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31
931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그만한 거물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움직일 리는 만무했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우던 라파엘 전무는 이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혹시 우리가 목숨을 노렸던 걸 알아차리고 보복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러자 스태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라파엘 전무의 인상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분명히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증거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 않았나!”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에 스태판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그, 그렇습니다.”
“이번 일로 피해가 얼마나 큰 줄 알아!”
뒷수습을 자신이 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던 스태판은 더욱 머리를 아래로 깊숙이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손에 든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서 끈 라파엘 전무는 쏘아붙이듯이 말을 내뱉었다.
“놈이 어디까지 파악을 한 거야!”
스태판은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게, 아직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쪽에서 손을 썼다는 건 눈치를 챈 것 같은데, 그 외에 자세한 부분은 모르는 낌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약 확신이 있었다면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행동도 취했을 텐데, 그것 말곤 잠잠하니까요.”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증인이자 증거이기도 한 이벨라에게 아무런 일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였다.
라파엘 전무는 한껏 찡그린 얼굴로 고심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존슨 옆에 우리가 심어 둔 자가 있지?”
“예.”
“존슨, 그자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없애 버리도록 해.”
“조금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에는 이미 틀렸으니까 상관없어. 대신 나중에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뒤처리를 말끔하게 마무리 짓도록 해. 또다시 실수를 한다면 그때는 자네도 끝이야.”
스산한 눈빛에 스태판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바로 머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며칠 뒤, 혁권은 지난번에 만났던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다바그 왕자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 일을 하기로 해서인지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합의한 대로 계약서를 만들어 왔습니다. 한번 살펴보시죠.”
뒤에 서 있던 백성균이 혁권의 말에 가지고 있던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 탁자에 내려놨다.
“자꾸 귀찮게 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일일수록 서로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지요.”
“이해해 줘서 고맙소.”
미소를 띤 다바그 왕자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자 동석해 있던 고문 변호사가 대신 계약서가 든 서류철을 집어 들고는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계약서에는 K2 흑표에 들어가는 1,500마력짜리 DV27K엔진을 생산하는 합작 법인을 국내 업체와 50 : 50 지분 비율로 설립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차 조립 라인을 비롯해 부품 생산 공장을 짓기 위한 토지 확보와 건설 업무도 전부 맡기기로 했지만, 그건 지금 단계에서 문서를 남겼다가 자칫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에 일단 제외시켰다.
비록 정식으로 계약서를 만들지는 않았으나, 사업을 수주한 이후에도 원만한 진행을 위해서는 다바그 왕자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서로 약속을 어기는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고문 변호사가 계약서를 살펴보는 사이에 다바그 왕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앞에 있는 혁권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번 주말에 알 아시리 장군하고 오랜만에 만나서 골프를 한 게임 치기로 약속을 잡았소.”
솔깃한 소식을 들은 혁권이 눈동자에 이채를 띄었다.
“잘되었군요. 알 아시리 장군이라면 쉬이 만나기 힘든 인물인데……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나하고는 예전에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함께 다닌 인연이 있어서 꽤 친분이 두터운 사이요.”
“그렇군요.”
알 아시리 장군은 차기 사우디아라비아 육군 참모총장 후보로 손꼽히는 엘리트 장교이자 현재 군부 내에서도 핵심 요직인 인사참모장직을 맡고 있는 실세였다.
이번 차기 전차 사업 입찰에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지만 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군부 실세들과 끈을 만들어서 코리아 컨소시엄에 우호적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그가 다바그 왕자한테 기대하는 거였다.
그런데 합류를 하자마자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알 아시리 장군 같은 거물하고 약속을 잡았다고 하니, 기꺼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뭐든 말씀을 하십시오. 최대한 지원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러는 사이에 계약서 검토가 다 끝났는지 고문변호사가 서류철을 다바그 왕자 쪽으로 살짝 밀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상이 없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다바그 왕자는 안주머니에서 최고급 금장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계약서 하단에 서명을 했다.
계약이 마무리되자 다바그 왕자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덕분에 좋은 비즈니스 기회를 가지게 돼서 고맙소.”
“아닙니다. 회장님처럼 든든한 파트너하고 함께 일하게 됐으니 저희가 더 감사한 일이지요.”
“하하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은 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려.”
