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68
968
찡그린 얼굴로 혁권이 말하자 김용훈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또 뭐요?”
“이틀 뒤에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리야드를 방문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없었지 않소.”
“유럽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가는 길에 하루 시간을 내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머물기로 일정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으음.”
“최근 잇달아 발생한 유조선 피격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동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단순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미국 국방부 수장이자 군수산업체인 보잉의 수석 부사장 출신인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이 시점에 원래 있던 스케줄까지 바꿔 사우디아라비아를 찾는 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차량은 회색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가 앞으로 지내실 숙소입니다.”
차문을 열고 내린 혁권은 김용훈의 말을 들으면서 건물을 살펴봤다.
항상 머물던 오성급 호텔이 아닌 군 숙소였으나 그래도 나름 깨끗해 보였다.
“정비사를 비롯해 저희 컨소시엄 인원들이 전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내부가 꽤 넓고 방도 넉넉해서 머무시는 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온갖 범죄자들과 반군이 득실거리는 허름한 여관에서도 잔 적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이 정도면 나한테 호텔이나 마찬가지요.”
“그래도 혹시 불편하거나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고맙소.”
그런 말을 들으며 안내받은 방은 예상대로 크게 넓진 않았으나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그럭저럭 부족함이 없는 정도의 크기였다.
철제 프레임 위에 약간 부실해 보이는 매트리스를 놓은 침대가 하나, 작은 서랍이 달린 협탁이 그 옆에 붙어 있었고 반대쪽 벽에는 간단한 업무를 위한 책상까지 기본적인 구색은 다 갖춘 모양새였다.
혁권은 일단 겉옷을 벗은 다음 미니 냉장고의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텅텅 비어 있으면 따로 나가서 구해 오도록 시켜야 하나 잠시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 배려는 해 둔 모양이었다.
목을 축이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혁권은 벗어 두었던 겉옷을 뒤져 스마트폰을 보았다.
도착했다고 말은 해야 될 것 같아 소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내 둔 다음, 그대로 뒤로 드러누우니 싸구려 스프링의 감촉의 등으로 여실하게 느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한 혁권은 멀리 보이는 모래 둔덕 위로 붉은색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에 현지 테스트를 직접 지켜보기 위해 먼저 와 있던 윤도중 한국철도차량 사장과 만남을 가졌다.
김용훈 지사장이 함께 배석한 가운데 남자 직원이 커피를 쟁반에 담아서 세 사람 앞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국에서 가져온 믹스를 탔는지 아주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혁권은 분위기를 살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지 윤도중 사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김용훈 지사장은 연신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아 있었다.
“김 지사장한테 대충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소.”
“그런 것 같더군요.”
“당장 제일 큰 문제는 내일 이쪽으로 오기로 한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오.”
“결국 차기 전차 테스트를 참관하기로 한 겁니까?”
윤도중 사장 대신 김용훈이 얼른 물음에 대답했다.
“조금 전에 리야드에서 연락이 왔는데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가지고 함께 이리로 오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이러면 이란 문제로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차기 전차 프로젝트 사업자로 M1 전차를 생산하는 제너럴 다이나믹 랜드 시스템을 사실상 내정해 버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소.”
목소리에 불안감이 가득했는데 최근 들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며 급격하게 밀착되는 모습을 보이는 데다가, 워싱턴 고위 관리인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까지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리야드를 방문해서 실권자인 빈 살만 왕세자하고 만남을 가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혁권 역시 미간을 잠시 찌푸렸지만 크게 동요를 보이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상황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어차피 다른 두 업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기는 해도 가뜩이나 열세인 처지에 시작부터 이렇게 기선을 빼앗긴다면 앞으로 입찰을 진행하는 것이 더 힘들어지지 않겠소?”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의 방문이 상당한 압박이 되기는 하겠지만, 오히려 그게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윤도중 사장과 시선을 마주하며 혁권이 대답했다.
“백악관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액의 무기 판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긴급조치 명령 발동을 시키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최근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일인 데다가 방산 업계하고 연관이 큰 사안이었기에 윤도중 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런 백악관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 같은 공화당 의원들까지 참여한 22개의 결의안이 만들어져 의회에 제출됐는데, 이런 대치 상황에서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새로운 대규모 무기 판매 계약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다면 미국 의회 의원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윤도중 사장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받았다.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거나 백악관에 우호적인 이들이라고 해도 기분이 좋지는 않겠구려.”
“바로 그겁니다. 상하원을 가리지 않고 미국 의회 의원들이 이번 일에 좋은 반응을 보일 리는 만무할 테고, 이게 표결에서 불리하게 작용해서 백악관의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들은 윤도중 사장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소.”
“거기다가 워싱턴에 있는 정보통으로부터 입수한 소식인데, 결의안과 별도로 상원에서 아예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 저지를 목표로 한 대외원조법 개정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법을 바꾼다는 말이오?”
뭔가 촉이 온 윤도중 사장은 어서 뒤에 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듯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대략 의회가 특정 국가의 인권 상황 정보를 요구하는 투표를 할 수 있고, 이 정보를 검토한 뒤 안보 지원을 중단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더군요.”
바로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윤도중 사장은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건 완전히 사우디아라비아를 겨냥한 것이지 않소.”
윤도중 사장의 말에 혁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만약 이 법안이 상원에서 통과된다면 카리니 암살 사건과 예멘 내전 문제가 걸려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높은 확률로 첫 번째 제재 대상이 될 것이 거의 확정적이지요.”
“그렇게 되면······.”
