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71
871
SUV는 속력을 줄이더니 대로를 벗어나 좁은 샛길로 들어갔다.
멀리 흰 눈에 덮인 아름다운 북악산의 모습이 보이는 가운데 도로 양옆으로 담장을 높다랗게 둘러친 대사관저들이 늘어서 있었다.
집들이 전부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심어서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해 놨는데, 그중에서 붉은색 벽돌이 인상적인 저택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그러자 안에서 CCTV로 이쪽을 확인하고는 이내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철문이 한쪽으로 열렸다.
국정원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안전가옥 가운데 하나로 이번에 그도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혁권이 탄 SUV와 경호 차량이 부드럽게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곧바로 철컹하는 쇳소리를 내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철문이 굳게 닫혔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심인성의 측근으로 얼굴이 익은 최기혁이 넓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과장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하킴과 백성균만 대동한 채 성큼성큼 2층 양옥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고급스럽게 꾸며진 거실은 미리 난방을 틀어 놨는지 아주 따뜻했다.
“어서 오시오.”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는 심인성 과장과 악수를 나눈 혁권은 무심코 같이 있던 사내를 쳐다보고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사내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자주 봤던 오천구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한 심인성 과장은 자연스럽게 오천구 비서실장을 소개했다.
“김 사장도 잘 알 거요. 청와대에 계시는 오 비서실장님이시오.”
그러자 오천구 비서실장이 몸을 일으켜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오천구라고 하오.”
놀란 것도 잠시 금방 평정심을 회복한 혁권은 담담한 태도로 손을 맞잡았다.
“김혁권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사전에 아무런 귀띔을 해 주지 않은 것에 은근슬쩍 불쾌감을 나타내자 옆에 있던 심인성 과장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오천구 비서실장은 권력 실세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꿀리는 것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곤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보안을 요구하는 일이라 내가 비밀로 하라고 했으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오.”
먼저 사과를 해 왔으니 혁권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이쯤에서 유하게 넘기기로 했다.
약간의 신경전이 그렇게 마무리되자 심인성 과장은 일부러 크게 웃으면서 자리를 권했다.
“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죠.”
심인성 과장과 오천구 비서실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혁권이 마주 보는 형태로 소파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국정원 요원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고 가자 혁권이 앞에 있는 오천구 비서실장을 쳐다보면서 입을 떴다.
“보아하니 오 실장님이 제게 용건이 있으신 것 같은데, 뭔지 말씀해 보십시오.”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오천구 비서실장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는 상체를 반듯하게 세웠다.
“김 사장한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만나자고 했소.”
“······.”
“특사 신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해 최근 경색된 양국 관계를 풀어 줬으면 좋겠소.”
대번에 미간을 찡그린 채 혁권이 말을 받았다.
“그런 건 정부에서 해야 될 일일 텐데요.”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아쉽게도 성과가 없었소.”
“정부에서도 실패한 일을 제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떨떠름한 태도에 애가 닳은 오천구 비서실장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그를 설득했다.
“빈 살만 왕세자하고 특별한 친분이 있다고 들었소. 어려운 일인 건 알지만 국가를 위해서 힘을 좀 보태 주시오.”
여기까지 불러내더니 결국엔 알량한 애국심을 들먹이면서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에 짜증이 확 올라왔다.
혁권은 끊어 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굳은 말투로 오천구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애국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보시오, 김 사장.”
부르는 소리에 그는 불쾌한 듯 대꾸했다.
“그런 입 바른 말에 쉽게 넘어갈 줄 아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크게 착각하셨군요.”
그러면서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혁권을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심인성 과장이 황급히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들어 보나 마나 똑같은 대화만 반복될 것 같습니다만······.”
혁권은 일부러 책망하는 시선으로 심인성 과장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바로 거실을 나가려는데, 오천구 비서실장이 다급한 기색으로 다시 한번 그에게 외쳤다.
“이번 일을 맡아 준다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들어주겠소.”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혁권이 순간 발을 멈춰 세웠다.
“무엇이든지?”
“내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선 최대한······.”
혁권은 그제야 조금은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채 원래 있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를 떠보듯이 툭 말을 던졌다.
“증권선물위원회를 통해 특정한 시기에 내가 지목하는 기업이 주식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해 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
“아. 물론 아무런 문제도 없는 곳에다가 억지로 행정 조치를 해 달라는 건 아니고 심각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평소보다 신속하고 조금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달라는 겁니다.”
“말하는 기업이 어딘지 알 수 있겠소?”
“태일증권입니다.”
“흐음.”
