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53
853
#뜻밖의 위기
먼저 잠에서 깬 혁권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깥 날씨를 살폈다.
이 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청량하고 새파란 하늘이었다.
혁권은 아직 자고 있는 소현이 깨지 않도록 창문에 커튼을 쳐 주고 시트 자락을 끌어 올려 준 후 조용히 침실에서 나왔다.
이른 아침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혁권은 가벼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을 한 바퀴 뛸 준비를 했다.
휴가이긴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 둔해지면 안 되었기에 나름대로의 방편이었다.
아무래도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타는 것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달리는 것이 더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는 혁권을 향해 백성균이 생수병과 수건을 내밀었다.
“보스, 서울에 있는 방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내면서 혁권이 말했다.
“일이 끝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전화를 걸어 봐.”
“예.”
다른 부하한테 수건을 건네준 혁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리조트 한쪽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작은 생수병을 따서 마시며 마른 목을 축이고 있을 때 백성균이 위성 전화기를 내밀었다.
“연결됐습니다.”
혁권은 위성 전화기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나야.”
-결과 보고를 드리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처리가 잘된 모양이군.”
-부산에 애들을 내려보내서 로터리파 놈들을 싹 다 쓸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깔끔하게 정리를 했겠지?”
-괜히 어설프게 조져 놓으면 뒤통수를 맞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가리인 오찬주는 드럼통에 공구리를 쳐서 먼 바다에 나가 던져 버렸고, 나머지 간부들도 발목 인대를 끊어서 이쪽 바닥에서 은퇴를 시켰습니다.
“잘했어.”
너무 심하게 손을 쓴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얼마 전에 어설프게 대처를 했다가 하마터면 소중한 이를 잃을 뻔했었기에 작은 티끌이라도 불안 요소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간부들을 박살 내 놨으니 다시 재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당장 주변에 있는 조직들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그냥 놔두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럴 테지.”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틈을 보이면 다른 포식자한테 잡아먹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부산에서 가장 노른자위 지역인 해운대를 쥐고 있었기에 더욱 군침을 흘리고 덤벼들 것이 뻔했다.
-그런데 힘은 저희가 쓰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아서 조금 속이 쓰리긴 합니다.
“과욕은 금물이야.”
살짝 로터리파의 구역에 욕심을 드러내던 방갑수는 혁권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아까웠지만 바로 관심을 접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작게 콧방귀를 뀐 혁권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울역 옆에 새로 지어진 비즈니스호텔 알지?”
-아. 예. 시설도 좋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꽤 장사가 잘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트클럽도 하나 있고요.
“거길 인수해 볼 생각이 있나?”
-······!
가볍게 툭 던지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방갑수는 이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서울 시내 한복판인데다가 20층짜리 최신식 건물이었기에 인수 가격이 못해도 수백억은 넘어갈 터였다.
사거리 파를 흡수하면서 조직 덩치를 키우고 꽤 많은 돈을 만지고 있는 방갑수였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시세에서 3할을 빼서 390억에 내놨어.”
-정말 싸게 나왔군요.
비즈니스호텔의 소유주는 야마구치 구미 계열의 부동산 전문 회사였는데, 새로 나카모토가 7대 오야붕이 되며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급히 처분을 하게 된 거였다.
시장에 매물로 내놓지 않고 혁권 개인한테 먼저 매입을 타진한 건 동업자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물론 단순한 호의만은 아니었다.
거의 100억에 가까운 돈을 싸게 해 주는 대신 매입액 가운데 3억 엔 즉, 30억 원을 나카모토 개인한테 은밀하게 넘겨주는 조건이었다.
오야붕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들어갈 돈이 많았기에 필요한 비자금을 마련하려는 거였다.
어찌 됐건 상당히 좋은 기회인 것 맞았지만, 이미 제주도에 최고급 리조트를 가지고 있던 혁권은 비즈니스호텔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기에, 이번 일을 잘 처리한 대가로 방갑수한테 이걸 넘기기로 했다.
“인수대금 절반은 내가 빌려주도록 하지.”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 주신다면 그 호텔을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좋아. 내일쯤 따로 사람을 보낼 테니까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감사합니다, 보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성균한테 위성 전화기를 돌려주고는 몸을 일으켜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중국 북경 중남해中南海.
시진핑 국가 주석과 정치국 중요 상무위원들을 비롯한 정부 요인뿐만 아니라 은퇴한 최고 지도자들이 거주하는 중남해에서도 상당히 호화롭게 꾸며진 저택 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인이 커다란 창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드문드문 나기 시작한 흰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그는 신경질적인 인상을 풍겼으며 실제로도 성격이 까다롭다는 평을 듣는 자였다.
중국 권력 서열 5위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맡고 있는 막강한 권력자인 장양은 몸을 뒤로 돌려 거실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으면서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코발트 선매도권이라고 했나?”
그러자 심복인 이영학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매년 1천 톤이 넘는 물량을 10년간 공급받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휴대폰 배터리와 전기차 생산에 필요한 희귀 광물을 원활하게 수급하는 것이 골칫거리였는데, 이게 어느 정도 해결책이 되겠군.”
