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74
874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려고 할 때 노크를 하며 비서실 직원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차민성 과장의 물음에 직원이 한쪽에 앉아 있는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을 보면서 대답했다.
“증권에서 조 사장님께 비서실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나한테?”
의아한 듯 되묻는 그에게 직원이 말했다.
“사장님, 스마트폰이 꺼져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쪽으로 연락했다고 합니다.”
“아.”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이 무심코 제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다 까맣게 죽어 있는 액정을 보고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깜박하고 있었군.”
지난번 회의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와서 곤란했던 일이 있어, 이번에는 아예 꺼 뒀는데 회사에서 본사 비서실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급한 일인 모양인데 받아 봐.”
“예.”
일이 잘 풀려서인지 김인철이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말하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비서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협탁에 놓인 인터폰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사장님, 저 배원석 상무입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로 전화를 한 건가?”
책망 섞인 물음에 배원석 상무가 다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금융감독원과 검찰에서 회사에 압수수색을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그게 뭔 소리야!”
퍼뜩 눈을 치켜뜬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김인철이 함께 있다는 것도 잊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는데 모든 금융기관에 대한 감사와 감독을 실시하는 금융감독원은 금융 종사자들한테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방 안의 시선이 전부 한쪽으로 모였지만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전혀 인식을 못한 채 계속 통화를 이어 갔다.
-아무래도 펀드 자금을 태일정유 경영권 방어에 끌어다 쓴 일이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사실 처음부터 태일증권 내부에서 자칫 배임과 횡령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한 데다가 김인철이 직접 지시한 거였기에 그냥 무시하고 일을 밀어붙였었다.
별다른 문제없이 잘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거였다.
-전산실과 트레이딩 센터는 물론이고 사장실까지 들어가서 마구 뒤지고 있습니다.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이 손에 든 수화기를 고쳐 쥐면서 황급히 말했다.
“알았어. 곧바로 돌아갈 테니까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치우도록 해!”
-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간을 좁힌 김인철은 통화를 끝낸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을 보며 물었다.
“회사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시선을 받은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침통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금융감독원과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방 안이 크게 술렁였다.
“압수수색이라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봐!”
김인철이 언성을 높인 채 다그치듯 묻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이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펀드 자금으로 원래 포토폴리오에 없던 태일정유 주식을 대량 매집한 것이 문제가 된 모양입니다.”
“다른 그룹에서도 다 그렇게 하는 거잖아!”
대기업들이 금융 계열사에 예치된 고객 자금을 자신들의 쌈지 돈처럼 쓰거나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행동이 합법적이라는 건 절대 아니었는데, 감시와 감독을 해야 되는 금융 당국이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 줘서 일이 불거지지 않는 것이지, 이번처럼 문제로 삼으면 얼마든지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김인철의 심기를 덜 거슬리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한 종목을 단기간에 수천억이 넘는 거액을 써서 매입한 게 금융 당국의 신경을 건드려서 조사권을 발동한 것 같습니다.”
“압수수색까지 벌였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닙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주윤성 상무의 말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힐끗 김인철의 눈치를 보곤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정확한 건 회사에 돌아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검찰까지 함께 움직였다는 걸로 볼 때 쉽게 생각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더니 또 마가 끼는군.”
와락 얼굴을 구긴 김인철은 입술 끝을 비틀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을 향해 물었다.
“임시주주총회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겠지?”
경황 중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던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조사가 이루어지더라도 심사 기간이 있고 하니 아마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자신 없는 투로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김인철의 눈썹이 꿈틀 위로 치켜 솟았다.
“아마도?”
씹어 먹기라도 할 듯한 눈빛을 접한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 아닙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당연하지. 반드시 그리 되어야 해!”
싸늘한 음성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흰색 와이셔츠 단추를 잠근 혁권은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운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래서 지금 다 같이 있다고?”
-네.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 오늘은 하루 종일 놀기로 했어요.
밝은 목소리로 답하던 소현이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오빠랑 통화 중이라고 하니까 애들이 안부 전해 달라네요.
시끄러운 여러 소음들이 뒤섞인 가운데 ‘안녕하세요.’ 하고 다 같이 합창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고생처럼 깔깔 웃으면서 ‘어우, 야, 어떡해?’ 하는 자잘한 대화 소리까지 다 들리는 것으로 봐서 어디 길가 한가운데서 다 함께 뭉쳐 있는 모양이었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전화할게.”
-오빠도 좋은 하루 보내요.
