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28
928
#잘못 건드렸어
다바그 왕자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여유로움이었다.
아무것도 서두를 게 없다는 듯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혁권이 느낀 것이었다.
금수저로 태어나 평생 써도 넘쳐흐를 풍족한 부가 가져다주는 여유로움은 딱히 티를 내지 않아도 몸짓이나 발걸음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다바그 왕자는 피우던 시가를 입에서 떼고 비어 있는 다른 손을 먼저 혁권에게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소이다. 그쪽 명성은 많이 들었소.”
상대는 호사가 특유의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혁권을 바라보면서 일단 앉자며 소파로 향했다.
응접실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은 다바그 왕자의 취향인지 묵직하면서도 화려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현대적이면서도 깔끔한 모던 인테리어와는 정반대되는 장식이었는데, 마치 중세 바로크풍과 중동 느낌이 혼합된 듯한 양식이었다.
약간 검붉은빛이 도는 테이블과 의자는 다리 아래 부분까지 세세하게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소파에 앉는 순간 벨벳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몸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듯했다.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은은한 향이 풍기는 차를 내려놓고 물러나자 혁권이 상대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오히려 만나서 이야기를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으니 잘됐소.”
처음부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슬쩍 선을 긋는 모습에 그는 내심 입맛을 다시며 설득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혁권은 지레 포기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가 오늘 왕자님을 왜 찾아왔는지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자 다바그 왕자가 하얀 시가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면서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받았다.
“회장이라고 불러 주시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안은 고맙지만 참여할 의사가 없소이다.”
“혹시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요.”
“그럼 왜 싫다고 하시는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하고 있는 사업만으로도 충분히 바쁜데 관련도 없는 일을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거절 의사를 밝히자 혁권이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만약 지금 하시는 사업과 연관이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다바그 왕자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단순히 대리인 역할만 하는 것이 싫으시다면 아예 함께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내가 하는 사업이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요?”
얼굴 가득 불쾌함이 드러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바그 왕자는 호텔 체인과 부동산 투자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기에 군수산업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바그 왕자의 시선이 냉랭한 빛을 띠었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 신형 전차 개발 프로젝트는 단순히 외국에서 최신형 전차를 직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조립 생산을 넘어 직접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서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모든 걸 자체 생산하는 것이 목표인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무려 150억 달러나 투자해서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였기에 사우디아라비아 내부에서도 크게 이슈가 됐고, 혁권의 제안을 받아 따라 알아보기도 해서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던 다바그 왕자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차 생산 설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최종 조립 라인은 물론이고 수많은 부품 제조 공장이 만들어져야 되겠지요.”
“······!”
사업 감각이 뛰어난 다바그 왕자는 금방 혁권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고는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그걸 본 혁권은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고 준비해 온 제안을 직접적으로 꺼냈다.
“공장 건설에 들어가는 자금만 적어도 30억 달러는 될 겁니다. 이걸 회장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부품 생산 업체와 합작 법인을 설립할 수 있는 우선권도 드리겠습니다.”
“흐음.”
흥미를 느낀 다바그 왕자는 한쪽 손에 굵은 시가를 든 채 팔짱을 끼고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정부에서 군수 산업을 집중 육성할 계획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만한 사업 기회도 없을 겁니다.”
왕실과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고 외국 업체의 기술 지원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며 꾸준히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커미션만 받는 것보다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혁권은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상대를 설득했다.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 여러 가지로 자중을 하고 계신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업은 거액을 투자해서 메카에 새로운 호텔을 짓는 것처럼,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국가를 위한 일이니 그런 부담을 가지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껄끄러워하는 부분까지 덜어 주자 다바그 왕자는 잠시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다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날 원하는 이유가 뭐요?”
“간단합니다. 이번 입찰을 따내기 위해서지요.”
이에 다바그 왕자가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가 참여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회장님은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전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신다고 봅니다만······.”
어설픈 겸양 따위는 집어치우라는 듯 혁권이 쳐다보자 이내 다바그 왕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날 그렇게 높게 봐준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먼.”
“저도 사업가입니다. 그만한 역량이 없다면 애초에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이런 베팅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다바그 왕자하고 시선을 마주한 채 또박또박 이야기를 했다.
“여기까지가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어떻게 하실지 선택을 하십시오.”
