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387
386화.
할 말을 모두 끝낸 최한은 무언가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강한 열정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케일의 답을 기다렸다.
케일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목소리가 있었다.
“똑똑한 최한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라온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최한과 케일의 시선이 검은 용에게로 향했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최한을 꼭 용병왕 버드 쳐다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원래 다 같이 싸우고 있다! 같이 있는데 또 뭘 힘을 합치나! 최한아! 용병왕 닮으면 안 된다!”
케일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진지하게 덧붙였다.
“최한이 버드 놈보다는 똑똑하지.”
“그건 맞다! 인간은 역시 똑똑하다! 나보다 쪼오끄음! 덜 똑똑하다!”
“그래, 그래.”
케일은 라온의 맨들맨들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살이 좀 빠졌는데?’
빛의 성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빵빵하던 볼살이 조금 덜 빵빵해져 있었다. 케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문득 덜덜 떨던 홍의 해쓱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홍, 라온과 달리 살이 찌지 않는 온도 떠올랐다.
묘족과 하얀 별의 그 쓰레기 같은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쳐 죽일 새끼들.”
순간 최한과 라온이 흠칫했다.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사과 파이 꺼내봐.”
“오! 알았다!”
라온이 냅다 사과 파이를 꺼내 들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케일에게 내밀었다. 케일은 그걸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
“아?”
케일을 따라 말하던 라온의 입안으로 사과 파이 한 조각이 들어갔다. 라온이 입을 닫자 사과 파이가 입에 물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먹어.”
라온은 케일의 말에 일단 사과 파이 조각을 두 앞발에 쥐고서 먹었다. 케일은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고새 살이 빠지다니.”
지켜보던 최한은 생각했다.
누가?
누가 살이 빠진 거지?
최한은 안 그래도 빵빵한 라온의 볼이 입에 한가득 베어 문 사과 파이로 인해 더 빵빵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심장께가 간질간질했다.
역시 자신이 택한 방향이 맞았다.
분명 하얀 별에 맞서 모두가 다 함께 싸워야 된다고 말했음에도, 최한 주위를 감싼 것은 절망도, 외로움과 고통도 아닌 그저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인간, 최한은 왜 혼자 웃는지 아나?”
“몰라. 내가 아냐? 뭐 웃으면 좋은 거지.”
“음, 그렇긴 하다! 웃으면 좋다! 많이 웃어라, 최한아! 용병왕 닮았다는 말은 취소한다!”
최한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최한이 저렇게 크게 웃는 것을 처음 본 라온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사과 파이를 우물우물거렸다.
하지만 라온은 곧 사과 파이를 먹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최한을 쳐다봤다.
실컷 웃다 말고 최한이 말했다.
“저 사실 수십 년 넘게 살았습니다.”
투둑.
라온의 두 앞발에 달려 있던 사과 파이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한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케일 님보다 나이 많습니다. 론 씨보다 많습니다.”
라온의 두 눈이 깜박이며 최한을 응시했다.
최한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전 아주 천천히 늙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 살 것 같습니다.”
최한은 이 마음속 후련함을 토해내고 싶었다. 왠지 지금이 그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이런 이들 앞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모두 말할 순 없지만, 꽁꽁 숨겨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아주, 정말 아주 먼 곳에서 왔습니다. 이 기록서의 문자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마 저뿐일 겁니다.”
최한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케일이 보였다.
늘 이런 표정이다. 적을 속일 때 가끔 표정이 바뀌어서 그렇지, 평소에는 늘 저렇게 뚱하고 무심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일행 중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저 표정이 다급하게 바뀐다.
케일 본인 빼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일행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올 초부터 이어져 온 전쟁 동안, 케일은 아군을 등 뒤에 둔 채 방패를 펼칠 때면 표정에 감정이 담겨 생동감이 넘쳤다.
최한은 잠시 주변의 정적을 느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인상처럼 순한 목소리였다.
“저는 가족도, 친구도 모두 아주 먼 그곳에 있습니다. 17살에 여기에 와서 홀로 수십여 년을, 셀 수도 없는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
라온은 여전히 땅에 떨어진 사과 파이 조각을 줍지 못하고 있었다. 최한은 그런 라온에게 씨익 웃어 보이고는 케일을 쳐다봤다.
최한은 케일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한참 동안 생각하는 것 같던 케일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최한.”
“네.”
최한은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럽게 답했지만, 심정은 부드럽지도, 차분하지도 않았다.
