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723
722화.
“…어, 그래.”
최정건은 상당히 어색한 목소리로 케일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케일은 그가 일어선 자리에 놓인 연습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머지는 모두 다 똑같았어.’
어제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기억을 따라 보육원으로 돌아온 케일은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방은 독실이었고.’
원래 고1까지는 2명이서 한방에서 지낸다. 하지만 케일의 경우, 같이 방에서 지내던 녀석이 중간에 퇴소하는 바람에 현재는 케일 혼자서 사용하는 중이었다. 듣기로는 형편이 어려워 보육원으로 온 아이였고, 다시 나아진 형편에 아버지와 함께 원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잘된 일이지.’
케일로서는 당분간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확보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서로 아는 사이 같아 보이는데?”
도서부 부장이 케일과 최정건을 보며 건넨 말에 케일이 꽤 싹싹하게 답했다.
“제가 점심때마다 책 빌리러 오는데, 그때 자주 저 선배님이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낯이 익은 사이죠.”
“오, 그래? 너 책 좋아하냐?”
“네.”
“이야. 책 좋아하는 놈이 들어와서 다행이네. 도서부 일이 은근 힘들고 반복 작업이 많거든.”
부장은 최정건이 서 있는 데스크 쪽으로 가서 신청서를 꺼내 들었다.
“들어오는 책들마다 등록하고 바코드 작업해야 하지, 책 정리도 해야 하지, 거기다가 매일 도서실 청소해야 하지. 다들 도서부라고 하면 독서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 학교 도서부는 할 일이 많은 편이야. 축제 때도 바쁘거든. 아무튼!”
그는 김록수라고 적힌 명찰을 찬, 입학한 지 갓 한 달 된 신입생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책에 어느 정도 애정이 있어야 도서부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 이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도서부 들 맘에 변화가 있어?”
케일은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없습니다. 도서부 얼른 들고 싶은데요?”
“좋아. 바람직한 부원의 자세야.”
씨익. 개구지게 웃은 2학년 부장은 곧바로 펜과 함께 신청서를 내밀었고 케일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여기 데스크 안쪽에서 신청서 작성해. 어차피 오늘은 사람 한 명도 없네.”
오늘따라 유달리 도서실에 사람이 없었다.
“정건이 형 옆에 의자 있지? 거기 앉아서 해.”
“네.”
케일은 냉큼 답하고는 재빨리 최정건 옆 의자로 향했다.
“아.”
최정건은 멍하니 이를 보다가 이내 멈칫하며 황급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둘러 펼쳐놓은 연습장과 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장은 그 모습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형, 글 적는 거 방해해서 미안해요.”
“어? 아냐, 아냐.”
그사이, 최정건은 연습장을 덮으며 힐끗 옆을 쳐다보았다. 케일은 신청서 작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후우.”
작은 한숨이 최정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케일은 이미 보았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덮이는 연습장에서 한 단어를 보았다.
그 단어는 최한도, 로잘린도, 라크도. 어느 영웅의 탄생 인물들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특별한 단어였다.
‘로운.’
그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케일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맞네.’
이 최정건은 그 최정건이 맞다.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소설 ‘영웅의 탄생’ 저자 네란 베로우. 그 자식이 맞다.
그때, 최정건은 김록수가 슬쩍 고개를 들며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씨익.
김록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그려 보이던 환한 미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상당히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미소였다.
순간 최정건의 낯빛이 살짝 하얘지며 그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고, 김록수는 아무 의미 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저도 글 쓰고 싶거든요.”
“그, 그래?”
아니. 뻥이다.
“네. 장르 소설을 쓰고 싶은데.”
“…어떤 거?”
케일은 새삼스럽다는 듯 최정건을 바라봤다.
‘좀 어리숙한데?’
안로만의 세계에서 무기 ‘태랑’을 훔친 최정건은 안로만을 통해 듣기로는 상당히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어떠한 제재도 없이 태랑을 훔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케일 눈앞에 있는 최정건은 어딘지 모르게-
‘좀, 얼빵해 보이는데?’
뭔가 좀 서툴렀다.
케일은 분명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나아가 최한의 친척 어르신이기도 한 최정건을 향해 다시 상냥 모드가 되어 답했다. 물론 상냥 모드 참고 자료는-
‘음?’
누구더라?
누구를 참고했더라?
‘아, 맞다.’
거래를 앞둔 알베르 크로스만. 왕세자 저하의 모습을 참고한 케일이었다.
