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79
879
서류에 적혀 있는 건 미국제 M270 MLRS 발사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와 보유하고 있는 재고 탄을 정리한 목록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원한 GPS 유도폭탄과 현궁 대전차미사일은 청와대와 국방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어렵지 않게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M270 MLRS용 확산탄은 국내에 재고가 있었지만, 그건 한국군이 사용해야 되고 재생산이나 도입이 어려웠기에 비축분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M270 MLRS 발사 시스템과 확산탄을 도입한 국가부터 확인했다.
“생각보다 M270 MLRS을 도입한 곳이 상당히 많군.”
성능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가격이 비싸고 운용 유지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전면전을 벌일 때 필요한 무기였기에 운용하는 국가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한국은 물론이고 독일과 프랑스, 이집트까지 16개국이 훌쩍 넘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건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와 이집트가 상당한 수량의 발사대와 미사일을 보유한 거였다.
더군다나 이집트 군이 도입한 건 2003년에 생산이 중단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최신형이었다.
“그래도 미사일 재고를 제일 많이 보유한 곳은 생산국인 미국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혁권은 하킴의 말에 보고 있던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거의 1천여 대에 가까운 발사대를 보유한 미국은 M270 MLRS 최대 운용국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항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답게 비축해 놓은 미사일 재고 물량도 다른 곳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을 한 그는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위성 전화기를 줘 봐.”
“예.”
위성 전화기를 건네받은 혁권은 잠시 중계 위성에 신호가 연결되길 기다린 뒤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샌더슨이 전화를 받았다.
“나요.”
-요즘 나한테 자주 전화를 하는 것 같군.
“제안할 것이 하나 있어서 연락을 했소.”
-이거 왠지 불안해지는군.
지난번 일 때문에 그런지 살짝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쪽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요.”
-그건 우리가 판단하는 거고, 어디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는 보도록 하지.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댄 혁권은 말을 돌리는 것 없이 바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재고로 가지고 있는 M270 MLRS용 확산탄을 매입하고 싶소.”
-······!
잠깐 말이 없던 샌더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보고 무기 밀거래상 노릇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런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소.”
자칫 스타워즈 계획으로 유명한 레이건 대통령을 탄핵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란-콘트라 비밀공작에서 드러났듯이 CIA는 필요에 따라 특정 세력에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비밀리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작전을 벌이곤 했다.
가장 최근에는 한창 내전이 진행 중인 시리아 반군을 몰래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혁권도 관여를 했었다.
-이봐, 공식적으로 우린 불법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으니 말조심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예민한 부분인 만큼 더 자극을 해 봤자 득 될 것이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앞서 말했다시피 M270 MLRS용 확산탄 100발이 필요한데 넘겨 줄 수 있겠소?”
-확산탄이 국제적으로 거래 금지 품목이라는 건 알고 하는 이야기겠지?
“그런 조약이 있지만 미국은 가입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내 말이 틀렸소.”
-사실이야. 하지만 민간인 사상자가 나올 우려가 있다는 의회 결정에 따라서 더 이상 생산과 사용이 금지된 무기를 외부에 함부로 팔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실제로 전투에서 확산탄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미군은 대량 비축해 둔 미사일들의 퇴역 결정을 내리고 훈련용으로 소모시키고 있었다.
“그 많은 미사일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허공에 그냥 날려 버리는 건 세금 낭비 아니겠소.”
-아깝기는 해도 괜히 문젯거리를 만드는 것보단 낫겠지.
“만약에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거래를 하겠소.”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상대가 조금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혁권은 위성 전화기를 고쳐 쥐고는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보관 연한이 오래된 전시 예비 비축탄을 동맹국에 저렴한 가격에 공여하면서 그 안에 슬쩍 확산탄을 포함시킨다면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을 거요.”
-너무 뻔한 수작이잖아.
“어찌 됐건 잉여 물자를 처분한 것이니 절차상 아무런 잘못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다리를 거쳐 다른 국가로 넘어갈 테니 미국 정부가 책임질 건 하나도 없이 돈만 챙기면 되니 이것보다 좋은 거래가 어디에 있겠소.”
-흐음.
침음성과 함께 잠시 말이 없던 샌더슨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산탄을 구매하려는 곳이 도대체 어디야?
CIA의 정보력이라면 금방 알아낼 수 있는 데다가 어차피 거래를 하려면 구매처를 밝혀야 됐기에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 줬다.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지고 갈 예정이오.”
-······후티 반군을 토벌하는 데 쓰려는 모양이군.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는 CIA에서도 주목하는 일이었기에 눈치가 빠른 샌더슨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요한 해상 수송로에 인접한 예멘에서 이란과 알카에다 테러 세력을 축출하고, 최근 소원해진 사우디아라비아하고 관계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서 잉여 물자를 처분할 수도 있으니,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거래이지 않겠소?”
