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
9
그러자 약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두고 있던 자말이 차를 끌고 앞으로 왔다.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어디로 갈까요?”
“호텔.”
자말이 차를 출발시키자 시트에 몸을 기대 혁권은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트리폴리 시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압둘라흐만에게 받은 잔금은 45만 불이 아니라 50만 불이었다.
경비 명목으로 5만 불을 뺐는데 박철종 과장이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갔냐고 투덜거렸으나 사막에서 무장 강도와 싸운 이야기를 해 주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처음 견적을 낸 것보다 경비가 다소 늘어났지만 어차피 계열 제약회사에서 재고로 몇 년째 창고에 처박혀 있던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받아 처리한 거였기에 손해를 본 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경비로 들어간 건 이것저것 다 빼고도 2만 달러가 채 안 됐다.
그렇다고 남은 3만 달러를 혁권이 몰래 꿀꺽하려고 챙긴 건 아니었다.
이번 거래를 계기로 유명무실한 트리폴리 지사를 다시 활성화시킬 계획이었지만 기본적인 유지비 말고는 별도의 업무 추진비가 전혀 없었기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편법을 써서 일종의 활동비를 마련한 거였다.
본사에 있을 때 이동철 부장의 수족 노릇을 하며 비자금을 수시로 조성했기에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제 실탄이 마련됐으니 본격적으로 영업 활동을 시작하는 일만 남았다.
단물만 빼먹고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여기로 내친 놈들한테 보란 듯이 복수를 해 주겠다고 재차 다짐하며 혁권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명색이 국제공항이었지만 내전이 벌어지고 수시로 폭탄 테러가 일어날 정도로 치안이 불안정해지자 기착하는 항공편이 거의 끊어져 공항은 이삼일에 한번 여객기가 도착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주 한산했다.
그나마 여객기가 내려도 탑승객이 적었기에 혼잡한 일은 없었다.
“저거 아닙니까?”
청사 한쪽에서 서성이던 혁권은 자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현지인이 화물 카트에 제법 큰 상자 2개를 싣고 이리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맞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공항 직원의 말에 혁권은 상자 위에 붙어 있는 송장送狀을 살펴봤다.
수취인 란에 영어로 적혀 있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혁권은 지갑에서 1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공항 직원한테 줬다.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돈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친근하게 말했다.
“또 화물을 찾아야 될 일이 있으면 찾으십시오.”
운송비까지 다 지불한 화물을 뇌물까지 쥐여 주고 찾아야 되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정부 시스템 붕괴로 인해 관리가 전혀 안 되고 느려 터진 일 처리 때문에 화물이 공항에 도착하고도 언제 찾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자칫 분실이 될 수도 있었기에 뇌물을 주더라도 바로 찾아가는 것이 백번 이익이었다.
부우욱.
단단히 밀봉된 상자를 뜯자 각종 카탈로그와 함께 샘플 제품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유기백한테 보내 달라고 부탁했던 물건들이었다.
“좋았어.”
영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들이 도착하자 혁권은 금방이라도 주문을 마구 받아 낼 것처럼 의욕에 가득 찼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자고.”
“예.”
다시 상자를 닫은 혁권은 자말과 함께 화물 카트를 밀고 공항 주차장으로 갔다.
상자를 짐칸에 싣고 화물 카트까지 반납한 두 사람은 이내 공항 청사를 벗어났다.
며칠 전에 있었던 반정부 무장 세력의 박격포 공격 때문인지 시내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오가는 차량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어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혁권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자말.”
“말씀하십시오.”
“알다시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해 볼 생각인데 자네가 날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운전대를 잡은 채 힐끔 시선을 옆으로 돌려 그를 쳐다본 자말은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지금도 일을 봐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도 자말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하자 혁권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확실하게 뜻을 밝혔다.
“가끔 가다 나오는 거 말고 아직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임시직이겠지만 지사 직원으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거야. 월급은 한 달에 2천 달러씩 주지.”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리비아에서 2천 달러면 제법 괜찮은 일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승낙을 하지 않고 뭔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던 자말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왜? 돈이 적어? 그건 거래를 한 건 성사시킬 때마다 따로 보너스를 챙겨 주도록 하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야?”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도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면서 꽤 가까운 사이됐다고 생각했던 혁권은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바로 거절하자 상당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절 정식으로 고용해 주시겠다는 이야기는 고맙습니다만 그러면 보스가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혁권이 쳐다보자 자말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이야기를 했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전이 일어나기 전, 저는 군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게 어때서?”