혁권은 피식 웃음을 흘리곤 소매 단추까지 다 잠근 뒤 넥타이를 하나 골라 목에 맸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짓고 마지막으로 재킷을 걸치려는데 옆에 던져 둔 스마트폰이 부웅 하면서 울렸다.
방금 전에 전화했으니 설마 소현은 아닐 테고, 오전에 연락 올 곳이 있었나 생각하면서 스마트폰을 손에 든 혁권은 상대를 확인하곤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스마트폰을 타고 들리는 스텐저의 목소리에 그는 살짝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연락을 한 걸 보니 금감원 조사가 시작된 모양이군.”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오늘 금감원과 검찰 수사팀이 태일증권 본사에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호오. 검찰까지 함께 움직였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보통은 금감원 조사가 이루어진 다음에 경중을 따져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것이 순서인데,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례적인 움직임이었는데 오천구 청와대 비서실장이 제대로 약속을 지켜 준 걸 알 수 있었다.
“우리한테는 희소식이군.”
-이제 곧 언론을 통해서 압수수색 소식이 알려지면 파장이 더욱 커질 겁니다.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혁권은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김성균 사장과 태일건설에서 끼어들면 상황이 엉뚱하게 튈 수도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옆에서 잘 컨트롤해 주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 전화를 끊은 혁권은 재킷을 걸치고는 슬쩍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살핀 후 그대로 호텔 객실을 나섰다.
리야드 외곽에 위치한 왕세자궁은 노쇠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을 대신해서 모든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빈 살만 왕세자의 위세를 보여 주듯 넓고 아주 화려한 모습이었다.
실내 전체에 값비싼 대리석이 사용됐고 곳곳에 놓인 장식품은 물론이고 하물며 사소한 문손잡이 어느 한 가지 명품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였다.
린자위 비서실장의 안내에 따라 긴 복도를 걸어간 혁권은 위압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시죠.”
먼저 문을 열어 준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이고 안을 향해 손짓했다.
푹신한 양탄자를 밟으며 실내로 들어서자 2층 높이까지 뚫려 있는 높은 천정과 18세기쯤에 만들어졌을 둥근 곡도 두 자루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루는 황금이었고 검집에는 보석이 잔뜩 박혀 있어, 실제 이것이 사용되었을 때에는 왕족이나 귀족의 허리를 장식하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곤 뒤로 돌아서서 혁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시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딱히 무어라 말을 하지 않고 대신 소파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비단으로 만든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아랍 전통 복장을 한 시종이 금으로 만들어진 넓은 쟁반에 홍차를 가지고 들어와 탁자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짙은 홍차 향이 탁자 주변으로 향긋하게 퍼져 나갔다.
빈 살만 왕세자가 한쪽 팔을 뻗어 찻잔을 들자 혁권 또한 홍차를 입으로 가져가며 작게 한 모금 마셨다.
“차향이 아주 좋군요.”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오.”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한 빈 살만 왕세자는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했기에 따로 통역을 두지 않고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무늬가 새겨진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빈 살만 왕세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존슨, 당신이 한국 정부의 특사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의외였소.”
“그러셨습니까.”
“뭐 들어 보나 마나 뻔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성의가 있으니 어디 한국 정부에서 어떤 제안을 내밀었는지 한번 이야기를 해 보시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왔지만 시작부터 심드렁해하는 모습에 혁권은 설득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말도 꺼내지 않고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그는 차분히 준비한 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인접한 국가인 이라크가 급격하게 군사력을 키우는 걸 우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은 한국 정부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요구대로 무기 판매를 중단하면 되겠구먼.”
툭 치고 들어오는 말에 혁권은 쓰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미 계약이 되어 있는 데다가 외교적으로도 많이 곤란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저희한테는 이라크도 사우디아라비아만큼 중요한 우호국이니 말입니다.”
“결국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거군.”
빈 살만 왕세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우방국으로서 곤란한 사정을 한 번만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는 겁니다. 대신 추후에는 이라크에 대한 무기 판매가 없을 거라는 걸 약속하겠습니다.”
그러자 빈 살만 왕세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고작 날 설득하려고 가지고 온 카드가 그건가? 그래도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 기대를 했었는데, 이거 정말 실망이군.”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태도였으나 혁권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말씀드린 건 한국 정부가 제시한 것입니다.”
“호오.”
“이제부터는 제가 따로 준비한 것인데······ 분명 왕세자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그리 자신만만하니 흥미가 생기는군. 어디 말해 보시오.”
여전히 등을 기대고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빈 살만 왕세자가 혁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