일부라도 말하니 후련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의, 일말의 불안감도 밀려왔다. 수십 년을 살았음에도 외양은 마치 일 년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그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방금까지 편하기만 하던 최한의 마음속이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최한은 그런 자신을 알기라도 하듯 더욱더 복잡해지는 케일의 얼굴이 보였다.
살짝 망설이던 케일의 입이 열렸다.
“혹시 너도 왕세자 저하처럼 형이라고 불리고 싶냐? 그렇게 불러야 하려나?”
“…네?”
“…아니면 할아버지? 아니면 최한 님?”
케일은 말을 할수록 표정이 진지해져 갔고, 최한은 표정이 요상해져 갔다. 그러다 결국 최한은 다시 미소를 머금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냥 원래대로 대해주십시오.”
“그래, 최한.”
그제야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케일이었다.
그리고 케일은 최한에게서 고개를 돌려 라온에게 사과 파이 한 조각을 다시 쥐여 주며 입을 열었다.
“음식 흘리지 말고 먹어.”
“…아, 알았다. 이, 인간!”
라온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사과 파이 조각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최한의 옆으로 다가와 아공간에서 사과 파이를 하나 더 꺼내 최한에게 내밀었다.
“최한아! 먹어라!”
최한은 이제 라온의 방식을 안다.
그는 기꺼이 웃으며 사과 파이를 받아 들고는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위대한 라온 미르다! 나만 믿어라!”
평소와 같다.
최한은 제 말에도 금세 평소처럼 돌아오는 것을 보며 진정으로 마음이 후련해졌다.
케일은 최한의 얼굴에 편안함이 자리한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털어놓을까.
최한이 자신에 대해 말한 순간, 딱 케일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본래의 케일 헤니투스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죽었을지, 아니면 그가 김록수의 몸으로 들어갔을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케일은 그런 상황에서 무엇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헤니투스 백작가와 그곳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가끔 어떤 진실은 혼자만의 짐으로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케일은 최한의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미련 없이 바라봤다.
최한과 저는 달랐다.
저 후련함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었다.
한국에는 더 이상 친밀하다고 말할 존재가 없다.
그렇지만.
오랜만의 휴가를 보내고 있던 김록수의 미래.
진짜 케일 헤니투스의 행방.
갓 자리를 잡아가던 한국, 부하 직원들.
크고 작은 죄책감과 미련, 고민, 걱정, 책임감.
모든 것들이 케일의 머릿속에 자리해 기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짊어지고 가는 것을 택했다. 그것이 옳을지 그를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를 생각하기에는 케일 앞에 산재한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문제들의 실마리가 담긴 물건, 기록서는 케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케일 님, 기록서를 들고 가실 겁니까?”
“어.”
첫 번째로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하얀 별의 뒤를 노려 새로운 전투를 해야 했기에 혹시 몰라 기록서를 두고 왔다.
사실 최한과 기록서를 떼어놓고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케일은 기록서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최한, 일단 돌아가면서 설명 부탁한다.”
“네.”
모두 별다른 말 없이 그들이 왔던 성의 비밀 통로로 향했다.
로드 쉐리트를 비롯한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갈 때는 이 비밀 통로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었다.
“인간아! 왜 그러나?”
케일이 걸음을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서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케일의 오른손에는 금빛 팽이채가 들려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바람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박이야! 나 엄청 빨리 정보 알아왔어! 히히히!’
분명 하얀 별 일행을 쫓아갔던 바람 정령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케일에게 돌아와 정보를 전했다.
물론 이 정령이 빨리 돌아온 이유가 있었다.
‘하얀 별 수하 몇몇이 이 마을 출구 통로 끝에 서 있어! 하얀 성 비밀 통로 말고, 진짜 출구 통로 끝 말이야!’
케일이 하얀 별의 뒤를 치기 위해서 마을을 벗어날 때 사용했던 출구.
이 출구를 따라 나가면 천장에 달린 문이 나온다.
그 문을 열면 하얀 알갱이에 덮인 땅이 나왔다.
케일은 그곳에서부터 은밀히 움직여 하얀 별의 뒤를 쳤다.
“…쓸데없이 똑똑해.”
하얀 별은 하얀 성 안의 비밀 통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 본래의 출입구는 알고 있었다.
‘여기에 수하들을 보내면서 하얀 별이 말했어! 혹시 모르니까 이 출구로 나오는 이들이 있는지 감시해, 라고!’
하얀 별은 제 뒤를 친 케일 일행이 어디를 통해 나왔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수하들에게 마을 출입구를 감시하라고 했을 터.
