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3
83
바닥 청소를 한 것 외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지 나갔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둥그런 탁자 위에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올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린 혁권은 대야에 담긴 깨끗한 물로 얼굴과 손에 묻어 있던 흙먼지를 씻어 냈다.
턱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털어 낸 다음 두툼한 수건으로 물기를 마저 닦아 내고 나니 그제야 살 것만 같았다.
“후아.”
소파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 목을 뒤로 젖힌 자세로 늘어져 있으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껌벅, 껌벅.
의식이 거의 아득해지려던 찰나, 덜컥 하며 고개가 한차례 옆으로 푹 꺾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런. 안 되지.”
기껏 찬물로 세수까지 했는데 겨우 이 정도로 잠들 뻔해서야.
아직 해야 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벌써 나자빠지다니 안 될 말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위성 전화기를 꺼냈다.
바깥에 나가 있을 때 유기백한테서 연락이 왔었는데 받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위성 전화기 덮개를 연 그는 기억하고 있는 번호로 버튼을 눌렀다.
뚜르륵. 뚜르륵.
연결 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유기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혁권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야.”
-야, 이 자식아! 왜 전화를 안 받아!
“사정이 있었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일은 너한테 있지!
“뭔 소리야?”
-뉴스 보니까. 지금 거기 난리가 났다며.
유기백이 소리치는 이유를 알아차린 혁권은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
-너 트리폴리에 있는 거 아냐?
“맞아.”
-그런데 반응이 그딴 식이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유기백과 달리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깡도 없이 여기서 어떻게 버티겠어.”
-허어, 너 내가 알던 그 혁권이 맞냐?
“왜 이상해?”
-그럼 그게 정상이냐!
그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트리폴리가 전쟁터로 변했다는데 걱정이 안 되냐?
“역시 너밖에 없구나.”
-됐고. 거기서 언제 빠져나올 거야?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위험하면 바로 탈출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여간 고집하고는.
한번 뜻을 정했으면 남이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혁권의 성격을 익히 알기에 유기백은 일찌감치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가진 건 몸뚱어리밖에 없는 놈이 배짱이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그건 배짱이 아니라 만용이라고 하는 거야!
길게 숨을 내뱉은 유기백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돈도 좋지만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거 알지?
“물론이야.”
-그럼 됐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느낀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김 이사는 어떻게 지내?”
-그다지 좋은 관계도 아니면서 뭘 그런 걸 물어?
유기백이 의아해하자 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뭐. 날 쫓아내고 두 다리 쭉 뻗고 지내나 싶어서 묻는 거지.”
-안 그래도 무슨 일인지 일주일 넘게 출근을 안 하다가 어제부터 다시 나왔는데, 미친 황소처럼 아무한데나 들이받아서 미치겠어.
“후후후. 그래.”
김인철이 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지 잘 알고 있던 혁권은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야? 너 김 이사하고 엮인 거라도 있어.
눈치가 빠른 유기백이 금방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캐물었지만 마카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회사도 그만뒀고 멀리 리비아에 있는 내가 그 인간하고 마주칠 일이 뭐가 있겠어?”
-이거 냄새가 나는데.
“괜한 사람 잡지 말고 지난번에 말한 타이어 오더는 잠시 보류를 해 줘.”
-이번 일 때문에 그러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모든 거래를 일단 중단시킬 생각이야.”
이미 오더를 집어넣은 걸 보류시키려면 이것저것 골치가 아팠지만 비상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유기백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수긍했다.
-차라리 그냥 취소를 하는 것이 어때?
“아니, 며칠 안에 결판이 날 테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중요한 정보였지만 그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해 줬다.
“정부군이 조만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 같아.”
-대통령이 포로가 됐다던데 그런 여력이 있단 말이야?
유기백의 물음에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보야.”
-응?
“잘못된 보도라고. 대통령궁이 공격을 받아 점령된 건 맞지만 샤라빌 대통령과 정부군 지휘부는 건재해.”
-그런데 왜 그런 보도가 나왔지?
“워낙 공격이 갑작스럽게 진행된 데다 초반에 정부군이 크게 밀려서 그런 걸 거야. 그리고 실제로 여러 중요 거점을 빼앗기기도 했고.”
-그렇군.
그의 짐작대로 외신기자들은 워낙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이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호텔 안에서 이러저런 소문을 별다른 확인 없이 그대로 속보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것처럼 잘못된 보도가 상당히 많았다.
“이르면 오늘 밤 안에 승부가 날 거야.”
-그러면 전투가 더 치열해질 텐데 괜찮겠어?
“내가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니 염려하지 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튼 조심해.
“알았어.”
불안한지 거듭 조심하라는 말을 하며 유기백이 전화를 끊었다.
위성 전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유기백이 서울에 있으니까 든든하네.”
여기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서울에 없었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팠을 터였다.
샤라빌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이 피신해 있는 트리폴리 국제공항으로 주전장이 옮겨 가면서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던 시가전은 그날 저녁 급히 이동해 온 아부카 여단 병력이 전투에 투입되자 다시 뜨겁게 불타올랐다.
