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32
932
이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혁권은 대기하고 있던 벤츠 방탄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앞뒤로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벤츠는 경사로를 올라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서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킹할리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시가지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혁권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을 뗐다.
“리비아 상황은 좀 어때?”
그러자 배웅을 위해 옆자리에 타고 있던 함단이 바로 대답했다.
“트리폴리를 가운데 두고 3개의 군대가 뒤엉켜서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어제는 자밀 의장을 따르는 혁명단 전투기들이 트리폴리 남부 아부 슬림에 공습을 가해서 정부군과 민간인 20명가량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혁명단 병력 일부가 트리폴리 시내로 진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금방 수도가 함락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꽤 오래 버티고 있군.”
“후세인 준장이 병력을 이끌고 혁명단 측면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말씀대로 트리폴리가 점령되어 버렸을 겁니다. 중심가에 위치한 정부 청사 앞에서까지 총격전이 벌어졌을 정도였으니까요.”
“맞아. 정말 아슬아슬했었지.”
내부 분열로 정부군 스스로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에 국제사회에서도 더 이상 가망이 없다 생각하고 자밀 의장을 새로운 리비아의 통치자로 인정해야 되는지 심각하게 논의가 오갔을 정도였다.
“후세인 준장을 상대하느라 혁명단이 주춤한 사이에 주와라를 비롯한 서부 지역에서 지원 병력과 물자가 대거 도착하고 전열을 재정비했으니, 이제 트리폴리를 함락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 간다면 내전이 길어질지도 모르겠군.”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자밀 의장이 트리폴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만든 건 다행이지만, 내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미스라타에서 나오는 원유를 가져오는 것이 힘들어질 터였기에 혁권으로서는 그리 좋을 게 없었다.
“그건 그렇고 차기 전차 사업 평가단에서 본 입찰 전에 후보 전차들에 대한 현지 성능 테스트 일정을 통보할 예정이라고 그랬지?”
차기 전차 사업 평가단은 전차 도입 사업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정부가 손을 잡고 만든 임시 기구였다.
“예. 다바그 왕자가 알 아시리 장군을 통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4개 후보 전차를 전부 모아 놓고 2주간 리야드 인근 사막 지대에 위치한 군사기지에서 혹독하게 진행될 계획이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양국 군 책임자들 앞에서 선을 보이는 자리인데, 고장이 나서 퍼지거나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입찰은 해 보나 마나니까, 서울에 연락해서 철저하게 준비를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킹할리드 국제공항.
호출을 받은 전용기 승무원들은 호텔 로비에서 함께 만나 공항에 도착했다.
차례대로 짐을 내린 뒤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이벨라가 중간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자 나란히 움직이던 로시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그래?”
“잠깐 화장실 좀······.”
“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로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자 이벨라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볼일만 보고 바로 따라갈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있어. 사장님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도 있잖아.”
이륙 전까지 식음료의 재고 상태와 시트의 청결 여부 등을 체크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렀다.
이벨라가 그렇게 등을 떠밀자 로시는 알았어, 하고 손목시계를 힐끔 보더니, 아직 여유로운 것을 확인하곤 앞서 가는 다른 일행과 합류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기장에게 로시가 사정을 설명하면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벨라는 가장 가까운 여자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청소 중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어서 화장실 앞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벨라는 주변을 살짝 둘러본 뒤 청소 중 팻말을 무시하곤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섞인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이벨라는 양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서서 심호흡을 했다.
“하아······.”
사방이 온통 타일로 둘러싸인 탓일까, 작은 소리도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벨라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으면서 침착하자고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물을 잠그고 고개를 드는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몸 바로 뒤에 검은 형체가 어느새 바짝 다가와 서 있었다.
“히익!”
이벨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 하다가 익숙한 얼굴인 걸 보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랐잖아요!”
정색한 이벨라의 말을 무시하며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가방을 하나 그녀에게 내밀었다.
흔히 승무원들이 세컨드백이라고 부르는 작은 가방이었다.
“이걸 가져가면 됩니다.”
엉겁결에 가방을 넘겨받기는 했지만 이벨라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본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여권과 비행기 티켓 그리고 반으로 접힌 쪽지를 꺼내 세면대에 올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1시간 뒤에 출발하는 필리핀행 티켓과 계좌 비밀번호입니다.”
“······.”
“전용기 안에 가방을 놔두고 나와서 티켓을 가지고 여길 떠나 외딴 휴양지에서 몇 달 조용히 숨어 지내면 되는 겁니다. 위조 여권도 준비해 놨으니 딱히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들킬 일도 없을 테고요.”
그러자 입술을 질끈 깨문 이벨라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세면대에 놓인 물건을 챙겨 들었다.
“알았어요.”
“이번에는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벨라가 눈을 흘겨보고는 건네받은 세컨드백을 캐리어에 올리고 그대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주기장에 세워져 있는 전용기 안으로 들어서자 막 좌석을 정리하고 있던 로시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왔어.”
“미안해, 조금 늦었지?”
“아니야. 일단 짐부터 넣어 두고 와.”
“그래.”
이벨라는 갤리 안쪽에 벽장처럼 생긴 좁은 공간에 캐리어를 밀어 넣었다.
