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66
966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검찰은 물론이고 국정원에서도 자신이 한 것처럼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조사를 진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서로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그걸 깰 수도 있다며 대놓고 그를 협박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소?”
눈을 부라리면서 전병주가 말을 내뱉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두 기관이 서로 조금 불편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검찰에서 비리 검사 하나 감싸자고 국정원하고 기 싸움을 벌이지는 않겠지요.”
“······.”
불법 조사뿐만 아니라 그동안 몰래 저지른 비리들까지 전부 까발려 주겠다는 말에 전병주의 얼굴이 굳음을 넘어서 썩어 들어갔다.
단순히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법조계에서 매장시켜 버리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사건을 무마시켜 준 대가로 뒷돈을 챙긴 자리에 나타난 것도 애초에 다 계산된 행동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전병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채 앞에 있는 심인성 과장을 쏘아봤다.
“대체 그놈이 뭔데 국정원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억울한 듯 짜증스럽게 묻는 말에 심인성 과장은 차갑게 냉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쪽이 건드려선 안 될 사람에게 손을 댄 거란 겁니다.”
말투는 가벼워도 그 속에 담긴 경고는 확실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전병주는 이내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소. 김혁권한테서 손을 떼겠소.”
“잘 생각했습니다. 앞날이 창창한데 이런 일로 걸려서 넘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심인성 과장과 달리 굴욕적인 상황에 전병주는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필리핀 앙헬리스.
높은 야자수 나무 뒤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노을이 졌다.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길을 걷던 행인마저도 무심코 카메라를 꺼내 들고 싶을 만큼 황홀한 광경이었으나 전날 술을 엄청나게 마신 김인철은 시간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얼싸안고 뒹굴어도 넉넉하게 남을 만큼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 위에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린 그의 몸에선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마시다 흘리기라도 했는지 옷이며 하다못해 코로 내뱉는 숨에서도 악취가 풍길 정도이니 얼마나 지저분하게 놀았는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갈 만했다.
커튼이 완벽하게 창문을 가려 주고 있어서 조명 하나 켜지 않은 방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런 가운데 코골이 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던 김인철은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으음, 하면서 손끝을 움찔거렸다.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는 입속으로 상스러운 욕설을 중얼거리며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금방 끊어질 것 같던 벨소리가 몇 분 동안 계속되며 끈질기게 울려 퍼지자 결국 김인철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김인철은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잔뜩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휘적거리며 스마트폰을 찾았다.
처음엔 당연히 옆에 있는 협탁에 올려 놨겠거니 했으나 소리만 들릴 뿐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아, 시발.”
시끄러운 벨소리를 들으며 방 안을 뒤적거리던 김인철은 마침내 침대 아래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어떻게 저기까지 굴러갔지.”
에이 씨, 하면서 팬티 한 장만 입은 차림새로 바닥에 보기 흉하게 엎드린 김인철은 끙 소리를 내며 간신히 스마트폰을 집고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벨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기에 김인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선 대체 누가 건 전화인지 확인했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본 그는 잔뜩 귀찮은 얼굴을 한 채 스마트 폰을 귀로 가져갔다.
“나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는 거야?
뭔가 잔뜩 화가 난 듯한 전병주 차장검사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김인철은 심드렁한 얼굴로 협탁에 반쯤 먹다 남겨 둔 생수병을 집어 들어 마른 목을 축이면서 말했다.
“자고 있었어.”
-난 여기서 아주 뺑이를 치고 있는데 혼자 팔자 좋군.
“무슨 일인데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후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더 이상 네 일을 못 도와줄 것 같다.
난데없는 이야기에 김인철이 인상을 쓰며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오늘 국정원에서 날 찾아왔어.
“······?”
-내 목줄을 쥐고 흔들면서 뭐라고 협박했는지 알아.
“설마······.”
-김혁권에 대해서 신경을 끄라더군. 안 그러면 내 옷을 벗겨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이야.
숙취가 확 달아난 김인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정말 국정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날 선 반응에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참고 넘어갔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러지.”
-아무튼 난 이제 이 일에서 손을 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떻게 해?”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정말 옷이라도 벗으라는 거야? 국정원 놈들이 작정을 하고 쑤셔 대면 변호사 개업은 고사하고 곧장 감방에 들어가 거기서 은퇴를 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야.
“제길!”
욕설을 내뱉은 김인철은 귀에 댄 스마트폰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도대체 국정원 놈들이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도 몰라. 하지만 이번 일로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어.
“······.”
-김혁권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해. 어차피 이미 다 지나간 일인 데다가 이제 와서 그룹 경영권을 되찾아올 수도 없잖아.