다 합쳐 봐야 열 대가 채 안 되지만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아부카 여단이 공격을 개시하자 이슬람 형제단은 급격하게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주요 길목에 매복한 채 부비트랩과 자살 폭탄 공격 등 극단적인 방법을 쓰며 맞섰지만 비정규군으로 잘 훈련된 정예 병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물론 격렬한 저항에 피해가 상당했지만 아부카 여단은 진격을 멈추지 않으며 트리폴리 시내에 있는 주요 거점들을 하나씩 탈환해 나갔다.
그와 동시에 후세인 대령이 일부 병력과 구형 T-62전차 세대를 끌고 트리폴리 국제공항을 포위한 적을 공격했다.
이슬람 형제단도 RPG-7을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밤새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는 공항에 웅크리고 있던 정부군 병력이 아부카 여단의 공격에 호응해 반격에 나서면서 급격히 전세가 기울어졌다.
새벽녘이 되자 공세를 견디다 못한 이슬람 형제단은 시내에서 약탈한 차량을 타고 사막으로 달아났다.
-용맹한 정부군은 반군을 트리폴리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아침부터 반복해서 방송되는 아나운서의 격양된 목소리에 혁권은 손을 뻗어 라디오 전원 버튼을 껐다.
“벌써 몇 시간째 이것만 계속 나오는군. 바깥 상황은 어때?”
혁권이 묻자 함단이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제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총성이 들리고 약탈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금방 상황이 안정되지는 않겠지.”
“암시장 상인들의 피해가 크다며?”
“예.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상점과 창고 들이 대거 약탈당하고 일부는 방화까지 저질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탐나는 물건들이 많은 암시장이 폭도나 약탈자 들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장 경비들이 있었을 텐데도 당한 거야?”
“한두 명 이면 몰라도 떼로 몰려드는데 그걸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긴.”
단순히 숫자만 많다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겠지만, 여긴 단돈 몇십 달러에 AK 소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무기가 흔한 곳이었기에 약탈을 막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안전해야 될 중앙은행도 털리는 판국에 다른 곳들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따로 창고를 두지 않고 밀수한 물품을 거의 대부분 바로 암시장 상인들한테 넘겨 버렸기에 혁권은 이번 사태에서 한발 빗겨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며칠간 밀수를 중단하는 바람에 손해가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안이 완전히 확보될 때까지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해.”
“알겠습니다.”
소파에 등을 기댄 혁권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함단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흐릿하게 허공으로 번져 나가는 하얀 담배 연기에 시선을 잠시 고정시키고 있던 혁권이 물었다.
“부상자들 치료는 어떻게 되고 있어?”
“급히 의사 한 명을 수소문해서 저택으로 데려왔습니다. 의료품을 구하는 게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그것도 무사히 해결했고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무리는 얼마든지 차고 넘쳤다.
저택에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응급 시에만 쓸 수 있는 구급약 정도여서, 병원에서 쓰는 전문적인 약품들과 주사기 같은 것이 필요했기에 의사의 연줄을 통해 병동 직원에게 현찰을 조금 쥐여 주고 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중상자가 몇 명 있긴 하지만 다들 목숨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다행이군.”
혁권이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일이 이러니 다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은 보기 싫다.
게다가 그것이 제 휘하에 있는 부하라면 더더욱.
“그럼 자네도 가서 좀 쉬도록 해.”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됐어. 보기만 해도 엄청 피곤해 보인단 말이야. 그 면상을 들고 돌아다니면 오히려 민폐라고.”
“그렇습니까.”
말투는 거칠어도 결국 하는 말은 한숨 푹 자고 쉬고 오라는 것이었으니, 그 뜻을 모를 함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다른 부하들과 달리 이틀을 꼬박 잠 한숨 안 잤기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몸이 무거웠다.
“알겠습니다.”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 함단은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며 방을 나갔다.
혁권이 본거지로 사용하는 저택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식당이다.
원래는 열 명 정도가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해도 넉넉한 길쭉한 식탁과 의자,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이나 장식장 같은 것으로 호사스럽게 꾸며져 있었으나 지금은 싹 다 치우고 대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임시 치료소로 활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급히 가져다 놓은 침대에는 여섯 명의 부상자들이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으윽.”
어깨에 총상을 입은 사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시오.”
잠시 뒤 겸자Forceps로 벌어진 상처 부위를 헤집던 의사는 안에 박혀 있던 총알을 찾아 끄집어냈다.
딸캉.
쇳소리를 내며 피 묻은 총알이 그릇 안에 떨어지자 금방 봉합까지 끝낸 의사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는 입에 쓰고 있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렸다.
“후우. 덧나지 않도록 깨끗하게 소독한 다음에 붕대를 감아 주도록 해요.”
“네, 선생님.”
함께 온 간호사가 대답을 하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뒷마무리를 했다.
그러자 뒤에서 치료하는 걸 지켜보던 혁권이 의사한테 다가갔다.
“괜찮을 것 같소?”
고개를 돌린 의사는 외모가 다른 혁권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뒤에서 하킴이 눈을 부라리자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