혁권의 말에 자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반카다피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전 정부군, 그것도 장교였다는 건 결코 자랑할 만한 이력이 아니지요. 거기다 전 내전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벵가지에 있었습니다. 이런 과거가 밝혀진다면 보스가 사업을 하는 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으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십 년간 독재를 하던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예전 정부군 장교였다는 경력은 분명 여러 가지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것만이라면 어떻게 감수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벵가지 전투에 참가했다는 거였다.
리비아 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벵가지는 지중해에 연한 항구이자 주요 석유 생산지로 공업과 상업의 최대 거점이었다.
튀니지에서 촉발된 자스민 혁명과 함께 불어닥친 거센 자유화 열풍에 벵가지는 반카다피 세력의 중심지가 됐다.
초반에 정부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며 기세를 올린 반카다피 세력은 트리폴리를 향해 진격해 나가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유혈 진압을 선택한 카다피 정권의 군대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격을 가하면서 훈련과 장비가 빈약한 반군은 연전연패를 당하며 뒤로 밀려났고 최후의 보루가 된 벵가지는 처참한 전장으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공습과 포격에 시가지는 폐허가 됐고 도시로 진입한 정부군 병사들은 지휘부의 묵인하에 극악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의 개입에 극적으로 되살아난 반카다피 세력의 반격에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리비아 내전 기간 동안 가장 격렬하고 처참했던 시가전이 이어졌던 곳이었기에 그 후 벵가지 전투에 참여했던 카다피군 장병들은 엄청난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자말이 바로 그 벵가지 전투에 참여했고 그것도 장교로 있었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혁권은 그때서야 능력이 뛰어난 자말이 지금까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용병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혁권의 얼굴을 본 자말은 별로 실망하는 것도 없이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그냥 지금처럼 일을 하겠습니다.”
그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먼저 정리를 해 주는 모습에 혁권은 잠시 심각하게 고심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말을 봤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예?”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잖아.”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자말은 금방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직 리비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저 때문에 거래가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난 자말의 능력이라면 그런 걸 충분히 덮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 내전 중에 벵가지에서 수많은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지만 자네가 거기에 관여됐을 거라고는 보지 않아.”
“…….”
자신이 처한 상항을 드러냈음에도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믿는다고 하자 자말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사실 자말은 카다피군 장교로 부하들을 이끌고 벵가지 전투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여자와 어린아이 들이 있는 건물에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해 보직을 박탈당했었다.
그런 이유로 벵가지 시가전에서 행해진 전쟁 범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소신을 지킨 군인으로 칭찬을 들어야 마땅했지만 내전의 혼란 속에 그런 이야기는 모두 묻혀 버리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억울해도 카다피군 장교였다는 멍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이렇게 하루하루 목숨을 내거는 용병 일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온통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가슴이 혁권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모두 녹아내렸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가 꼭 필요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혁권이 말하자 잠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던 자말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부담이 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승낙에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시트에 편히 기대앉은 혁권의 얼굴을 앞에 달린 룸미러로 힐끔 쳐다본 자말은 이내 고개를 바로 했다.
오전 내내 뿌옇게 하늘을 뒤덮고 있던 모래 먼지가 어느새 많이 옅어져 하얀 구름 사이로 밝은 햇살이 내려쬐고 있었다.
그렇게 혁권은 자말을 정식으로 고용하며 조금씩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오를 날갯짓을 준비했다.
혁권은 준비한 카탈로그를 트리폴리에 있는 바이어들을 한 명씩 직접 찾아다니면서 건네주며 열심히 영업을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내전이 터지기 전에 태일물산과 연결되어 있던 바이어들은 트리폴리 지사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다른 곳으로 거래처를 이미 옮긴 상태였다.
그렇다고 신규 거래처를 뚫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곳 태반이 과도한 신용 거래를 요구하거나 이쪽을 등쳐먹으려고 했다.
초짜라면 모르겠지만 몇 년간 영업 부서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혁권의 눈에는 사기를 치려는 의도가 다 보였다.
설사 그가 무리를 해서 오더를 받더라도 본사에서 거래를 승인해 주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무런 담보도 없이 신용으로 물건을 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혁권이 오더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치 그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압둘라흐만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