그 순간, 의자 아래 케일의 신발 밑에 노란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알베르 크로스만을 케일이 떠올린 순간, 잠시 양이 줄었다가 이내 다시금 그 양을 늘려갔다.
그러나 이를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케일은 침을 삼키며 제 대답을 기다리는 최정건에게 답했다.
“판타지요.”
판타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케일의 말에 최정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진짜?”
아니. 판타지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그걸 굳이 써봤자 뭐하겠나. 그 시간에 다른 재미난 책 보면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게 케일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였다.
“네. 진짜요.”
케일은 씩씩한 척하며 답했다.
“으음.”
최정건은 그런 케일을 약간 이상하게 쳐다봤다. 상황을 다 아는 케일은 저 눈빛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했다.
‘이럴 놈이 아닌데?’
딱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케일도 안다.
고1 1학기 때 김록수는 이럴 놈이 아니다.
싹싹함?
그딴 건 없다.
미소?
한쪽 입꼬리만 틀어 올리는 것도 미소라면 미소기는 했다.
그가 현재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해할 수가 없어.’
어젯밤 홀로 방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케일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현재 최정건은 영웅의 탄생을 쓸 이유가 없다.’
처음에 케일이 언뜻 최정건을 마주했을 때는, 케일에게 빙의할 김록수를 위해 영웅의 탄생을 쓰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생각해보면 다른 결과가 나왔다.
왜냐고?
‘지금 최정수는 살아있으니까.’
케일이 그 세계로 간 것은 최정수가 김록수 대신 죽는 것을 택해서 벌어진 일종의 나비 효과이자 죽음의 신이 차선으로 택한 대책이었다.
‘최정건이 내 주위에 있는 것은 하얀 별의 환생 여파로 영향을 받은 나를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부분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니 현재 상황에서 지금 저 글은.’
영웅의 탄생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게 맞았다.
최정건의 말대로 ‘가이드북’이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가이드북일까?
‘최정수 혹은 최한이겠지.’
현재 최한은 그쪽 세계에서 싸우는 중일 것이다. 원래의 케일 헤니투스가 회귀와 김록수로 빙의하기 전일 테니까.
‘흐음.’
이것으로 한 가지 더 알 수 있다.
최정건은 그간 보지는 못했지만, 최한과 최정수를 위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죽음의 신과 모종의 협력 관계를 구축한 건가?’
그때,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썼어?”
“아, 네.”
“어디보자. 잘 썼네.”
부장은 케일이 건넨 신청서를 확인하고는 곧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넵.”
싹싹하게 답하는 케일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부장은 곧 들려오는 소리에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한 학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 있었냐?”
“왜?”
그는 부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담임이 너 부른다.”
“아, 진짜?”
부장은 그 말에 난감하다는 듯 케일을 쳐다봤다. 한발 늦게 가입한 케일에게 도서부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최정건을 바라봤다.
고2 겨울 방학 직전에 전학 와서 바로 도서부에 가입하기를 원한 조금 특이한 선배, 최정건. 그는 부장의 간절한 시선에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와. 내가 설명해줄게.”
“오! 감사합니다, 형! 김록수, 정건이 형 설명 잘 들어라.”
“네.”
“나중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어!”
부장은 곧 그를 찾아온 친구와 함께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지만, 케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데스크 안쪽을 둘러보았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최정건이었다.
“너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 줄 알았는데.”
“저요?”
“어. 책 빌리러 왔을 때 보면, 좀-”
말끝을 흐리는 최정건에게 케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좀 싸가지 없어 보인다?”
“아니, 뭐, 많이 그렇다는 소리는 아니고.”
“조금은 그렇다?”
“아니, 아니!”
격렬하게 부정하던 최정건은 곧 김록수의 차분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저도 글에 관심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말 걸어보는 거죠. 제 성격에 나름 용기 내서.”
“아.”
최정건은 잠시 탄성을 흘리더니 이내 케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떤 판타지 소설 쓰고 싶어?”
음.
케일은 지난 몇 년간 겪었던 일들을 토대로 나오는 대로 뱉었다.
“음, 제 나이쯤에 차원 이동한 놈이 영웅 되는 이야기?”
움찔. 최정건이 멈칫했다.
케일은 이를 모른 채 허공을 보며 생각나는 것을 말했다.
“동료로 마법사랑, 으음, 수인족 하나 나오고. 그다음에 드래곤도 엮이고. 나라의 왕세자랑도 함께 일하고.”
움찔. 움찔. 최정건은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이며 연신 손바닥을 무릎에 비벼댔다.