껄껄 웃은 다바그 왕자는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존슨 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다음 날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서 우리가 함께 일하게 됐다는 걸 이야기했었소.”
“그러셨군요.”
우호적이기는 했지만 워낙 변덕이 심한 데다가 의심 또한 많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에 그는 내심 바짝 긴장했다.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상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세자가 뭐라고 한 줄 아시오?”
“글쎄요.”
일부러 호기심을 유발하는 질문에 덥석 덤벼드는 건 새파란 초짜나 할 짓이다.
그렇다고 아예 무관심한 척을 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혁권은 적당히 대응하며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믿을 수 있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니 함께 잘해 보라고 했소.”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군요.”
빈살만 왕세자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하는 것에 대해 딱히 괘념치 않는다는 뜻이니 안심할 수 있었다.
다바그 왕자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혁권을 향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왕세자하고 관계가 이리 돈독한데 내가 구태여 필요할까 싶었소.”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마음에 걸리던 부분도 말끔하게 다 해결됐으니 입찰을 따낼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해 봅시다.”
상대가 먼저 내민 손을 맞잡으면서 그는 흰 이를 드러내고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벨라는 웨이터가 막 갖다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주변을 몰래 훔쳐보았다.
약속 시간이 벌써 5분이나 지났는데, 사내는 아직 나타날 기미가 안 보였다.
설마 이대로 영영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커피 잔을 내려놓던 이벨라는 딸각,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눈썹을 찡그렸다.
잠깐 한눈을 판 탓인지 손이 미끄러져 컵받침에 부딪힌 것이었다.
사소한 실수에 불과했으나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이벨라는 짜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고 커피 잔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티슈로 지웠다.
그리고 내친김에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다시 립스틱을 꼼꼼히 칠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외국인이어도 여자라면 무조건 히잡으로 머리카락을 가려야 했기 때문에 꾸미는 걸 좋아하는 이벨라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해도 전부 히잡에 가려져 버리니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체 이런 나라에서는 여자들이 무슨 낙으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이벨라가 손거울을 내린 순간, 어느새 바로 맞은편에 남자가 앉아있었다.
“세상에!”
깜짝 놀란 이벨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누구 심장 멈추게 할 일 있어요?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죠!”
“매우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에 일부러 방해하지 않은 겁니다.”
남자가 일부러 립스틱 바르는 시늉을 하며 놀리는 투로 말하니 이벨라가 기분 나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연락은 또 왜 늦게 한 거죠?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이벨라가 계속해서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남자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것보다 미행은 없었습니까?”
“미행? 그런 거 있을 턱이 있나요.”
이벨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미행이라는 건 첩보 영화 같은 데서나 나오는 거 아닌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을 거라는 자신감에 이벨라가 당당하게 대답하자 남자는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면서도 한편으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안 그래도 걱정돼서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잘한 일인 것 같군요.”
“네? 그럼 설마 먼저 와 놓고선 말도 안 하고 숨어 있었다는 거예요.”
이벨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뭐, 보통 이런 걸 신중하다고 하죠.”
뻔뻔스러운 태도에 화가 났으나 이벨라는 아직 그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있음을 떠올리고는 겨우 기분을 가라앉혔다.
“돈은 가져온 거예요?”
아무리 살펴봐도 빈손인 모습에 이벨라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그걸 보며 남자는 태연하게 의자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그 전에 한 가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그러자 이벨라가 정색을 하고는 뾰족하게 말했다.
“이미 약속대로 다 했잖아요.”
“하지만 일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지요.”
“그게 제 탓이라는 거예요?”
“일부분은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아요!”
발끈해서 소리를 치자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실수를 깨달은 이벨라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됐으니까 얼른 돈이나 내놔요.”
언제 자신이 독을 쓴 걸 들킬지 몰라 하루하루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던 그녀는 어서 돈을 챙겨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이벨라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사내는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쪽지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90만 유로가 입금되어 있는 소시에테제네랄 은행 계좌 번호입니다. 일을 해 준다면 돈을 인출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도록 하지요.”
“……!”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에 이벨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앞에 놓인 쪽지를 내려다봤다.
“어차피 한동안 잠적해 있을 생각일 텐데 그러면 돈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소.”
이벨라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짓씹던 이벨라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비쳤다.
“뭘 해야 되는지 말해 줘요.”
그녀의 입에서 바라던 대답이 흘러나오자 남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