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70
870
“문제는 갈등을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건설과 정유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에 여파가 확산돼 피해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더 늘어날 거라는 겁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방사청장이 반박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30억 달러에 달하는 군장비 수출 계약을 포기해야 됩니다. 아울러서 다시 재기하기로 한 주바이르 유전 개발도 허공에 날아가게 되고 말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거요. 양쪽을 비교했을 때 사우디아라비 쪽이 손해가 더 크니 그러는 거 아니요!”
방사청장이 지지 않고 최무영 장관의 말을 받았다.
“외압을 받고 이미 계약까지 체결된 무기 판매를 취소한다면 무엇보다 신뢰도가 중요한 방산 수출을 앞으로 포기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극단적인 말 아니오.”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말싸움이 점차 회의실 전체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마다 한마디씩만 한다고 해도 입이 여러 개였으니, 작은 웅성거림이 이내 소란으로 바뀌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책임 있는 직책을 가진 이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싸움판을 만드는 모습에 대통령은 테이블을 탕 소리 나게 두드리고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외쳤다.
“그만!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생각해 내지는 못할망정 물어뜯기에 바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추태요!”
호통에 시끄럽던 장내는 바로 조용해졌다.
대통령은 혀를 차며 피곤한 듯 뒤로 몸을 기댔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이라크 정부가 T-50의 경전투기 버전인 FA-50과 천무 다연장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최신 무기 수십억 달러어치를 수의 계약 형태로 발주하면서 시작됐다.
IS와의 전쟁을 통해 괴멸되다시피 했던 이라크군이 상당 부분 재건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중동국가 중에 최강이었던 예전의 위상을 찾기에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이라크 정부는 막대한 오일 달러를 활용해 대규모 군비증강 계획을 실행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최신형 무기 도입을 원했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데다가 인권 문제 등이 대두되면서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대체국으로 떠오른 곳이 한국이었다.
이미 T-50 훈련기와 K-2자동소총 그리고 각종 탄약이 수입돼 사용되고 있었기에 신뢰도가 검증됐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웠다.
한국 정부로서는 전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던 대규모 수출 계약이었기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 같았다.
더군다나 미래 먹거리로 방산 수출을 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한국군용으로 생산 중이던 물량을 양보하는 조치까지 취하면서 적극 계약을 지원했다.
천무 다연장미사일과 발사 트럭 초도분이 인도될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으나, 갑자기 또 다른 중동의 강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엉뚱하게 틀어졌다.
이란에 이어서 새롭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득세하고 군사력까지 키우는 걸 떨떠름하게 여기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한국에 무기 수출 금지를 요구하고 나선 거였다.
한국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비롯해 한국과 진행 중인 모든 사업과 원유 수출까지 중단하겠다고 강한 압박을 가하면서 정부 관련 부서들이 발칵 뒤집혔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이라크 정부도 계약 파기 시에 엄청난 불이익을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다.
이제는 양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중간에 낀 한국 정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결 방법이 없겠나?”
시선을 받은 노규화 경제 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양국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다 보니 매듭을 풀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잠시 머뭇거린 부총리는 힐끗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대통령을 쳐다보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린다면 지금 상황에서 양쪽을 다 만족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답답한 마음에 대통령은 짜증을 내며 부총리를 쳐다봤다.
“최선이 어렵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외교, 경제적으로 피해가 막심할 텐데······.”
“최소한 이대로 어영부영하다가 두 나라 모두하고 척지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으음.”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갑론을박을 해 봐도 딱히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기에 대통령은 낮게 침음을 흘리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현실적으로 부총리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맞았지만 그걸로 감당해야 될 피해가 너무 컸기에 자꾸 주저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목표 성장치 달성에 실패하는 건 물론이고 마이너스까지 걱정해야 될지 몰랐다.
다른 때 같으면 고심이 되더라도 결단을 내렸겠지만 문제는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는 거였다.
만약 형편없는 경제 성장치를 기록할 경우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집권 후반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총선 패배는 바로 레임덕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대통령은 사방으로 도망갈 길이 다 막혀 버린 듯한 막막함을 앞에 두고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거야 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정말 난감하군.”
혼잣말과도 같은 중얼거림 앞에서 다른 이들 역시 모두 비슷한 심정인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검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채무영 산업통상부 장관이 조심스레 손을 들고 말했다.
