 등장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회장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고함에 차민성 과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들어온 정보라 아직 자세한 건 파악되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 화력발전소 건설 잔금과 미분양된 아파트들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젠장!”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외국계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다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가운데 아니나 다를까 불똥이 앞에 서 있던 차민성 과장한테 튀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전혀 양측이 접촉하는 조짐을 보이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인 차민성 과장을 보며 김인철이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멍청하기는 이래 가지고 내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어!”
“······.”
모욕적인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김인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묵묵히 짜증을 받아 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을 내고 나서야 화가 조금 가라앉는지 가슴을 들썩이면서 거친 손길로 목에 맨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용산드림타워 지분 매각 대금하고 이번에 새로 받은 대출까지 합치면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
“쌓여 있는 부채가 워낙 많아 완전 해소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겁니다.”
“기세를 살려서 단번에 몰아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일단 건설은 이대로 놔두고 그룹 내부 정리부터 마무리 짓는 수밖에.”
마음 같아서는 큰형인 김성균 사장을 더욱 압박해 태일건설에서 쫓아내 버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정덕진 사장을 사임시키고 태일증권을 손에 넣었으나 여전히 그룹 내에 반대 세력이 상당수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성년 후견인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였기에 경영권 다툼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김인철이 변한 것 중 하나가 무리수를 둬 가면서 계속 집착하지 않고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바로 차선책을 찾는다는 거였다.
같은 시각.
혁권은 장기 투숙 중인 호텔 객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오늘 일차로 절반인 1천억 원이 먼저 지급됐고 한 달 안에 나머지 대출금도 모두 나갈 예정입니다.
스마트폰 수화기를 타고 들리는 스텐저의 설명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수고했소.”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태일건설에서 내놓은 채권은 전부 오로라 펀드로 넘어온 거요?”
-아직 대출이 다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우리가 시티 은행에 예치한 자금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이번에 태일건설이 그동안 거래가 없던 시티 은행을 통해 거액의 대출을 받게 된 건 오로라 펀드,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혁권이 지시를 내려서 스텐저가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줬기 때문이었다.
오로라 펀드가 예치한 자금을 이용해 대출을 내주고 대신 담보로 잡은 채권 권리를 넘겨준 뒤 자신들은 중간에서 수수료와 이자만 챙기면 됐기에 시티 은행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직접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고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사용한 건 이미 회사 주식을 5% 넘게 보유하고 있고, 용산드림타워 지분까지 일부 가져간 오로라 펀드에게 너무 과도하게 의지하는 걸 태일건설이 경계하고 있어서였다.
“이러면 한동안은 자금 운영에 숨통이 트이겠군.”
-그럴 겁니다.
“그럼 태일건설 쪽 일은 스텐저 씨한테 맡겨 놓을 테니까 적당히 기회를 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주시오.”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품에서 찌그러진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면서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가 비스듬히 기대앉은 혁권은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았다가 하얀 숨을 뱉어내었다.
그러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정리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가면서 태일건설에 자금을 지원해 주는 건 김성균 사장이 김인철한테 잡아먹히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경영권 싸움을 해 주길 원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김성균 사장이 태일건설을 비롯한 계열사 일부를 들고 나오도록 유도해 최종적으로 태일그룹 자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혁권은 객실 창문 너머로 용산드림타워 공사 현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구약성서에서 추악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다가 신의 벌을 받은 인간들처럼 온갖 더러운 방법으로 이룩한 부로 지금껏 떵떵거리면서 살아온 김종원 회장 일가의 몰락이 머지않았어.”
그러고는 하얀 담배 연기를 폐 깊숙이 채워 넣었다.
끄트머리의 빨간 불꽃이 거의 다 타들어 갈 때쯤,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보스, 김 전무가 왔습니다.”
혁권이 고개를 돌리니 김덕현 전무가 서 있었다.
“왔나.”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일어선 혁권은 한쪽에 놓인 소파로 가며 김덕현 전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새 얼굴이 더 타서 까무잡잡해진 김덕현 전무의 모습에 그는 피식 웃으면서 입을 뗐다.
“그러다 피부가 다 상하겠어.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다니지그래.”
“하하, 종일 현장을 다니다 보니 땀 때문에 다 지워지는 걸 어쩝니까. 그렇다고 여자들처럼 몇 번씩 바르자니 영 귀찮아서······.”
“그래도 너무 까맣게 탔잖나.”
안전모로 가려져서 타지 않은 이마와 얼굴 아랫부분의 경계가 너무 선명해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본인도 그걸 알긴 하는지 답지 않게 앞머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참 어색해 보였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이쯤 하고······ 차는 뭘로 마시겠나?”
