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27
927
“지금 뭐라고 했어?”
책상 앞에 앉은 라파엘 전무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스태판 부장을 쏘아봤다.
“계획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파엘 전무가 손바닥으로 값비싼 마호가니 책상을 세게 내려치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확실히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뭐야?”
방 안에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에 스태판 부장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독극물을 복용시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존슨 그자가 불사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딴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일을 제대로 처리하란 말이야!”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숙이고 있는 스태판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본 라파엘 전무는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우리 쪽에서 손을 썼다는 걸 들키지는 않았겠지?”
“예. 증거를 남겨 두지 않았기에 단순히 심장마비가 온 걸로 알고 있을 겁니다.”
“확실해? 이랬다가 또 뒤통수를 맞는 거 아니야?”
다그치듯 묻자 스태판이 얼른 대답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놓고 실패를 한 거잖아.”
“그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치를 보자 라파엘 전무는 짜증스러운 태도로 한쪽 팔을 내저었다.
“됐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는 운 나쁘게 실패를 했지만 다시 한번 완벽한 기회를 노릴 생각입니다.”
그는 찡그린 얼굴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고는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 둬.”
“네?”
예상했던 것과 다른 지시에 스태판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든 말든 라파엘 전무는 몸을 뒤고 기대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을 텐데,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일을 망치지 말고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
말뜻을 알아차린 스태판은 지은 죄가 있었기에 아무런 이견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지시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존슨이 리야드로 향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간 거지?”
이번 프로젝트 입찰에서 가장 큰 변수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혁권의 움직임에 라파엘 전무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로랑 지사장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다바그 왕자를 만나려고 가는 것 같습니다.”
“다바그 왕자라고?”
처음 듣는 이름에 머리를 갸웃거리자 스태판이 눈치껏 바로 보충 설명을 해 줬다.
“빈 살만 왕세자에게 숙부뻘이 되는 인물이자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현재는 꽤 큰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입니다.”
라파엘 전무가 눈썹을 찌푸리고는 질책하듯 말했다.
“그런 인물을 왜 내가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거지?”
“왕실 서열도 높고 군에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이권 사업에 그다지 크게 관여를 하지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더 이런 일에 거리를 두고 있어서 영입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빈 살만 왕세자의 눈치를 보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걸로 보입니다. 부패 척결을 명목으로 수백 명이 넘는 유력 왕족들을 붙잡아 호텔에 가두고 치욕을 주며 재산까지 헌납하게 만들었으니, 괜히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몸을 사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라파엘 전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서 있는 스태판을 봤다.
“그런데 왜 존슨은 그런 인물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지?”
“왕자 신분으로 오랫동안 군에서 복무한 이력 덕분에 군부 쪽에 인맥이 있으니 그걸 노리는 걸로 보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꽤 중량감이 있는 인물인 건 틀림없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지?”
“다바그 왕자 본인이 이번 프로젝트에 끼어드는 걸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데다가 무엇보다 우리가 거액을 들여서 대리인으로 내세운 칼레드 왕자에 비하면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흐음.”
확신을 하는 스태판하고 달리 왠지 모르게 혁권이 직접 리야드까지 날아와서 다바그 왕자를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던 라파엘 전무는 이내 고개를 들고는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놈의 행동이 마음에 걸려. 리야드에서 행적을 놓치지 말고 낱낱이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스테판의 대답을 들은 라파엘 전무는 손을 흔들어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뜻을 전했다.
“나가 봐.”
인사를 하고 스테판이 나가자 혼자 남은 라파엘 전무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폐부 깊숙이 니코틴이 가득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생각에 잠긴 그의 옆얼굴은 여전히 찡그린 채였다
그날 오후.
리야드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 일행을 태운 비즈니스 제트기가 착륙하자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함단이 혁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광택이 흐르는 고급 슈트에 턱 선을 따라 수염까지 기른 함단은 마치 어느 회사의 CEO라고 여겨질 만큼 관록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혁권은 ‘호오.’ 하면서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몰라보겠는걸.”
“그렇게 이상합니까?”
“아니, 오히려 아주 근사해. 자네한테 그런 옷차림이 이리 잘 어울릴 줄 생각지도 못해서 깜짝 놀랐을 뿐이야.”
“입찰 때문에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러고 다니게 됐습니다.”
“보기 좋으니까 앞으로도 이러고 다니도록 해.”
솔직하게 칭찬하자 함단은 쑥스러운 듯 감사하다고 짤막하게 인사하곤 곧장 차로 일행을 안내했다.
