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78
878
#임시주주총회
불만에 찬 고객들의 대규모 펀드 환매 사태가 벌어지면서 태일증권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태일정유 임시주주총회를 며칠 남겨 두지 않고 그룹 경영권의 향방을 결정할 금융감독원의 제재 심사 결과가 발표됐다.
금융감독원, 금융계열사 자금을 쌈짓돈처럼 경영권 방어에 이용한 태일그룹에 철퇴!
오늘 오후 금융감독원은 고객이 맡긴 펀드 자금을 계약한 내용과 다르게 무단으로 사용한 태일증권에 대해 제재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태일증권은 최근 와병 중인 김종원 회장의 두 아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그룹 경영권 분쟁에 끼어들어 수천억 원에 이르는 펀드자금을 불법적으로 유용해 태일정유 주식을 매집하다가 금융감독원에 위법 행위가 적발됐다.
이는 수익은 안중에 없이 소중한 고객들의 돈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마음대로 사용한 중대한 범죄 행위로 그동안 암묵적으로 대기업들이 금융계열사의 돈을 쌈짓돈처럼 마구 써 온 패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이런 불법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금융감독원은 관련된 태일증권 임직원들을 배임과 횡령으로 검찰에 고발하는 한편 불법적으로 취득한 태일정유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고 태일증권의 영업을 6개월 동안 중단시키는 근래 보기 힘들었던 강력한 처벌을 내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무거운 침묵 속에 김인철이 핏발이 선 눈으로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구겨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어떻게든 의결권이 제한되는 것만은 막으라고 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분노에 가득 찬 시선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방으로 손을 써 봤지만 금감원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습적인 압수수색에 미처 치우지 못한 불리한 증거들이 다수 드러나는 바람에······.”
제대로 말끝을 맺지 못하는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의 모습에 김인철은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고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미리미리 정리를 했어야지.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내 앞에서 지껄이고 있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목을 움츠리고 소심한 태도로 말하는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을 보더니 더욱 화가 북받치는 듯 언성이 높아졌다.
“이제 와서 그딴 말을 한다고 일이 해결되나! 기껏 돈을 쏟아부어서 끌어모은 지분이 몽땅 다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단 말이야. 임시주주총회도 며칠 안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수습할 거야!”
“임시주주총회 전까지 최대한 위임장을 받고 우호 지분을 끌어모으면······.”
“그걸 지금 대책이라고 내놓는 거야!”
재차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려친 김인철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눈치를 보고 있는 주윤성 상무를 봤다.
“대국은행에서는 뭐라고 해?”
그러자 주윤성 상무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은행장을 만났는데 이번 일에 대해 큰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설마 자사주까지 가져가 놓고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겠지.”
한쪽 뺨을 실룩이며 김인철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일증권에서 매집한 지분에 이어서 자사주를 넘긴 대국은행까지 빠져나가 버리면 임시주주총회는 해 보나 마나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만 여론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길! 정유를 빼앗긴다면 충격이 그룹 전체로 번질 거야. 현금을 채운 사과 박스를 자동차 트렁크에 몇 개를 처박아서라도 대국은행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잡아 둬.”
날이 바짝 선 목소리에 주윤성 상무는 부담스러운 얼굴로 억지로 머리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김인철이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를 쳤다.
“그놈의 최선, 최선!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실제로 되게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수를 쓰든 은행장을 구워삶아서 확실히 우리 편으로 만들어 놔야 해.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열심히 고개를 숙이는 주윤성 상무의 대답에도 김인철의 구겨진 얼굴은 끝까지 펴질 줄을 몰랐다.
“쯧.”
마뜩지 않은 듯이 짧게 혀를 차자 그룹본사 전무인 김광범이 그때까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입을 열었다.
“임시주주총회도 대비를 해야 되겠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사로까지 확산되는 걸 막는 것도 시급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으나 만에 하나 부회장님한테로 불똥이 튄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될 겁니다.”
태일정유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또다시 불미스러운 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된다면 도덕성에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게 될 터였다.
재벌 회장치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실형을 받고 구속되지만 않는다면 그냥 망신을 좀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비슷한 행위로 기소가 된 상태였기에 자칫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었다.
김인철은 생각을 마치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을 바라보았다.
“조 사장.”
“예.”
갑자기 불린 이름에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자 김인철과 눈이 마주쳤다.
“검찰 수사가 나한테까지 닿으면 우리 그룹이 흔들려. 그건 알겠지?”
