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67
967
“흠흠. 다른 게 아니라 정 실장한테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부탁요?”
“음.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다면 가급적 들어줬으면 좋겠어.”
정빛나 실장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글쎄요, 뭔지 말씀을 해 주셔야 대답을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정 실장에게 해가 되는 부탁은 아니야. 다만 내 입으로 말을 꺼내기가 좀 멋쩍어서······.”
드물게 머뭇거리는 혁권의 모습을 보고 정 실장의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자네 능력을 믿고 하는 말인데······ 프러포즈 링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없겠나?”
“프러포즈 링요?”
말을 듣는 순간 정빛나 실장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머, 대표님이 쓰실 건가요? 그럼 상대는······? 아, 당연히 그분이겠네요.”
어차피 소현과 혁권의 관계는 회사 관계자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혁권 정도의 재력이면 다른 여자들이 달라붙을 법도 한데 절대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애인인 소현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사내 여직원들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뭐, 그렇지.”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혁권이 답하자 정빛나 실장은 손뼉을 짝 치면서 기뻐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부탁을 들어주는 건가?”
“예에, 그럼요. 참고로 원하는 디자인이나 보석 같은 건 있으세요?”
메모지까지 꺼내 든 정빛나 실장이 번득이는 눈빛으로 달려들었다.
애인에게 줄 프러포즈 링이니만큼 예산에 제한 같은 건 없을 테고 사용되는 보석의 종류나 양 같은 것도 혁권이 관대하게 허락해 줄 것이 분명했다.
돈과 재료를 펑펑 써 가면서 창작 혼을 마음껏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되겠는가.
“내가 이런 쪽은 문외한이라 디자인은 생각해 둔 것이 없네만······ 보석은 아무래도 다이아몬드를 쓰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싶어.”
다이아몬드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일단 혁권이 개인적으로 광산까지 가지고 있으니 질 좋은 물건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어서 여러모로 편리할 터였다.
말을 들은 정빛나 실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보석 하면 다이아몬드가 최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주 진지한 태도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메모장에 뭔가를 끄적거린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디자인은 제가 나중에 몇 가지 시안을 만들어서 올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 정빛나 실장에게 혁권은 잘 부탁한다고 재차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다시 찾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는 전과 달리 경직되고 긴장한 분위기를 풍겼다.
시가지 곳곳에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군 병력이 눈에 띄었고, 교차로에는 전차와 장갑차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만 같은 삭막한 풍경에 최고급 대형 SUV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던 혁권이 고개를 바로하며 입을 뗐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그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군.”
그러자 옆에 나란히 타고 있던 함단이 말을 받았다.
“정말 이러다가 진짜로 전쟁이 터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어제 유조선이 한 척 또 피습을 당했다고.”
“그렇습니다. 이번 달 들어서 벌써 일곱 척째입니다. 더군다나 공격을 당한 유조선이 침몰까지 해 버리는 바람에 페르시아만 일대의 분위기가 더욱 안 좋은 상황입니다.”
“위태로운 상태라더니 결국 침몰한 모양이군.”
“하필이면 피격된 유조선이 아람코 소유의 배라 국방부 대변인이 언론 브리핑에서 공식적으로 이란을 비난하며 전쟁이라는 단어까지 거론할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분노가 큽니다. 그로 인해서 페르시아만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한 운임과 보험금이 덩달아 치솟고 있는 중이고 말입니다.”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동 상황에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배치해 놨다면서 미국은 유조선들이 피습당하는 걸 막아 내지 못하고 뭘 하는 거야?”
“워낙 선박 통행량이 많은 곳인 데다가 어선 같은 작은 배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고성능 폭탄을 실은 드론까지 띄워 공격을 벌이고 있어서 대응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인내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을 텐데 큰일이군.”
“그래도 설마 전쟁까지 가겠습니까.”
설마 하는 함단과 달리 그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채 말을 내뱉었다.
“그건 모르는 거지. 실수라도 불을 댕기는 순간 삽시간에 중동 전체가 시뻘건 화마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거야.”
이란은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인 데다가 이스라엘 문제에 수니파와 시아파 갈등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중동 상황이었기에 결코 과장된 우려가 아니었다.
차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혁권이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차기 전차 사업에도 영향을 주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만 상황이 계속 이런 식으로 안 좋게 흘러간다면 어떻게든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프로젝트인 만큼 정세 변화에 따라 무기한 연기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사업 자체가 취소되고 당장 필요한 무기를 직도입하는 걸로 바뀔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미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서 상당한 지출을 한 코리아 컨소시엄으로서는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리는 거였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말씀 드릴 정보가 있습니다.”
“뭔지 말해 봐.”
“아직 소문에 불과합니다만 미국 정부가 곧 사우디아라비에 81억 달러가 넘는 무기를 수출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 듣는 말에 혁권은 미간을 찡그리고는 함단을 봤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직 미국의 무기 수출 금지 대상에 올라가 있을 텐데, 내가 잘못알고 있는 건가?”
“맞습니다.”
“그럼 방금 한 이야기는 뭐야?”
“카리니 암살 사건과 여러 가지 인권 문제로 인해 무기 수출 제한 명단에 들어가 있기는 합니다만, 백악관에서 꼼수를 써서 이행이 되지 못하고 묶여 있는 무기 판매 계약을 통과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꼼수라고?”