차량 행렬이 공항을 떠나 리야드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혁권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함단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멀쩡해.”
“심장마비를 일으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마터면 자넬 만나지 못할 뻔했지.”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가 보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내뱉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랫동안 혁권을 보필했기에 함단은 금방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라도······.”
“자세한 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얘기해 주지.”
“알겠습니다.”
뭔가 감추는 듯한 느낌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함단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다바그 왕자는 내일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아직도 태도가 똑같은 건가?”
혁권의 물음에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함단이 대답했다.
“예. 여전히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군.”
“보스께서 나서시기 전에 제가 일을 해결해 놨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혁권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노력을 했는데 잘 안 된 거잖아.”
“그래도 면목이 없습니다.”
“뭐, 이제 됐어. 그래서 내가 오지 않았나.”
이 이야기는 이제 끝이라는 것처럼 혁권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다바그 왕자가 하고 있는 사업이 호텔 체인이랑 부동산 투자 계열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곳 리야드와 프랑스 파리 그리고 뉴욕에 대형 호텔을 소유하고 있고 세계적인 유명 호텔 체인인 힐튼 월드와이드 지분을 20%나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이슬람 성지인 메카Mecca에 순례자들을 위한 초대형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고서에서 봤어. 객실 수가 무려 1천 개가 넘는다며?”
“네. 규모도 크지만 객실이 전부 스위트룸 이상으로 이루어진 최고급 호텔입니다.”
“사업비가 상당하겠군.”
“계획대로라면 토지 매입비용을 빼고 약 8억 달러가량이 투자될 예정입니다.”
투자되는 사업비만 봐도 얼마나 큰 프로젝트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액수인데 자금 마련은 문제가 없는 거야?”
“왕실에서 사업비의 절반을 투자해 줘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4억 달러를 왕실에서 직접 투자해 줬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왕실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낸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액을 투자 받았다는 거야?”
“애초에 메카 호텔 프로젝트를 제안한 곳이 왕실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객들이 찾는 메카의 관광 인프라를 확충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직접 배다른 동생인 다바그 왕자에게 호텔 건설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해가 되는군.”
혁권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채를 띤 눈동자로 함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왕실이나 정부쪽 일에 아예 관여하지 않은 건 아니니 가능성이 없진 않겠군.”
“말씀대로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한 제안과 앞서 얘기했던 건 성격이 조금 달라서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지금부터 부딪혀 봐야지.”
일부지만 중요한 성지聖地에 관련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정도로 압둘아지즈 국왕이 신임하는 인물이라는 것에 혁권은 더욱 다바그 왕자를 끌어들이려는 욕심이 커졌다.
다음 날 힐튼 리야드 호텔.
최고층 펜트하우스 창가에 풍채가 좋은 중년인이 한쪽 손에 굵은 쿠바산 시가를 든 채 드넓게 펼쳐진 리야드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손목엔 금빛이 번쩍거리는 굵은 롤렉스 시계, 몸에 입은 옷은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였으며, 구두 또한 맞춤 수제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치장한 것 같은 중년인은 바로 이 호텔의 주인이기도 한 다바그 왕자였다.
하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다바그 왕자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속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나?”
그러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얼른 시간을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10분 전입니다.”
“그럼 이제 곧 도착하겠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다바그 왕자는 물소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소파에 한쪽 다리를 꼬며 앉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존슨이 꽤 젊은 나이라고 그랬지?”
“예. 아직 사십이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나이에 업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물인 데다가 빈 살만 왕세자뿐만 아니라 아랍에미리트의 만수르 회장과 자이드 국왕하고도 친분을 맺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군.”
“뒤에 CIA가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비서의 말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이루어 낸 일들을 보면 수완이 대단한 인물인 건 분명해.”
혁권을 아주 높게 보는 모습에 비서가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쪽 제안을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다바그 왕자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전혀 없어. 그럴 거라면 진즉에 손을 잡았겠지.”
“그럼 왜 오늘 약속을 잡으신 겁니까?”
다바그 왕자는 손끝으로 시가를 까딱이면서 입매를 끌어올렸다.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으려는 것도 있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다 보니 과연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의 눈동자엔 약간의 흥미가 떠올라 있었다.
이미 부를 차고 넘칠 만큼 가지고 있는 사내에겐 일순간의 호기심이야말로 삶의 즐거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시군요.”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그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때 안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한 비서가 다바그 왕자를 보며 말했다.
“존슨 일행이 방금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