“저야 차든 커피든 아무거나 잘 마십니다.”
“그럼 커피로 하지.”
하킴이 손짓을 하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얼른 룸서비스를 시켰다.
“미국에 출장을 다녀온 건 어떻게 됐나?”
업무 이야기를 꺼내자 김덕현 전무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달까지 필요한 장비 주문을 끝내고 전문가들로 팀을 꾸려서 확보한 광구에 대한 정밀 지질 조사를 다시 실시할 예정입니다.”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있군. 국제 원유 가격 추세는 좀 어때?”
“상승 요인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가 여러 가지 제재에도 불구하고 원유 생산량을 꾸준히 늘려 가고 있어 배럴당 70달러 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계속 약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80달러는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상승세가 약하군.”
“미국은 호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날로 격해지는 무역 전쟁으로 인해서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의 경제 상황이 침체 기미를 보이면서 소비 심리가 둔해져 그만큼 원유 수요가 줄어든 요인이 큰 걸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당초 세운 계획을 수정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시선을 받은 김덕현 전무는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잠시 조정을 보이고는 있지만 100달러대까지 가파르게 상승할 거라는 것이 전문가들 대부분의 의견입니다. 오히려 퍼미언 분지에서 우리가 세일오일 생산을 재개할 때 국제 유가가 100달러 선에 도달한다면 이익 폭이 그만큼 늘어날 테니 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설사 기대한 것만큼 국제 유가가 오르지 않더라도 생산 비용을 대폭 낮춘 장비와 시추 방식을 이용해 세일 오일을 퍼올린다면 현재 가격으로도 충분히 경제성이 있으니, 너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하긴 지금 당장은 원유를 생산해서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예.”
때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하자 두 사람은 대화를 잠시 멈췄다.
호텔 제복을 입은 직원이 은색 트레이를 밀고 들어와 혁권과 김덕현 전무에게 살짝 인사를 하고는 테이블에 커피잔을 나란히 세팅했다.
짙은 원두 향이 번지자 김덕현 전무의 입가가 느슨히 풀어졌다.
직원이 제 할 일을 마치고 물러난 다음 혁권이 먼저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아무것도 타지 않은 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그와 달리 김덕현 전무는 의외로 단맛을 좋아하는지 크림과 설탕을 한 스푼씩 넣어 저어 마셨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혁권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말한 건 검토를 해 봤나?”
“네.”
“김 전무가 보기에 어떤 것 같나?”
김덕현 전무가 작게 헛기침을 하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많은 투자금이 소요되는 만큼 확실히 자원 개발 사업만큼 비자금을 만들기도 좋은 것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
지질학은 물론이고 최첨단 인공위성까지 동원해서 원하는 자원을 찾아내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땅을 파거나 시추를 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이 절반이 채 안 되는 것이 바로 자원 개발 사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고도 원유 한 방울 철광석 한 덩어리 깨내지 못하고 개발에 실패하거나, 처음 기대한 것만큼 수익성이 크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이걸 뒤집어서 생각하면 거액의 투자금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교묘히 뒤로 빼돌리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왕민린 회장이 그가 진행 중인 세일 오일 광구 개발 사업을 자금 세탁 창구로 활용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회사의 주력 사업이 될 곳이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지도 모른다는 점이 심히 우려됩니다.”
혁권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동의하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서 썩 내키지는 않아.”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비자금을 조성하는 목적이라면 현재 진행 중인 사업과 별도로 인접한 광구를 매입해 합작 법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광구를 매입하자고?”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이자 김덕현 전무가 적극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주에 걸쳐서 광대한 넓이를 자랑하는 퍼미언 분지에는 수만 개의 시추관이 뚫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많습니다. 그중에 적당한 광구를 하나 골라 매입하고 개발을 진행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 사업과 완전히 불리할 수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기초 탐사부터 기반 설비까지 모두 새로 갖춰야 되니 자금을 세탁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한쪽 손을 들어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해 본 혁권은 이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그런데 적당한 광구를 찾아서 매입까지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왕민린 회장에 대한 중국 공안의 태도가 언제 바뀔지 몰랐기에 가능한 한 빨리 일을 진행시켜야했다.
그러자 김덕현 전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침 적당한 매물이 하나 나와 있습니다.”
“그래?”
“우리 광구에서 5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황무지인데, 지질조사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표면에 원유를 함유한 모래인 오일 샌드Oil Sand가 고루 분포되어 있어 세일 오일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큰 지역입니다.”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건네자 내용을 천천히 살펴본 혁권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군.”
“이쪽이 나중에 손실 처리를 하고 법인을 청산하는 것도 쉬울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 이걸로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작성해서 가져오도록 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