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protagonist! RAW novel - Chapter 98
98화. >
98화.
파릇파릇한 녹음이 지고 이제 후끈한 열기가 대기를 달구기 시작한 6월.
민수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곧 있을 체육대회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축구 경기 이번에 뛸 사람 없냐?”
“나!”
“야! 반장. 일식이는 꼭 해야 해! 걔가 우리 반 에이스야!”
“하나, 둘, 셋······ 열넷. 야! 너무 많아. 우리 반에서는 4명만 나갈 수 있다고!”
왁자지껄하게 아이들이 제각각 참가할 종목을 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누가 나에게 말을 거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민수야!”
“어엉? 나 불렀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무슨 종목에 나갈 거냐고. 누구든 하나는 꼭 나가야 한대.”
반장의 말에 나는 밀려오는 엄청난 귀찮음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그냥 구경만 하면 안 되냐?”
“안 된대. 선생님이 뭐든 아무거나 하나는 나가라고 했잖아.”
그 말에 나는 학교 행사들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신이 나가고 싶은 종목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애들까지 전부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내는 것이 문제였다.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 왜 단체행사를 강요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 그럼 그냥 줄다리기나 하지 뭐.”
남아있는 것 중 제일 만만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줄다리기였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 줄을 당기는 척만 해도 티가 나지 않는, 그리고 제일 빨리 끝나는 종목을 선택한 나는 다시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았다.
“그······그래. 그럼 이제 종목들은 다 정해졌고, 이제 체육대회가 당장 내일이니까 다들 잊지 말고 꼭 체육복 챙겨와야 한다!”
“어. 알겠다.”
“알겠어. 반장.”
다들 내일 있을 체육대회에 신이 난 표정이었다. 정규 수업을 안 하고 온종일 밖에서 체육활동을 한다는데 기분 좋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게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아르고스. 아직도 따라붙었어?”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내 뒤에서 은밀히 따라붙으며 주시하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현재 중국 요원 2명이 민수님의 행적을 좇고 있습니다.
한 달 전. 아르고스의 눈이 나에 대한 위협이 감지되었다며 경고를 해 왔다.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으로 확실시되는 5명의 요원이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서로 교대를 해 가면서 내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아······. 진짜 무슨 일 처리가 이래서야.”
갑자기 중국 정보부 요원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에 아르고스를 통해 그 이유를 정밀 분석한 결과, 아진 전자 쪽으로부터 나의 정체와 능력에 대한 정보가 일부 유출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관리자님. 지금이라도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기를 권고합니다.
“아. 싫다니까! 그 말 좀 그만해.”
똑같은 조언을 재차 반복하는 아르고스의 메시지에 나는 신경질을 냈다. 내 정보가 중국에 유출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 미국 정부는 주구장창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들들 볶아댔다. 이참에 완전히 내 가족 전체를 미국으로 귀화시키려고 작정한 듯이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엄마나 아빠는 영어로는 단 한 마디도 못 하는 토종 한국인인데 거기 가서 잘도 적응하겠다. 그리고 전에 말했지만, 미국에 가면 행동의 제약이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그래도 여기서 살아온 짬이 얼만데, 내 나와바리를 포기하고 굳이 모르는 곳으로 이주할 필요가 없다니까.”
헬렌은 내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설득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 정부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나와 파트너 관계가 된 것은 내가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 내가 언제라도 미국의 국익을 저해할 수 있는 위협 인물이 된다면, 가차 없이 그들은 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이 그래도 나를 등쳐먹기 힘든 곳이라니까. 나의 가치를 알고 기술을 뽑아먹으려고 해도 미국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어떻게 하기도 힘들 테니 말이야.”
미국에 내가 완전히 귀화해 버린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나의 신병을 구속할 수 있게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지하 연구시설에 처박혀 온갖 미래 기술들만 뽑아 먹히는 신세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부모님과 나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 하지만 민수님이 현재 계획하신 일은 너무 극단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중국 요원들이 내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순간부터 계획한 일이 드디어 오늘 밤에 이루어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르고스는 내 계획을 들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반대의 뜻을 표명해왔다. 내가 아르고스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이. 김민수.”
