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29
929
흰색 폴로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라파엘 전무는 지아트사 CEO인 클리시 회장과 함께 필드에 나와 골프를 치고 있었다.
짧게 자른 금발에 매부리코를 가져 다소 고집스러운 인상의 클리시 회장은 그린 위에 서서 자세를 잡고는 한참을 집중하다가 가볍게 퍼터를 휘둘렀다.
탁.
잔디를 데구루루 굴러간 하얀색 골프공이 홀 안으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가자 옆에서 지켜보던 라파엘 전무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나이스 샷.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으신 것 같습니다.”
평소보다 스코어가 잘 나온 클리시 회장은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홀에서 골프공을 끄집어냈다.
“그러게 오늘따라 공이 잘 맞는구먼.”
“벌써 네 타나 차이가 나니 아무래도 이번 게임은 졌습니다.”
“아직 여섯 홀이나 남았는데 뭔 엄살인가.”
“치시는 걸 보니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승부는 모르는 거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으면서 클리시 회장이 말했다.
“마침 바로 옆이 클럽하우스니까 잠깐 쉬면서 목을 축인 다음에 다시 공을 치도록 하세.”
“그러시죠.”
평일 오후인 데다가 일반인들은 못 들어오는 회원제 골프장이라서 그런지 클럽하우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이 한산했다.
창가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자 얼마 안 있어서 종업원이 주문한 맥주와 마른안주를 가지고 왔다.
차가운 물방울이 맺혀 있는 맥주 컵을 들어 단숨에 반을 비워 버린 클리시 회장은 후우, 하면서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역시 운동한 뒤에 마시는 맥주 맛은 일품이로군.”
“회장님께선 원래 와인을 더 좋아하시는 편 아니었던가요?”
“그렇긴 하네만 아무래도 와인은 벌컥 마셔 대긴 좀 그렇지 않나. 가볍게 즐기는 걸로는 맥주도 꽤 괜찮더군.”
클리시 회장은 손으로 아몬드를 집어먹으면서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어떤 술을 자주 마시나. 위스키, 아니면 브랜디?”
“개인적으로는 진 토닉이 깔끔해서 좋더군요.”
“흠, 칵테일이라. 의외군.”
코웃음과 함께 칭찬인지 타박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클리시 회장은 끝없는 지평선처럼 멀리까지 펼쳐진 초록 풀밭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앞에 앉아 있는 라파엘 전무에게 시선을 주면서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국방성에서 전시 예비 물자로 비축 중인 르끌레르 전차 80대를 중고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예.”
“개량 사업을 준비 중이던 우리한테는 상당한 악재일세.”
최초 프랑스 정부는 개발을 끝낸 르끌레르 전차를 1,400대 가량 양산하려고 계획했지만, 냉전 종식과 경제 문제로 수량이 대폭 축소되어 600대만 만들고 생산 라인을 종료시켜 버렸다.
그나마도 250대 정도만 운용하고 나머지는 전시 비축 물자로 분류되어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행히 아랍에미리트에 500대의 르끌레르 전차를 수출하면서 파산은 면했으나, 핵심인 엔진과 미션을 발주국의 요구로 독일 MTU의 유로파워팩으로 바꾸는 바람에 그리 큰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차 생산 설비를 유지하기 위해 지아트사가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여 성사시킨 것이 바로 르끌레르 전차 개량 사업이었다.
새로운 전술 인터페이스와 증강 장갑, RWS 그리고 각종 센서를 교체해 전차 성능을 향상시키는 거였는데, 사업이 진행되면 최소한 몇 년 동안은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어차피 비축 물량은 개량 사업에서 제외되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지만, 르끌레르 전차를 수출하려는 지아트사 입장에서는 악재였다.
“타격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개량 대상에서 빠져 있던 물량이니 사업을 진행하는 데 큰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애써 위로를 했지만 클리시 회장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네.”
“……?”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엘리제궁에서 르끌레르 전차 개량 물량 100대로 대폭 축소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하네.”
파리 8구의 포부르 생토노레가 55번지에 위치한 엘리제궁(Le Palais de l’Elysée)은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로 우리나라로 치면 청와대를 뜻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라파엘 전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얼른 되물었다.
“150대나 줄어들다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대통령이 직접 내린 지시라고 하니 확정이 됐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그러면 개량 사업 규모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맞아.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뭔지 아나? 물량은 축소됐지만 개량 일정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거야.”
“예정된 개량 기간이 4년이니까 그럼 1년에 겨우 25대의 전차만 개량을 실시한다는 말씀입니까.”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클리시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생산 라인을 간신히 유지만 할 수 있는 수준이지.”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큰일이군요.”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에 두 대 꼴로 개량 작업을 실시해야 되는 거니까 생산 효율이 바닥을 치는 건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기술자들이 일손을 놓고 있어야 됐다.
“아랍에미리트까지 기존에 보유한 르끌레르 전차를 개량하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신형 전차 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이번 입찰에서 승리해 사업을 수주하는 것뿐이네.”
라파엘 전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이번 일만 성공시킨다면 다음번 이사회는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 말씀은…….”
