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80
880
숨을 죽인 차민성 과장의 물음에 김인철은 싸늘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늙은이를 납치해서 강제로 지분 양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어.”
“지금은 얌전히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여전히 명동 사채 시장에서 알아주는 거물인데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럴 일이 없도록 만들면 되잖아.”
“······!”
김인철이 눈을 부릅뜬 차민성 과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정도 나이면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세상에 미련도 없겠지.”
“그럼······.”
다음 지시를 기다리듯 말끝을 흐리자 김인철이 마치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지분을 가로챈 다음엔 깊은 산속에 파묻어 버려.”
후환이 없도록 아예 목숨을 뺏어 버리라는 것이었다.
“분명 경찰이 나설 겁니다.”
흥, 하고 김인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채놀이를 하던 영감이니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꼽자면 끝도 없을걸. 만약 누군가 시체를 발견해도 그 많은 용의자 가운데에서 어떻게 우리를 지목하겠어.”
실종 처리되어 누구도 찾지 못한 채 흙속에서 썩어 버리면 제일 좋은 것이고, 운 나쁘게 일이 틀어져도 워낙 돈으로 엮인 이들이 많으니 그들에게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어 올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백형윤이 가진 태일산업 지분 역시 차명으로 돌려놓는다면 의심을 할지는 몰라도 이쪽이 범인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 터였다.
“이번에는 실수가 없게 확실히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차민성 과장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예정에 없이 찾아온 러셀 CIA 국장의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한국을 중간에 끼워서 퇴역시키기로 결정된 M270 MLRS용 확산탄 재고를 사우디아라비아에 넘기자 이거지.”
러셀 CIA국장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렇습니다. 직접 수출은 못 하지만 이걸로 그동안 소원해졌던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를 개선하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과 알카에다 반군 세력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쯤에서 이란의 콧대를 한번 눌러 줄 필요가 있기는 해.”
혼란스러운 중동 상황을 이용해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시키는 있는 이란은 미국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친미 이슬람 국가인 데다가 최대 산유국이었기에 이란하고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힘을 살짝 실어 줄 필요가 있었다.
대통령이 러셀 CIA국장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자 동석해 있던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란과 테러 세력의 세력 확장을 막아야 된다는 건 동의를 합니다만, 자칫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걸립니다.”
“그래서 직접 무기를 넘기지 않고 제3국을 거치는 것이 아닙니까.”
“사우디아라비아 군이 예멘에서 확산탄을 사용하면 바로 언론을 통해 사실이 알려질 텐데, 국회에서 그걸 그냥 보고만 있겠소?”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의 지적에 러셀 CIA국장은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확산탄 사용을 제한하고 있기는 하지만 따로 조약에 가입하거나 국회에서 금지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꼬투리를 잡는다고 해도 사우디아라비아하고 직접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동맹국에 전시 비축탄을 공여해 줬을 뿐이니 크게 시비를 걸지는 못할 겁니다.”
“러셀 국장의 말이 맞아. 일일이 국회의 눈치를 보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거야.”
“그렇습니다.”
이미 대통령의 마음이 승인을 하는 걸로 기울어진 것 같아 보이자 브랜스테드 국무장관도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 역할을 해 줄 한국 정부도 이번 일을 동의한 거요?”
“물론입니다. 적극 협조해 주겠다는 청와대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비록 수명이 그리 오래 남지는 않았다고 해도 공짜로 대량의 예비 탄약을 얻게 되는 일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전시 예비 탄약을 하루치 갖추는 데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갈 테니 크게 남는 장사일 거야.”
“맞습니다. 우리 역시 수명이 다한 후에 처리 비용을 아끼고 수억 달러 정도의 판매 대금까지 받을 수 있으니 서로가 다 이득이 되는 거래일 겁니다.”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면서 대통령이 물었다.
“이번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후티 반군을 박살 내고 지겹게 이어지고 있는 예멘 내전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결국 마지막에 깃발을 꽂는 건 지상군이기에 확답을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대통령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짧게 혀를 찼다.
“최신 무기에 전차까지 갖추고 머릿수도 훨씬 많으면서 고작 반군 하나 토벌하지 못하다니 정말 한심스럽군.”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화력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확산탄을 공급해 줄 필요성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두드리는 걸 멈춘 대통령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좋아. 최소한 예멘에서 소모전을 벌여 주면 그만큼 계속 이란의 힘을 깎아 먹을 수 있으니까 열심히 싸우도록 뒤를 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대통령은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에게 시선을 줬다.
“자네 생각은 어때?”
그러자 브랜스테드 국무장관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조금 껄끄러운 구석이 있지만 확실히 이란이 너무 설치고 다니는 건 사실이니 뜻대로 하십시오.”