하지만 수하들은 이 문은 열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왜냐면 왕관을 지닌 자만이 이 마을의 모든 문을 관장하니까.
그리고 하얀 별은 케일이 소지하기 전에 왕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사용하여 마을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왜냐면 그에게 이 마을은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죽음의 맹세가, 저주가 그를 이곳에 닿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수하들에게 이 문 근처에서 감시하라고 한 것이리라.
‘백날 지켜보고 있어봐라. 내가 그쪽으로 나가나.’
케일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제야 최한과 라온도 뒤를 따랐다.
하지만 둘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아.”
케일은 걷다 말고 최한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네가 읽었던 글자 말이야.”
“…한글이요?”
최한이 천천히 되묻자 케일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한글이라는 거. 그 언어는 에르하벤 님의 통역 마법으로도 해석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별것 아닌 것처럼 툭 던졌다.
“나중에 좀 가르쳐 줘.”
아.
최한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에 케일이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힘들고,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그때 가르쳐 줘. 그때쯤이면 어차피 백수라서 할 일도 없을 텐데.”
케일은 제 말에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글을 모른 척하기도 힘들고, 까짓것 최한한테 배우는 척 좀 해서 나도 한글 쓰면 좋겠지. 아, 라온 이름은 안 들키게 하고.
훌륭한 계획이었다.
어차피 하얀 별만 정리하면 백수잖아? 왕세자 저하도 백수 시켜준댔으니까.
케일은 알베르의 말을 믿었다. 물론 믿든 안 믿든 그리 만들고 말 작정이었다.
최한은 잠시 입을 닫고 있다가 천천히 답했다.
“네, 꼭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나도 배운다! 나는 약한 인간보다 똑똑해서 더 잘 배운다.”
라온이 날개를 파닥이며 열정적으로 말하자 케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최한은 케일의 그 모습이 꼭 방금 전 라온이 고개를 가로젓던 모습과 비슷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다 가르쳐 드리죠.”
최정건은 한글을 누구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최한은 여기, 자신의 곁에 있는 가족들에게 기꺼이 고향의 언어를 가르쳐 주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때, 제 고향 이야기도 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최한의 방식이었다.
***
“빨리 왔네?”
버드가 성 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두 용과 비크로스, 론도 비밀 통로를 통해 성으로 돌아온 케일과 최한, 라온을 반겼다. 온과 홍은 벌써 라온의 곁으로 달려가 있었다.
“뭘 찾았나?”
고룡 에르하벤이 다가오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고룡은 라온의 행동에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우웅-
라온은 통로를 벗어나 지상으로 오자마자 영상 통신구를 하나 꺼내 들었다.
검은 마나에 감싸인 영상 통신구가 빛나며 연결되기 시작했다.
케일 쪽에서 보내는 신호였다.
이를 지켜보던 에르하벤에게 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큰 걸 찾았습니다.”
큰 걸 찾았다고?
에르하벤은 케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뭘 찾았지?”
케일은 최한을 쳐다봤다. 최한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밀 통로를 통해 성으로 돌아오는 길.
‘기록서에는 두 개의 땅 속성 힘에 대한 단서가 존재합니다.’
최한은 최정건의 기록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물론 케일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내용이었지만, 담담하게 최한의 설명을 들었다.
‘먼저 첫 번째 힘은 케일 님이 어둠의 숲 지하에서 획득하신 땅의 힘입니다. 그 힘의 주인이 바위의 수호자였습니다.’
케일은 최한에게서 시선을 돌려 에르하벤을 바라봤다.
최한은 두 번째 땅의 힘, 고대의 하얀 별이 지녔던 땅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이야기는 이미 케일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케일은 최정건의 기록 한 부분을 떠올렸다.
오로지 후대의 한국인 이방인을 위해 한글로만 남겨놓은 기록.
“인간, 연결되었다!”
고룡에게 답하기도 전, 영상 통신구가 연결되었다.
케일은 최정건이 예상하는 위치를 떠올렸다.
케일은 그곳을 안다.
로운.
케일은 영상 통신구로 시선을 돌렸다.
-…너- 너-
자다 일어난 얼굴로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이가 영상 통신구 위 화면에 나타났다.
“아.”
케일은 그제야 제 꼴을 깨달았다.
용병왕이 준 가짜 피. 입안은 헹궜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가짜 피범벅이었다.
케일은 일단 웃으며 화면 속 상대에게 말했다.
“별로 안 다쳤습니다. 멀쩡합니다.”
-…돌겠네.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의 얼굴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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