“이것 참 어려운 문제군.”
“회장님도 기업을 하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건 제쳐 두고 가장 사업에 도움이 되는 걸 택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자칫 상대가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 혁권을 바라보면서 다바그 왕자는 역시 오만한 빈 살만 왕세자가 믿고 어려운 일들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자는 앞으로 더 큰 거물이 될지도 모르겠군.’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바그 왕자는 결정을 내렸다.
“확실히 외면하기 어려운 비즈니스인 것 같구려.”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소.”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혁권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현명하시군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바그 왕자는 자리에 앉은 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기왕 함께 일하게 됐으니 앞으로 잘 지내 봅시다.”
평소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그의 성격치고는 꽤나 호감을 보이는 태도임에 분명했다.
혁권은 기꺼이 다바그 왕자의 손을 맞잡고 악수하고는 향후 할 일에 대해서 깊이 논의를 했다.
이렇게 다바그 왕자를 대리인으로 영입하면서 혁권이 참여한 코리아 컨소시엄은 입찰에 나설 준비를 착착 갖춰 나갔다.
다음 날.
늦게까지 다바그 왕자와 이야기를 나눴던 혁권은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서도 눅진하게 달라붙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설탕과 우유를 하나도 넣지 않은 진한 에스프레소였다.
원두 향을 맡으며 무언가 흥미로운 기사가 없는지 탁자에 놓여 있던 영자신문을 뒤적거리는데, 하킴이 옆으로 다가왔다.
“보스.”
혁권은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평소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하킴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지시하셨던 조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자네 얼굴을 보니 뭔가 나온 것이 있는 모양이군.”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자 그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이벨라입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누군지 얼굴을 떠올린 혁권은 미간을 찡그렸다.
“전용기 승무원인 그 이벨라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하킴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은행과 카드사에 25만 달러가 넘는 빚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주일 전에 전부 상환을 했다고 합니다.”
깍지를 낀 혁권은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한화로 3억 가까이 되는 돈을 갑자기 갚았다 이거지? 확실히 의심스럽기는 하군.”
“그것도 전부 현금으로 입금을 시켰다더군요.”
“다른 곳에서 돈이 생긴 건 아니고?”
“혹시 몰라 조사를 해 봤지만 그만한 현금이 나올 데가 없었습니다.”
“그럼 그게 내 목숨값이라는 건가?”
하킴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겨우 25만 달러라니 너무 적은데, 아님 따로 더 받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
“배후가 누군지도 알아냈나?”
“거기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짐작되는 곳도 없고.”
시선을 받은 하킴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나 의심되는 자들 있기는 합니다.”
“그게 누구야?”
“지아트사입니다.”
그 말을 들은 혁권이 순간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지?”
“계속 보스를 주시하고 있다는 함단의 경고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난번 호텔에서 라파엘 전무라는 자가 했던 말이 걸립니다.”
마지막에 객실을 나갈 때 라파엘 전무가 보였던 적대감 가득한 시선을 떠올린 혁권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동기는 충분한 것 같은데 지아트사에서 날 노렸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잖아.”
“지금부터 뒤를 캐 보면 분명 나오는 것이 있을 겁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만큼 괜히 헛다리를 짚으면 곤란하니까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하킴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벨라는 조용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혁권이 잠깐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당분간은 그대로 내버려 둬.”
뜻밖의 지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스의 목숨을 노린 여자인데 그냥 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더 곁에 두고 감시를 하려는 거야. 원래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도 있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위험합니다.”
하킴이 우려를 표시했지만 그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한번 실패를 했으니 당분간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야. 그리고 이벨라를 감시하다 보면 배후가 꼬리를 드러낼 수도 있지 않겠어.”
“그렇지만······.”
“옆에서 지켜보다가 허튼짓을 하려고 들며 자네가 바로 잡아내면 되잖아.”
경호를 하는 입장에서 위험요소를 곁에 두는 것이 껄끄러웠으나, 혁권의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 보스께서도 항상 조심을 하셔야 됩니다.”
“나도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염려하지 마.”
그는 얼굴에 냉랭한 빛을 띠며 말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못 잡았지만 어찌 됐건 지아트사 놈들이 계속 거슬리는 건 사실이니까, 이쯤에서 가볍게 잽을 한번 날려 줘야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