“전시 예비 탄약을 공여하면 그만큼 또 채워 넣어야겠지?”
러셀 CIA국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른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줬다.
“펜실베이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에 위치한 군수공장들이 가동되면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두 지역 다 지난 대선 때 현 대통령한테 표를 몰아 준 곳으로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해야만 됐다.
표를 받는 데 일자리만큼 좋은 것도 없었기에 대규모 탄약 생산 물량을 몰아주는 건 향후 선거에서 상당한 호재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대통령은 입술을 비틀어 올려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것이 없지. 바로 일을 진행하도록 해.”
며칠 뒤, 태일정유 본사 대강당.
강당 입구에 임시주주총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길게 걸려 있는 가운데 관계자와 주주 들이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투표 결과에 따라 태일정유 경영진이 교체될 뿐만 아니라 그룹 오너 자리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형제간의 싸움에서 주도권이 어디로 기울어질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총회장은 긴장감이 흘렀다.
딱딱한 정장을 차려입은 태일그룹의 직원들이 접수대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며 신분을 확인하고 투표용지와 패찰을 받는 작업을 진행했다.
중요한 자리인 데다 오늘 총회장에는 대주주와 고위 임직원 들이 대거 참석하기에 진행을 맡은 남녀 직원들 역시 단단히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안쪽에 있는 자리가 약 3분의 1 정도 채워졌을 때쯤, 저 멀리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태일건설 김성균 사장이다.”
“마침내 등장이군.”
김성균 사장의 얼굴을 알아본 이들이 작게 속닥이며 위풍당당하게 로비로 들어서는 그에게 눈동자를 향했다.
술렁이는 사람들의 낌새를 일찌감치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균 사장은 무엇 하나 거리낄 게 없는 것처럼 가슴을 펴고 총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우로 김성균 사장을 따르는 측근들이 호위처럼 붙어 있었고, 이들이 마치 점령군처럼 구둣발 소리를 뚜벅거리며 걸어오자 로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바짝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킨 직원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주주 명부를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김성균이 거만하게 턱을 까닥거렸고, 옆에 있던 수행비서가 즉각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애초에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한 사람이 김성균이었으므로 당연하겠지만 그의 이름은 목록의 맨 첫 번째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확인하였습니다.”
이름 옆 빈칸에 참석 표시를 체크한 직원이 투표 용지와 패찰을 건넸다.
김성균 사장이 다른 데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곧장 찬 바람과 함께 옆을 스쳐 지나가자 그제야 직원의 입에서 안도한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고 김성균 사장은 그걸 즐기며 일부러 제일 앞쪽으로 가서 앉았다.
고개를 들자 단상 위에 있던 태일정유 경영진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자신이 직접 임시주주총회에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보통은 대리인을 보내고 결과만 보고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측근들도 그렇게 하길 권했었다.
하지만 지난번 태일산업 주주총회에서 동생인 김인철한테 뒤통수를 맞고 부회장 자리를 빼앗겼던 울분과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 내고, 당한 대로 되갚아 줄 통쾌한 순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즐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허둥거리는 태일정유 경영진과 자신을 주목하는 주주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김성균 사장은 옆에 나란히 앉은 구민재 재무이사를 보며 말했다.
“오로라 펀드 쪽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뒤쪽 자리에 와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자 왼편 입구 근처에 스텐저를 비롯한 오로라 펀드 관계자 세 명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눈에 확 띄는 외모 덕분에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김성균 사장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말을 이었다.
“국민연금에서는 참석을 했나.”
“과장급 직원이 나와 있기는 합니다만 어제 언론에 밝힌 대로 기권표를 던질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분위기를 잘 살피도록 해.”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잘 끌고 왔는데 갑자기 국민연금이 태도를 바꿔 김인철에게 지지표를 던진다면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였다.
참석한 주주들을 살펴보던 김성균 사장은 대국은행 관계자들을 발견하곤 아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대국은행까지 인철이 놈한테서 떼어 놨으면 일이 더 쉽게 풀렸을 텐데 조금 아쉽군.”
“그렇기는 합니다만 대국은행이 현 경영진의 편을 들더라도 대세에는 크게 지장이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대답하는 김성균 사장의 태도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단단히 결심하고 온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굳게 다문 입매와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는 눈동자에 예기가 흘렀다.
모든 걸 다 끌어모아서 승부수를 던진 만큼 실패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김성균 사장은 등을 뒤로 기대면서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5분 뒤면 시작입니다.”
“어서 빨리 투표가 끝났으면 좋겠군.”
결과가 나온 뒤에 태일정유 경영진과 김인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