어눌한 한국인 억양. 하지만 전에 들어본 적 있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험상궃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일전에 본 양아치 5인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심에 있는 한 아이를 보며 나는 반갑게 외쳤다.
“이야! 오랜만이다. 조선족 짱깨야.”
허물없는 내 말에 모두가 황당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가운데의 그 당사자는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듯, 살기 가득한 눈빛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이 간나 새끼가 진짜 죽으려고 발악을 다 하는구나.”
“뭘 새삼스럽게. 어차피 오늘 밤에 만나서 신성한 남자의 맞짱으로 결판을 내기로 했잖아?
눈을 반짝이며 나는 그와 한 오늘의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내 말에 철수는 독기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오늘 밤 12시. 학교 운동장.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
그 말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미 그가 수십 명의 중국인 무리를 데리고 올 계획을 짜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그럼. 남자들의 신성한 맞짱에 방해꾼을 데리고 오면 쓰나? 다구리는 이 세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죄악이라고.”
이번 상황은 쪽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었기에, 나는 그저 많은 살상 무기들을 가지고 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올 때는 칼 제대로 갈고 와. 아니면 네 외삼촌처럼 철창 안에 처박히는 정도로 안 끝날테니까 말이야. 이름이······. 쟈오라고 했나?”
그 말에 철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도 모를 그의 외삼촌에 대한 사실이 내 입에서 나오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네······네놈이 어떻게 그걸?”
하지만 나는 굳이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한 도발을 시전하였다.
“궁금하면 오늘 밤에 와서 나에게 물어봐. 그때는 성실하게 대답해 줄 테니까.”
으드득.
철수는 내 말에 어쩌면 외삼촌을 철창에 가두고 삼합회에서 조선족 조직의 입지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존재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적개심과 살의를 내뿜으며 이를 갈았다.
“이 간나 새끼가 진짜······. 네놈이 지금 뭘 건드린 건지 알고는 있나?”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아주 잘 알고 있다마다.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울 쓰레기들을 싹 청소했지.”
살벌해진 분위기에 나머지 양아치 4명은 주춤거리며 나와 철수의 눈치를 살폈다.
“형들도 같이 오실 건가요?”
“으응······?”
“어······. 나는 오늘 밤에 약속이 있어서······.”
“나도······. 오늘은 몸이 좀······.”
다들 눈치를 보며 슬슬 빠지는 것을 보며 나는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도 양아치로 살아온 경험이 있는지, 껴야 할 곳과 끼지 말아야 할 곳을 분간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오늘 다 함께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아쉽네요. 다음에 언제 같이 보시죠. 그럼 저는 이제 오늘 밤을 위해서 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철수 형은 이따 밤에 늦지 말고요.”
마지막에 눈을 찡긋하고 가자 그는 폭발한 듯이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은 그를 상대할 순간이 아니었다. 오늘 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아르고스. 퍼시발한테 전해. 오늘 밤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말이야. 괜히 주변에 어슬렁거리다 중국 요원에게 노출되지 말고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허를 찌를 수 있도록.”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퍼시발에게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사실 지금까지가 중국이 마음먹고 납치한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한 무방비 상태였지만, 신중하게 나에 대한 탐색전을 벌이던 그들은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답답한 내가 먼저 움직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 알겠습니다.
나는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끝났음을 깨달았다. 나의 신병을 노린 자들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고, 동시에 세상에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
어둑어둑한 밤.
나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학교로 향했다. 보란 듯이 대문을 나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검은 차 한 대가 천천히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척 태연하게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달이 참 밝네······.”
이상하리만큼 오늘따라 휘영청 달이 밝은 날이었다. 마치 누가 누구인지 피아식별이 간단하게 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자정이 된 순간, 나는 학교 운동장에 홀로 서 있었다.
당장 내일이 체육대회라 그런지, 시꺼먼 남학생들만 가득한 학교라고 생각지 못할 정도로, 곳곳에는 현수막이랑 풍선이 붙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여간 이상한 취향을 가진 교장 선생님이라니까.”