“각하.”
“말해 보게.”
“마지막으로 특사를 파견해서 양국 정부를 설득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살짝 기대한 듯 앞으로 몸을 기울였던 대통령은 이내 김이 팍 새 버린 태도로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건 이미 한 번 시도했던 방법이지 않나.”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인물을 내세운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누굴 보내자는 건가?”
대통령의 물음에 최무영 산업통산부 장관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대답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김혁권이라는 자입니다.”
“······?”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리던 대통령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지난번에 난리를 쳐서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든 그자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중동 쪽에 인맥이 있는 건 알지만 그건 UAE에 한정된 것이지 않나?”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KOTRA를 통해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만수르 회장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국가의 중요 인물들하고도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던 대통령은 흥미가 생겼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라크나 사우디아라비아 쪽에 인맥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김혁권이 운영하는 회사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로부터 수억 달러에 달하는 조달 계약을 따냈는데, 거기에 빈 살만 왕세자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총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직접 계약을 지시한 걸 보면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통령에게 시선을 돌린 부총리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이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어차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먼저 문제를 삼는 바람에 일이 커진 것이니, 그쪽만 설득할 수 있다면 꼬인 매듭을 푸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오천구 비서실장을 비롯한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이 찬성 의견을 내놓자 대통령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중차대한 일을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인물한테 맡길 수 있냐며 반대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었겠지만, 워낙 상황이 안 좋아서 그런지 그런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큰 기대는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오 실장.”
“말씀하십시오, 각하.”
“자네가 직접 나서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부총리는 결과가 신통치 않았을 때를 대비해서 관련 부처 장관들과 피해를 최소화시킬 방법을 찾는 한편 다각도로 양국 정부와 접촉을 해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피로한 듯 몸을 뒤로 붙인 대통령은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저택을 나선 혁권은 방탄 처리가 된 롤스로이스 컬리넌 뒷좌석에 앉아 스텐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임시주주총회 날짜가 확정됐습니다.
최고급 가죽으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시트에 몸을 기댄 혁권은 굵은 눈발이 날리는 차창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언제요?”
-2주 뒤 토요일입니다. 주주명부 폐쇄는 이번 주 마지막 거래일이 끝나면 이루어질 겁니다.
주주명부가 폐쇄된 이후에는 아무리 많은 주식을 매입해 봤자 곧 열릴 임시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주가가 70% 이상 급등한 상태에서 남은 사흘 동안 양측이 자금을 최대한 쏟아부어 지분을 확보하려고 할 걸로 예상됩니다.
“이걸로 건설은 물론이고 태일그룹도 가용 자금이 거의 다 바닥나겠군.”
-대략 지금까지 양측이 주식을 매집하는 데 쓴 액수가 1조 원이 훌쩍 넘어갈 정도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동안 태일건설은 말할 것도 없고 태일그룹 역시 매출 부진과 최근 태일정유의 대규모 적자 때문에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거액의 돈을 끌어다 썼으니, 곳간 상황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분 확보는 얼마나 됐소?”
-우리가 넘겨준 거에 추가로 6%가량을 더 매집해서 김성균 사장이 12% 정도를 확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쥐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30%가 넘는군.”
-그렇습니다. 김 부회장 쪽이 27% 내외의 지분을 가진 걸로 파악되니까 이대로라면 임시주주총회에서 여유 있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사이 태일그룹 쪽에서 주식을 더 매집하거나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분이 있다고 해도 1~2%를 넘기 힘들었기에 이 정도면 사실상 승부가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혁권은 섣불리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상대도 이런 상황을 모르진 않을 테니 뭔가 대응책을 꺼내 들지 않겠소?”
-안 그래도 주거래 은행인 대국은행을 우호지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메가 은행인 대국 은행이 백기사로 나선다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었기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문제가 되는 거 아니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설사 대국은행이 김 부회장의 편을 든다고 해도 우리 쪽에서 준비해 둔 패를 빼들면 전부 다 허사가 되어 버릴 겁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혁권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 잊고 있었군.”
-일이 터지면 타격이 꽤 클 겁니다.
“언제쯤 패를 꺼낼 생각이요?”
-세팅은 다 끝내 뒀으니까 조만간 정신없이 몰아칠 계획입니다.
“이거,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