재벌 그룹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상대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이어진 말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오천구 비서실장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혁권도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고 오천구 비서실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 자리에서 바로 떠올린 거였다.
증권선물위원회의 제재 수위가 높아진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김인철한테서 그룹 경영권을 빼앗아 올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걸 핑계로 귀찮은 일을 거절할 수 있으니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걸 보여 주듯 여유로운 혁권과 달리 오천구 비서실장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고민은 거듭했다.
그러다가 결정을 내렸는지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탁자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고개를 들었다.
“좋소.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크게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던 혁권은 상대의 대답에 내색은 안 했지만 살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청와대와 정부가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특사를 맡아 주는 거요?”
어쩐지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에 그는 찝찝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서 뭘 해야 되는지부터 이야기해 보십시오.”
“지금부터 하는 대화는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혁권이 머리를 끄덕이자 오천구 비서실장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 줬다.
한참 동안 이어진 이야기가 끝나자 거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고 혁권의 얼굴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화가 난 빈 살만 왕세자를 달래서 보복을 하지 않도록 해 달라 이거군요.”
표정이 구겨진 혁권은 말투도 잘라 던지듯 딱딱해졌다.
“그렇소.”
오천구 비서실장은 사뭇 진지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외교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거요.”
“끄으응.”
아니나 다를까, 골치 아픈 일을 떠맡게 된 혁권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말을 내뱉어 놨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그저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인상을 쓰고 있는다고 해서 일이 풀리는 건 아니었기에 금방 평정심을 되찾은 혁권은 오천구 비서실장을 보며 물었다.
“그냥 빈손으로 가서 빈 살만 왕세자를 설득하라는 건 아니겠지요.”
만약 그런 거라면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곧장 일어나서 나가 버릴 작정이었다.
“정부와 조율이 있어야 되겠지만 이번 사태를 봉합할 수 있다면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 어떠한 것을 해도 좋소.”
얼핏 보기에는 아주 큰 재량권을 주는 것 같았지만 정부와 협의를 해야 된다는 단서를 붙이자 혁권은 눈썹을 찡그렸다.
“결국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군요.”
“좀 더 성사 가능성을 높이려는 정부의 의지라고 생각해 주시오.”
궁색한 변명에 코웃음이 나왔지만 설득에 실패하더라도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굳힌 혁권은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출발은 언제 하면 되는 겁니까?”
“빠를수록 좋소.”
그러면서 오천구 비서실장이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혁권 앞에 내려놨다.
“임시지만 외교관 여권과 각하께서 직접 서명한 특사 임명장이오.”
이런 걸 미리 가져온 걸 보면 어지간히도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혁권은 봉투를 챙겨 넣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좋은 소식이 들리길 기다리고 있겠소.”
“아예 시작을 안 하면 모를까 일을 맡은 이상 허투루 처리할 생각은 없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그것보다 요구한 것이나 차질 없이 확실히 처리해 주십시오.”
“책임지고 증권선물위원회에 이야기를 해 두겠소.”
대답을 들은 혁권은 심인성 과장하고 시선을 한번 마주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오천구 비서실장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지시대로 하기는 했는데 괜히 일을 더 망쳐 놓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분명 좋은 결과를 가져올 테니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확신에 가득 찬 말에 오천구 비서실장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심인성 과장을 쳐다봤다.
“저자를 꽤 신뢰하는 것 같소.”
“글쎄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믿음을 주는 자입니다. 실제로 여러 차례 그런 모습을 보여 줬고 말입니다.”
오천구 비서실장은 방금 혁권이 나간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제발 이번에도 그래 줬으면 좋겠군.”
다음 날, 김포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혁권은 스텐저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오천구 비서실장한테 약속 받았던 내용을 말해 주자 스텐저가 눈에서 이채를 띠며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니까 증권선물위원회에서 처벌 수위를 높여 줄 거라 이 말씀이십니까?”
“부당하게 그룹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취득한 주식에 대해 의결권 제한과 함께 검찰 고발까지 이루어질 거요.”
“그 정도면 김 부회장 입장에서 타격이 아니라 거의 재앙 수준이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제출할 증거 자료를 꼼꼼하게 확인해 놓도록 하시오.”
“고문 변호사들과 함께 제가 직접 준비를 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자신 있게 대답한 스텐저는 그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출국하시면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그건 가 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임시주주총회 전에 못 오실 수도 있겠군요.”
“가급적 그 안에 끝내도록 애를 써 보겠지만 힘들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알아서 일을 마무리 지어 주시오.”
“말씀하신 대로 증권선물위원회에서 강한 처벌을 내린다면 이번 임시주주총회는 결과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는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될 거요.”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