“예. 무기수출통제법 조항 가운데 지금까지 거의 사용된 적이 없는 긴급조치 명령을 발동해 무기 판매에 부정적인 의회 승인을 피할 거라고 합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혁권을 보며 함단이 설명을 덧붙였다.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시급한 무기판매라고 대통령이 판단할 경우 의회 심사를 건너뛸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
“그런 것이 있었어.”
“냉전시대 레이건 대통령 이후로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조항이라고 합니다.”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들이 연달아 피격되고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으니 명분은 차고 넘치겠군.”
“백악관에서도 그걸 노린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무기를 팔아 치울 생각을 하다니 장사꾼 출신답지 않습니까.”
아랍인으로서 이스라엘을 감싸고 잇속만 챙기려는 미국 대통령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비난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 함단을 힐끗 쳐다보고는 혁권이 말했다.
“이란의 반발이 크겠군.”
“이란 외교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페르시아만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조선 피격 사건은 자신들을 궁지에 몰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친미 중동 국가에 무기를 대량으로 팔아 치우려는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비밀 공작이라며 맹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미국이 수출하려는 수십억 달러어치의 최첨단 무기가 자신들을 상대하기 위한 거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타이밍도 아주 딱 들어맞고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저희도 피해를 입게 생겼습니다.”
“KGGB를 더 이상 팔아먹기 어렵겠군.”
“그렇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기로 계약되어 있는 무기 목록에 신형 GPS 유도폭탄이 무려 900발이나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수출이 이루어진다면 기대하고 있던 3차 판매는 포기해야 될 겁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꽤 짭짤한 수입을 올려 주던 거래였으나 자신이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혁권은 미련을 두지 않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건 그렇고 이번 현지 테스트에 만수르 회장이 직접 참관을 한다고.”
“네. 그래서 사우디아리비아 쪽에서도 근신이 풀린 빈 살만 왕세자가 나올 수 있다고 다바그 왕자가 귀띔을 해 줬습니다.”
혁권은 습관처럼 한쪽 팔을 들어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단순히 테스트를 보러 온 것일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지금 이 시점에 만수르 회장 같은 거물이 움직이다니······ 어쩐지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기우일 수도 있었으나 자꾸만 그의 촉에 뭔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리야드 외곽 알-무자하미야 사막 지대.
붉은색을 띠고 있는 모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흔히 붉은 사막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상공에 헬리콥터 두 대가 앞뒤로 서서 나란히 날아가고 있었다.
헤드폰처럼 생긴 방음장치를 뚫고 로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짙은 색 선글라스는 낀 혁권은 창가에 앉아 발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모래사막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강렬하게 내려쬐는 뜨거운 태양과 끝없이 이어진 사막은 과연 이곳에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 도로를 닦고 시추 파이프를 뚫어 원유를 퍼 올리는 걸 보며 새삼 인간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막 한가운데 길게 뻗어 있는 이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날아가자 모래 둔덕 사이로 거대한 군사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내일부터 신형 전차 후보들의 현지 테스트가 이루어질 곳이었다.
군기지와 교신을 나눈 조종사가 한번 크게 선회를 하고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자 주변 모습이 더욱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뿌연 모래먼지를 일으키면서 헬리콥터가 안전하게 착륙장에 내려앉자 코리아 컨소시엄 현지 지사장인 김용훈이 상체를 살짝 숙인 채 다가와서는 옆문을 열고 내리는 혁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김용훈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면서 혁권이 큰 소리로 말했다.
“테스트 준비는 잘 끝났소?”
“예. 최종 점검까지 다 마무리하고 이제 내일부터 진행될 평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그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김용훈이 대기시켜 둔 차량에 올라타고는 착륙장을 벗어나 기지 내부로 이동했다.
높다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군사기지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시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기지가 아주 큰 것 같군.”
혁권의 말을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김용훈이 받았다.
“다국적군과 이라크 군이 싸웠던 사막의 폭풍 작전 때 긴급 전개된 미군 주둔지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 이후로는 보시다시피 사우디아라비아군이 이어받아서 계속 사용하고 있고요.”
“기지가 넓어서 여러 가지 성능 시험을 해 보기에는 좋겠군.”
“그래서 여길 테스트장으로 선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서쪽 지역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불모지대라서 얼마든지 기동시험은 물론이고 실사격까지 해 볼 수 있겠더군요.”
“다른 업체들은 분위기가 어떻소?”
김용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다들 만만치가 않습니다. 특히나 KMW는 우려한 대로 레오파트2 전차의 최신 개량형인 2A7V를 들고 나왔습니다. 신형 L55A1 주포에 전자 장비까지 대대적으로 교체하고 아직 성능을 공개하지 않은 복합 장갑을 갖추고 있어, 이름만 같을 뿐 기존 레오파트 2 전차하고 완전히 다른 놈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다가 2A7V 전차가 선정되면 새로 개발된 KE2020 APFSDS탄까지 제공할 수 있다며 사업평가단에 강력하게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KE2020 APFSDS탄? 그건 또 뭐지?”
“러시아의 최신 반응 장갑을 상대하기 위해서 텅스텐 관통자를 사용해 만든 새로운 포탄으로 기존에 사용하던 DM63 APFSDS에 비해 관통력이 20% 이상 상승시킨 괴물입니다.”
“K2 흑표가 주력으로 쓰는 K279탄하고 비교하면 어떻소?”
혁권의 물음에 김용훈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K279탄은 DM63 APFSDS하고 동급이라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파괴력을 가진 우수한 포탄이지만, 최신 전차의 자체 방어력이 700mm급으로 늘어나는 추세라 독일이 정말 KE2020 APFSDS탄을 제공한다면 상대적으로 화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