불현듯 덮쳐 오는 불길한 예감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적당히 자네 선에서 마무리 짓게. 그것만이 실수를 만회할 길이야.”
“부, 부회장님.”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매달리듯 말했으나 김인철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재판까지 가더라도 그룹 차원에서 최고의 변호인단을 꾸려서 뒤를 받쳐 줄 테니 실형은 선고되지 않을 거야. 그러고 난 뒤에 다시 태일증권 대표로 복귀하도록 해. 물론 그사이에 금전적인 건 물론이고 필요한 모든 걸 그룹에서 지원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음산할 정도로 싸늘한 눈빛에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움을 청하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들 시선을 피하며 괜히 불똥이 자신한테 튈까 봐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걸 보며 당혹감과 서운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 때 다그치듯 김인철이 말을 이었다.
“왜 대답이 없나?”
지시는 김인철이 내려놓고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쓰는 것이 너무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싫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돈과 명예를 모두 잃고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될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나중에 그룹으로 복귀라도 하려면 김인철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마,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사납게 쏘아보던 김인철은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그때서야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뒤로 기댔다.
“잘 생각했어. 일단 나빠진 여론부터 가라앉혀야 되니까 내일 바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대표직부터 사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힘들게 올라온 자리를 이렇게 허무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순식간에 속이 텅 비어 버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기계적으로 대답을 내뱉으니 김인철은 그걸로 됐다는 듯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폈다.
그러고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눈치만 보고 있던 배원석 태일증권 상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배 상무.”
“예.”
“당분간 자네가 증권을 맡도록 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배원석 상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뜩이나 이번 일로 회사가 뒤숭숭할 텐데 그 틈을 노리고 다른 놈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경영권을 꽉 움켜쥐고 있으란 말이야.”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이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의 불행이 곧 배원석 상무에게는 행운이 되었다.
속으로는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온 것이 기꺼웠으나 겉으로는 한껏 성실해 보이는 표정으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조병득 태일증권 사장은 창백해진 안색을 하고선 무릎 아래로 내린 주먹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꽉 움켜쥐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것도 밑에 데리고 있던 부하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김인철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탁자 양옆 소파에 앉아 있는 측근들을 둘러보며 말을 계속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건 개인 투자자들을 우리 쪽으로 회유해서 위임장을 받아 내는 것하고 우호 지분을 최대한 확보하는 거니까, 임시주주총회 전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분을 끌어모으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나가 봐.”
가볍게 한쪽 팔을 내젓자 측근들이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썰물 빠지듯이 밖으로 나갔다.
답답한 마음에 김인철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혼자 남아 있던 차민성 과장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줬다.
“정말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하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길게 빨아 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인상을 쓴 김인철은 이내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차민성 과장을 봤다.
“밑에 데리고 있는 애들 가운데 믿을 만한 놈을 몇 명 골라서 조병득한테 붙여 놔. 오차돈 그 개자식 때처럼 뒤통수를 맞기 싫으니까 확실히 단속을 해 두라고.”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차민성 과장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금감원이나 검찰에 가서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피곤해지니까, 이번에 조사를 받아야 되는 임원들한테 미리 위로금을 넉넉하게 챙겨 주고 한율 로펌에 연락해서 힘을 쓸 수 있는 전관前官들로 변호사도 붙여 줘.”
“옛.”
제대로 꼬리 자르기를 못한다면 자칫 화가 자신한테까지 미칠 수 있었기에 확실하게 손을 써 두려는 거였다.
그만 가 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이자 차민성 과장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끝낸 혁권은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고 있었다.
넓은 좌석에 머리를 옆으로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은 자세였으나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때 스튜어디스가 쟁반에 물을 받치고 다가와 말했다.
“말씀하신 약입니다.”
“고맙군.”
혁권은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꽉 잠긴 목소리로 짧게 대꾸한 후 알약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고 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한쪽 팔을 들어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면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 몸이 많이 불편하십니까.”
“그저 가벼운 감기일 뿐이야. 신경 쓰지 마.”
괜찮다고 했지만 맞은편에 앉은 하킴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우나에 가서 땀을 한번 쫙 빼고 나면 거뜬해질 거야.”
하킴이 뭐라고 말을 더 하려고 할 때 백성균이 한쪽 손에 서류를 한 장을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보스, 아테네에서 보내온 팩스입니다.”
“이리 줘.”
기다리고 있던 거였기에 혁권은 바로 서류를 건네받아서 내용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