급격하게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이란의 기세를 꺾고 수에즈운하에서 아덴만을 통과하는 해상 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미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중간다리 역할을 할 국가는 어디지? 괜히 어설픈 나라를 앞에 내세웠다가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될 까봐 걱정하는 샌더슨에게 혁권이 말했다.
“한국이라면 괜찮은 상대이지 않겠소.”
-한국이라······.
“오랜 동맹인 데다가 M270 MLRS 운용국이니 전시 예비 비축탄을 대량으로 넘겨줘도 명분이 서고, 누가 트집을 잡기 어려울 거요.”
-꽤 머리를 굴렸군.
“안 될 일을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소.”
-하하,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하시지.
혁권은 살짝 비꼼이 들어가 있는 샌더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아니면 그냥 끊고.”
어차피 거절할 거면 길게 통화할 이유가 없다는 빛을 내비치자 샌더슨은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일단 윗선에 보고하도록 하지.
“이번 달 안에 물건을 사우디아라비아군에 넘겨야 되니까 가능한 한 빨리 대답을 줬으면 좋겠소.”
-쯧. 원하는 것도 많군.
“그럼 끊겠소.”
위성 전화기를 내려놓자 조용히 통화를 듣고 있던 하킴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CIA하고 거래를 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만한 물량의 확산탄을 비축해 놓고 한꺼번에 넘겨받을 수 있는 곳은 미국이 거의 유일하지 않겠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애초에 미국에서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아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스께 일을 맡긴 건데 순순히 내주려고 할지 의문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하킴과 달리 혁권은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봤다.
“그래서 이런 꼼수를 쓰는 거잖아. 국회와 언론의 눈치를 보느라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전략 요충지인 예멘을 장악하는 걸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미국 정부일 거야. 그리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무기를 넘기면서 생색도 내고 짭짤한 부수입도 챙길 수 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미국에 이득이 되는 일이긴 하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테네에 있는 자말과 함단한테 다른 루트를 통해서 확산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고 나자 이제야 아까 전에 먹었던 감기약 기운이 몸에 도는지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하킴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한쪽에 있는 스튜어디스를 손짓으로 불러 담요를 부탁했다.
기내는 적절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감기에 걸릴 기미가 있어서 몸이 으슬으슬할 터였다.
도톰한 담요를 무릎에 덮어 주자 굳게 다물렸던 혁권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킴은 짧은 시간이라도 편하게 깊은 잠을 잘 수 있길 바라며 머리 위에 달린 조명을 어둡게 줄여 줬다.
늦은 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빌라 거실 소파에 편한 복장을 한 김인철이 차민성 과장하고 마주 앉아 있었다.
손목을 돌리자 유리잔 안에 든 황금색 액체가 가볍게 찰랑거렸다.
말없이 손에 든 위스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김인철은 차민성 과장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임시주주총회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차민성 과장은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가 않습니다. 위임장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태일증권 문제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는 바람에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지속적으로 진행 상황을 보고받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얼굴이 찡그러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국내 시민단체와 행동주의 펀드까지 끼어들어 증권과 정유의 경영진 교체와 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있어 분위기가 더욱 안 좋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나 소나 다 덤벼드는군.”
만만한 사냥감으로 생각하고 사방에서 물고 늘어지는 상황에 김인철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다행히 대국은행이 약속대로 지지를 해 주기로 했지만, 태일증권에서 매집한 주식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 치명적입니다. 이대로라면 임시주주총회에서 투표함을 열어 봐야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민성 과장의 말에 김인철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사실 이것도 많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본 거였는데 임시주주총회가 가까워질수록 급격하게 분위기가 김성균 사장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부정적인 여론이 너무 커 오히려 국민연금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한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으니, 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유가 넘어가면 곧바로 태일산업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해서 그룹 경영권을 차지하려고 들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젠장!”
거칠게 욕설을 뱉은 김인철은 손에 쥔 위스키 잔을 큰 소리 나게 내려놓곤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이렇게 힘없이 빼앗길 수는 없어!”
차민성 과장 역시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었지만 문제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내심 깊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고개를 든 김인철이 눈동자를 번들거리면서 말했다.
“박형윤 그 영감탱이는 여전히 지분을 팔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있지?”
“예. 워낙 태도가 완고해서 아예 만나 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흥. 곱게 말을 듣지 않는다면 힘을 쓸 수밖에.”
등골에 찬 기운이 훑고 지나가는 듯한 섬뜩한 느낌에 차민성 과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