김인철이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뭐가 다 끝났다는 거야! 아직 난 그룹을 포기하지 않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충고를 하는데 김혁권은 건드리지 마. 그나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까지 다 잃을지도 몰라.
나름 진심 어린 충고였지만 오히려 김인철의 자존심을 긁어 놨다.
“내가 그딴 놈한테 당할 만큼 호락호락해 보여!”
-후우. 마음대로 해. 그리고 네가 준 위성전화기는 바로 폐기처분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일방적으로 뚝 끊어 버린 전화 뒤엔 귀에 거슬리는 신호음만이 남았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통화를 끝내 버릴 줄은 몰랐기에 잠시 넋 나간 듯 앉아있던 김인철은 갑자기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더니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벽에 던졌다.
큰 소리를 내면서 벽을 맞고 튕겨 나간 스마트폰이 바닥에 나뒹굴고, 김인철의 어깨가 아래위로 들썩거렸다.
“내가 이런다고 포기할 것 같아! 암, 절대 못 하지.”
이를 부드득 갈면서 눈을 번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보였다.
한편 오랜만에 청담동 명품거리 한쪽에 위치한 미리내 브랜드 본점에 들른 혁권은 매장을 둘러본 뒤 간부들로부터 경영 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동안 브랜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간 만큼 내년에는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방안을 모색해 볼 계획입니다.”
혁권은 손에 든 현황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미리내 브랜드를 총괄 관리하고 있는 최정욱 부장을 봤다.
“중국 고객들이 상당히 많이 찾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도 자리를 다 잡지 못했는데, 해외로 눈을 돌리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예상외의 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지만 브랜드를 론칭한 지 아직 채 3년도 되지 않았으니 이런 우려를 나타내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리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최근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하며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주와 남미 그리고 유럽까지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는 한류에 편승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해외 진출의 적기라는 것이 저희 판단입니다.”
“요즘 한류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고가품인 미리내 제품하고 한류의 주 소비층하고는 차이가 크지 않나?”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한류에 열광하는 주 계층이 일반적으로 1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세대였기에, 가장 싼 제품이 2천 달러를 가볍게 넘기는 미리내 브랜드의 쥬얼리를 구매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타깃층이 다르다는 뜻이었기에 무턱대고 한류만 믿고 해외 진출을 했다가는 큰 실패를 경험하며 기껏 올려놓은 브랜드 이미지마저 떨어뜨릴 수 있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첫 해외 진출 지역을 부유한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홍콩이나 마카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 많은 유커[游客](중국인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삼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통한 명품 마케팅으로 최고급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만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내 한국 영상물에 관한 수입과 배급 쿼터를 독점하고 있는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사가 혁권의 소유였기에 자연스럽게 미리내에서 협찬을 하게 됐고, 그게 시너지를 보이며 브랜드 이미지를 올리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었다.
당장 청담동에 있는 본점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한국에 온 유커들이 올려 주고 있었고 그 때문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들을 상당수 고용하고 있을 정도로 미리내 브랜드가 급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나 두 지역은 아시아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도박과 쇼핑의 중심지로 부유한 유커들이 1년 내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이니 다른 곳보다 자리를 잡기가 훨씬 수월할 거라 예상됩니다.”
“흐음.”
나름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한 느낌에 그는 한쪽 팔을 들어 매끈하게 면도를 한 턱을 매만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에 진출을 한다면 여기처럼 단독 매장을 여는 건가?”
“아닙니다. 우선은 안전하게 현지에 있는 유명 백화점이나 카지노 리조트 내부의 명품관에 입점해서 영업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수수료를 비롯해 이런저런 비용이 나겠지만 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처음 시작할 때는 이점이 많겠지.”
“그렇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잠시 더 생각을 해 보다가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구체적인 계획서를 만들어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계획을 승인한 건 아니었지만 혁권이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최정욱 부장은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시선을 돌려 왼편 소파에 앉아 있는 정빛나 디자인 실장을 보며 물었다.
“내년에 출시할 신상품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나?”
“네. 이미 디자인 6개를 확정하고 시제품 제작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쪽은 정 실장한테 모든 걸 다 일임했으니까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네.”
처음 스카우트를 했던 조건대로 디자인에 관련해서 전권을 주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 모습에 정빛나 실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신제품 디자인이 꽤 잘 나왔으니 이번에도 실망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믿음직스러운 대답을 들은 혁권은 매우 만족한 듯한 얼굴로 서류철을 덮으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인사하고 소파에서 일어서는 사람들 가운데 혁권이 아, 하면서 정 실장을 불렀다.
“정 실장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남아 있도록 해.”
“예.”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빛나 실장은 군말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른 간부들이 방을 나가고 넓은 사장실에 둘만 남게 되자 혁권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