이미 로시가 자기 외투와 짐을 놔두었기 때문에 이벨라의 캐리어가 들어가자 빈틈없이 딱 들어맞았다.
방금 전 남자한테서 받았던 세컨드백을 내려다보며 잠깐 머뭇거린 이벨라는 이내 문을 꾹 눌러 닫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태연한 척하며 밖으로 나와 로시와 함께 실내 체크를 다 마치고 혹시나 빠뜨린 게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는데, 돌연 이마를 찌푸리며 배를 움켜잡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놀란 로시가 다가와 묻는 말에 이벨라는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까부터 속이 좀 안 좋았는데······.”
“많이 심한 거야?”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이벨라가 한쪽 손으로 좌석 시트를 짚고 선 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공항 의무실에 가 봐야 되겠어.”
“그 정도야? 이제 조금 있으면 이륙할 건데 어쩌지?”
전용기여서 대체 인력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벨라 때문에 일정을 늦추거나 취소하기도 어려웠다.
“무슨 일이야.”
당황해하던 로시는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돌렸다.
“부기장님.”
흰색 제복에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30대 후반의 부기장이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벨라를 보곤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벨라는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복통이 왔는데 많이 심한가 봐요.”
로시의 말에 이벨라를 살펴본 부기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지금······.”
“죄송해요.”
“일부러 이러는 것도 아니고 어쩌겠어. 기장님한테는 내가 이야기를 할 테니까 일단 공항 의무실로 가 보도록 해.”
“그럴게요.”
“그런데 혼자 갈 수 있겠어?”
부기장의 물음에 혹시라도 도와준다고 누가 따라서 내리기라도 할까 봐 이벨라가 황급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멀리 가야 되는 것도 아니고 공항 안이잖아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
“네. 조금 있으면 사장님 일행이 도착할 텐데 어서 이륙 준비를 끝내야죠.”
이벨라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부기장은 아픈 그녀를 혼자 보내는 걸 크게 미안해했다.
“그래. 그럼 어서 의무실에 가 보도록 해.”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갑자기 혼자 내리게 돼 미안해서 그러는 줄 알고 부기장이 이벨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줬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인접해 있는 아부다비가 목적지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고 괜찮아지면 비행기를 타고 따라오도록 해.”
“그럴게요.”
두 사람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이벨라는 전용기에서 내렸다.
이렇게 되면 로시 혼자서 기내 서비스를 담당해야 되지만, 애초에 혁권도 그렇고 다른 수행원들도 이것저것 해 달라고 부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부기장에게 기내 체크 결과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하던 로시는 앗, 하고 갑자기 뭔가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캐리어!”
“뭐?”
“이벨라의 캐리어 말이에요. 아까 갖다 두는 것 같았는데······.”
뒤늦게 생각이 난 로시가 황급히 벽장 앞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로시의 짐 옆에 이벨라의 캐리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쩌죠?”
낭패한 표정으로 로시가 부기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비행기의 둥근 창으로 바깥을 확인한 부기장은 이미 늦었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벌써 공항 청사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야. 아무 데도 모습이 안 보이는군.”
배가 아프다고 했던 것치곤 빠른 행동이었지만 로시는 그런 의심도 하지 못하고 다만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나중에 합류할 테니까 이대로 놔두는 수밖에.”
아까 이벨라에게 말했던 대로 다음 목적지가 가까운 아부다비여서 다행이었다.
“하아. 이벨라 얘도 참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건지······.”
“아픈데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있었겠어.”
부기장은 로시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전용기를 내리자마자 지나가는 정비사를 붙잡아 카트를 빌려 타고 급하게 공항청사로 돌아온 이벨라는 의무실에 가는 대신 물품보관소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벨라는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 직원에게 건네곤 열쇠를 받아 미리 보관함에 넣어 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찾았다.
안에는 약간의 옷가지와 돈,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필리핀행 비행기 티켓이 들어 있었다.
이벨라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짐 가방을 들고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제 진짜 떠나는 거야.’
이대로 옷을 갈아입고 필리핀행 비행기에 탑승하기만 하면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나는 것이다.
전용기에 탑승한 혁권은 윗도리를 벗어 한쪽에 놔두고는 넓은 좌석에 등을 기대며 편하게 앉았다.
“옷을 넣어 드릴까요?”
“그래 줘요.”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인 로시는 윗도리를 가져가 기내 한쪽에 있는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킴을 보며 말했다.
“도착하면 저녁이겠군.”
“함단이 즐겨 이용하시는 에미리츠 팰리스 호텔을 미리 예약해 뒀으니 그리로 바로 가시면 됩니다.”
“거기가 보안도 잘되어 있고 편하지.”
왕궁으로 지어지다가 마지막에 용도를 바꾼 8성급 초호화 호텔이었으니 시설은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대로 앉아 이륙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는지 하킴이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귀에 가져갔다.
“그게 정말이야. 알았어. 바로 조치를 취하도록 해.”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끝낸 하킴은 그를 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스, 아무래도 아부다비로 가는 건 잠깐 미루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쪽에서 또 뭔가 일을 꾸민 것 같습니다.”
“······!”
말뜻을 알아차린 혁권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