운동장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풍선 아치를 보면서 밀려오는 황당함에 나는 중얼거렸다. 전 교직원이 만류했음에도 교장 선생님의 우직하고 뚝심 있는 고집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풍선 아치. 자그마치 이 풍선 아치에 들어간 풍선만 해도 1000개가 넘었다.
“우리 학교 전교생이 힘을 합쳐 만든 이 풍선들에 적혀진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염원을 담아서 만들면, 언젠가는 진짜 이루어질 걸세. 온 우주가 도와줄 거야!”
그리고는 진짜 학교에 있는 모든 학생에게 풍선을 나누어주고 불게 해 풍선에다가 매직으로 각자의 소원을 적게 했다. 물론 장난기 어린 중학생들이 제대로 적을 리가 만무했기에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외설적인 내용이 가득했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진지하게 내 소망을 거기에 적어냈다. 물론 대부분은 장난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나는 그 거대한 풍선 아치에서 내가 만들어 묶었던 풍선을 찾아보았다. 빨갛고 굵은 글씨로 ‘세계정복’이라고 쓰인 풍선. 은근히 잘 보이는 곳에 있어서 그렇게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만든 풍선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데, 운동장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혼자 오기로 해 놓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냐? 완전 반칙 아냐?”
20명도 넘는 험상궂은 문신 아저씨들 무리에 끼어 있는 철수를 보면서 나는 따지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짜 내가 혼자 오자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이 간나 새끼가······. 진짜 혼자 왔나 기래?”
“당연한 거 아냐? 신성한 맞짱에 여러 명을 끌고 오는 비열한 짓을 하면 안 되지.”
그러자 철구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가슴팍 안에서 살벌한 빛을 내는 두꺼운 정육점 칼을 꺼내며 으르렁거렸다.
“작업 시작하기 전에 네가 오늘 나한테 낮에 말했던 거나 제대로 이야기해 봐라. 네놈이 우리 외삼촌이랑 무슨 관계고 어떤 수작을 부렸던 것인지.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끝에서부터 조금씩 다져주지.”
중학생이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대사를 하는 철수를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중딩 주제에 그런 살벌한 발상을 하고 있냐? 그게 소위 말하는 대륙의 기상이냐? 무슨 무법천지도 아니고 무림에서 살다 온 애처럼 툭 하면 칼부터 꺼내 들고 협박이야? 한국에서 그러고 다닐 거면 그냥 네놈들 나라로 꺼져 이 짱깨 새끼야!”
“이······ 새끼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나에게 달려들려는 철구를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멈춰.”
그 말에 철구는 순식간에 멈추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들 무리를 이끄는 대표······. 아니, 행동 대장 같았다.
“너 재미있는 놈이군······.”
눈을 빛내며 씨익 웃는 그를 보며 나도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무리 속에서 한 달간 나를 감시하고 있던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 둘과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삼합회의 힘을 빌려서 나를 납치하려고 이야기를 끝낸 상황인 것 같았다.
“잠자코 우리를 따라와라. 그러면 그 몸뚱이는 보전할 수 있을 테니까.”
“싫다면?”
내 말에 그는 철수의 정육점 칼을 빼앗듯이 잡아들며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다리나 발하나 정도는 잘라내도 생명에 지장이 없거든. 뭣 하면 두 개 다 잘라도 좋고.”
그의 말과 함께 중국인 무리가 내 주위를 사방에서 둘러싸았다.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도 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기 아저씨. 중국 고사성어 잘 알아요? 아. 짱깨니까 잘 알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중국이 이전부터 중원을 지키기 위해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단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책략을 세웠었죠. 이간질과 모함을 하며 서로를 분열시키고 끊임없이 다투게 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원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했죠. 물론 엄청나게 치졸하고 추한 방법이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죠.”
갑자기 옛 중국의 이야기를 꺼내는 나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순간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너······. 갑자기 그걸 왜.”
“그 사자성어를 이렇게 말하죠······.”
내가 눈을 빛내며 진한 미소를 짓고 말하는 그 순간, 어디에선가 총성이 들려왔다.
탕.
“끄아아악!”
“기······기습이다!”
“막아!”
갑자기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모두가 당황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그 행동대장을 보며 말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요.”
끝
ⓒ 군만두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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