“개정된 대외원조법에 따라서 미국 기업인 제너럴 다이내믹 랜드 시스템 사는 차기 전차 프로젝트를 수주하더라도 사우디아라비아에 일체의 군사 기술과 부품은 물론이고 전차 완성품을 판매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정말 그게 가능하겠소?”
“여당인 공화당이 53석으로 상원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 법안이 통과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나 제너럴 다이내믹 랜드 시스템을 비롯한 군수 업체들이 워싱턴 정가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하고 말입니다.”
실망한 표정을 짓던 윤도중 사장은 이어진 혁권의 말에 몸을 뒤로 기대고는 고심에 찬 얼굴을 했다.
“그러나 처음에 이야기를 했다시피 상당수 공화당 의원들이 긴급조치 명령을 저지하는 결의안에 서명했을 정도로 백악관의 행동에 불만이 많으니 찬반 투표에서 이탈 표가 얼마나 생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이란과의 대치 상황이 더 악화돼서 무력 충돌로 이어진다면 법안 자체가 철회되거나 부결되어 버릴지도 모르지 않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차기 전차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지게 될 수도 있겠지요.”
당장 이란하고 전쟁이 벌어졌는데 한가하게 장기간에 걸친 무기 도입 사업을 진행할 수는 없을 테니, 기존 계획을 취소하고 외국에서 직도입을 추진할 가능성이 컸고 그 대상은 미국이 될 것이 분명했다.
수주를 따내기 위해 이미 많은 지출을 감수한 코리아 컨소시엄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었다.
다시 굳어진 윤도중 사장의 보며 혁권이 말을 이었다.
“워낙 변수가 많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 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실상 핵보유국이자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보유한 이란을 상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미국 역시 함부로 손을 쓰지는 못할 거라는 겁니다. 당장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이 여러 척 피격을 당했는데도 비난 수위만 높일 뿐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 증거일 겁니다.”
“으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부터 시작될 현지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무사히 잘 끝내는 데 총력을 다하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쟁 업체들이 로비를 벌이는 걸 손 놓고 그냥 두고만 볼 생각은 없으니 이쪽은 저한테 맡기십시오.”
미간을 깊게 좁히고 고민하던 윤도중 사장은 이내 한숨을 쉬면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처음부터 그리하기로 약속했으니 김 사장이 잘해 줄 거라 믿소.”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뒤로도 두 사람은 앞으로 일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혁권은 바깥에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갈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외부로 나오니 건조한 사막 바람이 뺨에 와 닿았다.
아직 한낮의 열이 남아 있어 후덥지근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옷을 더 껴입어야 할 정도로 냉기가 들이닥칠 것이었다.
혁권이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뒤를 지키고 있는 하킴이 익숙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내밀었다.
고맙다는 뜻으로 눈썹 끝을 까딱거린 혁권은 후, 하고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사라지고 온통 어둠만이 가득한 밤하늘에 커다란 달이 하나 떠있었다.
아쉽게도 보름달은 아니지만 유독 빛이 밝고 선명한 것이 과연 도심에서 바라보는 하늘과는 다르구나 싶었다.
만약 서울 한복판이었으면 기껏해야 인공위성 불빛 아니냐며 생각했을 하늘의 별 역시 모래알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 혼자서만 이 광경을 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불빛으로 에워싸인 도심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하늘이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던 혁권은 압도적인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한순간이라도 근심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나오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혁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언제 봐도 새로운 사막의 밤하늘을 눈에 담다가 담배 끝이 다 타들어 가고 나서야 아쉬움이 남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 혁권은 윤도중 사장을 비롯한 코리아 컨소시엄 관계자들과 함께 군사기지 밖으로 나가 오늘 테스트가 진행될 사막으로 향했다.
햇볕이 타는 듯이 내려쬐는 가운데 도로가 아닌 사막을 SUV 네 대가 뿌연 모래 먼지를 일으키면서 줄을 지어 앞으로 내달렸다.
유리창을 닫았는데도 어디서인가 작은 모래가 실내로 들어와서 입안을 꺼끌거리게 만들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윤도중 사장이 생수병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내뱉었다.
“모래 먼지가 정말 지독하구만.”
“한 달 가까이 비가 내리지 않아서 더 심할 겁니다.”
혁권의 말에 윤도중 사장이 온통 황량한 차창 밖 풍경을 힐끔 쳐다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계에 모래가 들어가면 치명적인데 문제없이 테스트를 잘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
“잘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은 기동 테스트가 아니라 전차포 사격을 하는 날이니까 차체에 크게 무리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철저히 하기는 했지만 워낙 가혹한 환경이라 좀처럼 마음이 안 놓이는 것 같소.”
사막의 모래뿐만이 아니라 여름 평균 기온이 45도를 오르내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날씨도 전차뿐만 아니라 운용하는 승무원에게 엄청난 부담을 줬다.
전차를 가동할 때 내부 온도가 영상 55도를 우습게 넘겨 버리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탈진하거나 민감한 전자기기들이 다운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에어컨 시스템이 필수일 정도였다.
“그건 다른 업체들도 모두 똑같은 조건입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조건도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일찌감치 입찰을 접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거침없이 내뱉는 말에 윤도중 사장은 불편한 듯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으나 이내 수긍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 사장 말이 맞소. 입찰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테스트다 보니까 내가 조금 마음이 불안해졌던 것 같소.”
“아닙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요. 경쟁 상대인 두 전차 모두 대단한 명품이지만 저희가 내놓은 K2 흑표 역시 절대 빠지지 않으니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충고 고맙소.”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 굳어 있던 윤도중 사장의 얼굴이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