얼굴이 굳어 있는 장양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영학이 대답했다.
“그 때문에 주석께서 이야기를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보고를 올린 사람이 백 부부장이라고?”
“예.”
장양이 한쪽 뺨을 실룩이면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왕명광 사천성 부성장 일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그놈이 거슬리는군.”
중국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삼대 파벌 가운데 하나인 상하이방[上海帮]에 속한 최고위 인물인 장양으로서는, 시진핑 주석의 심복으로 국가 감찰위 부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칼을 휘둘러 대는 백수광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중국의 권력을 쥐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상하이방과 시진핑 주석의 사이가 처음부터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중앙 정계보다는 외곽을 떠돌던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 주석을 밀어줘서 중국 지도자로 만들어 주는 등 서로 끈끈하게 밀착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줬다.
물론 단순한 호의라기보단 장쩌민 이후 시진핑 주석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대신 상하이방 인사들이 국가 요직을 차지하고 계속 권력을 쥐려는 시커먼 속내가 있었다.
아무튼 처음 몇 년간은 그럭저럭 양쪽이 공생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야심가인 시진핑 주석이 부패 척결을 핑계로 상하이방 인사들의 숙청에 나서자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제일 앞에 나서 숙청의 칼날의 휘두르는 칼잡이가 바로 백수광이었으니, 장양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청두군관구 사령관을 부패 혐의로 조사하고 있는 것도 그놈이라고 했지?”
“예. 정보에 의하면 곧 직위에서 해제되어 북경으로 소환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길.”
청두군관구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관할하는 7개 군관구 중에 하나로 티베트 자치구를 비롯해 쓰촨성과 충칭 직할시, 구이저우성, 윈난성까지 드넓은 지역에 있는 육군과 공군 그리고 준군사조직인 무장 경찰을 전부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100만 명에 육박하는 막강한 병력을 움직이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지만, 상하이방 출신 가운데 유일하게 군부에 남아 있던 군 고위 지휘관이 바로 양진산 청두군관구 사령관이었다.
양진산 사령관마저 잃는다면 가뜩이나 위축된 상하이방의 세력이 더욱 줄어들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장성 진급에서 중장을 단 장군들 대부분이 난징군관구 출신이라고 그랬지.”
“맞습니다.”
대답을 들은 장양이 이를 부드득 갈아 붙였다.
“주석이 자신과 인연이 깊은 난징군관구 장군들을 대거 승진시킨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양진산 사령관을 부패 혐의로 체포했다면 결론은 하나뿐이군. 자신한테 충성하는 장성들로 군 수뇌부를 채워서 군부 내에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거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이영학은 심각해진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며 장양의 말에 동의를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양진산 사령관이 낙마한다면 휘하에 있는 참모진들까지 대거 물갈이가 될 것이 분명하니, 사실상 청두 군관구가 주석한테 넘어간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시커먼 속내를 알면서도 그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되다니······.”
“부패 혐의에 대한 증거가 너무 확고해서 손을 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관사에서 금괴가 나왔다고 그랬지?”
“예. 50킬로그램이 넘는 금괴와 함께 거액의 외화 뭉치를 몰래 보관하고 있다가 모두 압수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양이 얼굴을 구기며 짧게 혀를 찼다.
“뇌물을 받았으면 잘 숨겨 놓기라도 할 것이지, 정말 멍청하군.”
“설마 관사를 뒤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청두 군관구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어쩌면 그런 자만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번 일이 양진산 사령관 개인의 몰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문제지.”
“······.”
버럭 음성을 높이며 화를 내자 이영학은 괜히 불똥이 튈까 봐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숨을 거칠게 내쉬며 끓어오르는 분을 애써 삭인 장양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양진산 사령관 다음은 나겠지?”
그러자 이영학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아무리 시 주석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상하이방의 수장인 상무위원님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그런다면 상하이방 전체와 일전을 벌일 각오를 해야 되니 말입니다.”
요직에 있던 인물들이 숙청되어 나가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지만, 20년 넘게 중국 전체를 쥐락펴락해 온 저력이 한 번에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물론 정계와 군부를 장악한 시진핑 주석의 힘이라면 상하이방을 완전히 축출해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진핑 주석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기에,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단번에 쳐 내지 않고 조금씩 힘을 빼고 있는 거였다.
“자네 말대로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숙청의 칼날이 나한테까지 오지 않겠나?”
“그건······.”
“나라도 당연히 그럴 거야.”
장기 집권을 노리는 시진핑 주석 입장에서 대업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상대 중에 하나일 테니, 시간이 문제일 뿐 치워 버리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어.”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장양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시 주석을 끌어내리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대신 한쪽 팔을 잘라 내서 우리가 아직 맹독을 품고 있는 맹수라는 걸 보여 줘야지.”
진한 피비린내를 느낀 이영학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백수광, 주제도 모르고 날뛰고 있는 그 건방진 칼잡이 놈을 때려잡아서 본보기를 보여 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