“자넬 차기 사장으로 강력하게 추천하겠단 뜻이네.”
“정말이십니까?”
순간적으로 눈빛을 바꾼 라파엘 전무가 묻자 클리시 회장은 유리잔에 남은 맥주를 비워 버리곤 말했다.
“물론일세. 그러니까 자네는 수주를 받아 오기만 해, 그 뒤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주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자넬 믿도록 하지.”
대신, 하면서 클리시 회장이 손가락으로 라파엘 전무를 가리켰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거야. 난 그다지 인내심이 강한 편이 못 되거든.”
차가운 시선을 받은 라파엘 전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자, 그럼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시원하게 맥주나 한잔 더 하도록 하지.”
“예.”
클리시 회장이 한쪽 팔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려고 할 때 정장을 차려 입은 수행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회장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 중인 것이 안 보이나. 중요한 것이 아니면 나중에 다시 말하도록 해.”
“급한 일입니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클리시 회장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그러는 거야?”
“알자지라Aljazeera에서 르끌레르 전차를 혹평하는 보도를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 여기 보도 내용을 간추린 걸 가져왔습니다.”
수행비서가 내민 서류를 빼앗듯이 가져간 클리시 회장이 급히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점점 일그러지면서 붉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에 앞에 앉아 있던 라파엘 전무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는 아랍에미리트가 보유한 르끌레르 전차가 예멘 내전에서 후티 반군의 급조폭발물(IED)과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무력하게 당한 걸 지적하면서, 프랑스가 자국도 더 이상 도입하지 않고 보유 물량을 헐값에 중고로 처분하는 구형 전차를 중동에 비싸게 팔려 한다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았으나 실제로 예멘 내전에서 상당수의 르끌레르 전차가 후티 반군의 공격에 격파당했고, 최근 프랑스 정부가 전시 비축 물량으로 돌려 둔 전차를 매물로 내놓은 거하고 절묘하게 맞물려 알자지라 방송의 보도가 진실인 것처럼 보였다.
“제길!”
욕설을 내뱉으며 테이블에 내던진 종이를 라파엘 전무가 들고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기사의 첫머리 부분을 읽자마자 그 역시 클리시 회장처럼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결국 입에서 침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불같이 화를 내는 클리시 회장에게 수행비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이제 막 전달받은 사항이라…… 자세한 내용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멍청한! 그딴 식으로 일을 해서 어쩌자는 거야!”
수행비서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토해 낸 클리시 회장은 답답하다는 듯 맥주잔을 들다가 이미 다 마셔 버린 것을 깨닫곤 컵이 부서져라 큰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 술 좀 더 가져오라고 해!”
황급히 카운터 쪽으로 뛰어가는 수행비서를 쳐다보면서 클리시 회장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쳤다.
“도저히 마시지 않고선 못 배기겠군.”
그러다가 앞에 앉아 눈치를 살피고 있는 라파엘 전무를 보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보도가 나올 때까지 자넨 도대체 뭘 한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차기 전차 사업 입찰을 앞두고, 후보 중에 하나인 르끌레르 전차를 저격한 거였다.
사업을 진행하는 두 나라 언론도 아니고 카타르의 위성 뉴스 보도 채널이었지만, 알자지라 방송이 중동 지역에서 가장 인기가 있고 파급력이 큰 뉴스 매체인 걸 생각한다면 르끌레르 전차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입찰을 시작하기도 전에 발이 꼬여 버린 클리시 회장은 이번 사업을 전담하고 있는 라파엘 전무를 마뜩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혀를 찼다.
“이래 가지고 어디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겠나?”
“아무래도 경쟁 업체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클리시 회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방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는 일이야.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해. 내 말 알아들었나?”
“예.”
클리시 회장은 흥이 식었는지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더 이상 골프를 칠 기분이 아니로군. 다음에 보세.”
물론 그 다음이 언제 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들어가십시오.”
황급히 따라서 몸을 일으킨 라파엘 전무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클리시 회장이 사라진 뒤였다.
제대로 인사도 받지 않고 떠나가 버린 클리시 회장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여기서 한 발만 더 삐끗했다간 완전히 눈 밖에 나 버릴 상황이었다.
한순간 천당에서 지옥을 오고 간 라파엘 전무는 이를 악물고 아래로 늘어뜨린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젠장.”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측근인 스태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알자지라 보도가 나온 걸 이야기하려는 그러는 거야?”
-알고 계셨습니까?
라파엘 전무는 눈썹을 치켜 올린 채 짜증을 쏟아 냈다.
“그것 때문에 내가 회장님한테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아!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고를 해야 될 것 아니야.”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계속 전화를 안 받으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끄으응.”
클리시 회장과 골프를 친다고 스마트폰을 꺼 놨는데 그사이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화가 났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건 상황을 수습하는 거였기에 라파엘 전무는 손을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알자지라 방송에 정정 보도를 요구하고 당장 배후가 어딘지 파악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회사로 들어갈 테니까 비상 회의를 소집해 놔.”
-옛.
통화를 끝낸 라파엘 전무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클럽하우스 밖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