이쯤 되자 케일은 알아챘다.
‘얘 진짜 어수룩한데?’
최한, 최정수 조상 맞아?
영 다른데?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래? …주인공은 검사고?”
“네. 검사.”
케일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리고.”
최정건은 케일의 목소리에 누가 보아도 귀 기울이는 자세였다.
“그리고, 웬만하면 주인공도 주인공 동료들도 고생 별로 안 하고 시원시원하게 하고픈 일 다 하면서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순간 최정건이 케일을 바라봤고, 케일은 그 눈을 마주하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이야기가 좋잖아요?”
최정건은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그는 휙 케일의 시선을 피하더니,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가 좋지. 정말로.”
“그렇죠. 정말로.”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케일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최정건에게서 시선을 떼어 데스크 쪽에 놓인 서류를 몇 가지 뒤적였다. 이왕지사 도서부가 된 김에 여기 머무르는 동안에는, 제대로 부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동아리 활동은 살면서 처음이었으니까.
‘이런 시험도 나쁘지 않은데?’
케일의 발끝에 맴돌던 노란 가루가 조금 더 양이 많아졌다.
그때였다.
“너-”
최정건이 입을 열었고.
딩동딩동-
예비종이 울렸다.
그 소리에 그는 결국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가 그, 주말에, 그, 행사를 하나 아르바이트로 갈 건데 말이야.”
행사?
갑자기 무슨 소리지?
케일이 의아해할 때, 최정건은 케일을 쳐다보지 않고서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나라 과거 무술에 대한 행사야. 검술 파트도 있어.”
검술.
그 순간, 케일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니, 한 가문이 떠올랐다.
최씨 가문.
그리고 케일처럼 고1 17살일 이곳의 최정수.
“너도 갈래? 너 하나쯤은 구경꾼으로 데려갈 수 있어.”
최정건이 그리 말하는 순간, 케일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배는 거기 왜 가는데요?”
네가 거길 왜 가냐?
그는 돌아올 최정건의 뻔한 답을 알았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볼 사람들이 있어.”
최정건은 그리 말하고는 케일을 바라보았다.
“너도 가면 좋을 거다.”
그래, 좋겠지. 당연히.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 고민하지 않은 척 답했다.
“좋죠!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안 그래도 할 일이 따로 없었거든요.”
케일은 최정수에 대해 생각하며 대충 답했다.
“심심할 것 같았는데, 잘됐네요.”
참고로 케일은 심심함을 좋아했다.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정건은 멈칫하더니 그런 케일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케일은 이를 몰랐고, 최정건은 깔끔하지만 삐쩍 마른 김록수의 모습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는 케일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운명도 모르고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17살치고는 삭막해 보이는 눈빛의 김록수를 담았다.
최정건이 꽤 힘을 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행사 끝나고 너 글 쓰는 데 도움 될 만한 것들 몇 개 보여줄게.”
음? 갑자기 왜 이리 적극적이야?
케일은 달라진 최정건의 태도에 왜 이러나 싶었지만, 같이 있을수록 주워 먹을 정보가 많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수 안 보는 거면 별로 안 당기는데.’
물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검술 구경도 도움이 되겠지만, 다양한 걸 보는 게 글에는 중요해. 연극이나 영화 촬영이나.”
뭔가 이상한데?
케일은 검술에서 갑자기 연극이나 영화 촬영으로 바뀌는 대화 주제가 참 갑작스럽다 싶었다.
‘어?’
그러다가 문득 하나 깨달았다.
‘영화?’
한 사람이 문득 떠올랐다.
이수혁 팀장.
액션 배우를 지망하다가 무명으로 끝나버린 사람.
‘설마?’
케일이 의아한 눈빛으로 최정건을 바라보자 최정건은 그 눈빛을 피하며 답했다.
“아무튼. 내가 재미난 것들 보여줄게. 그냥 따라만 와. 내가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케일은 그 모습이 상당히 의미심장해 보였다.
“분명, 언젠가. 언젠가는 너에게 그 일들이 글이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이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역시나 내뱉는 말도 의미심장했다.
마치, 케일의 미래를 안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미리 최정수와 이수혁을 스치듯 이라도 만나게 해주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 봐라?’
최정건은 미래를 볼 줄 아는 건가?
어떻게 케일과 최정수, 이수혁의 미래 관계를 아는 것이지?
그 순간, 최정건이 무언가를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운명의 실은 언젠가 얽히기 마련이지. 무슨 결과를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케일이 못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고 한 말이겠지만, 지금의 케일은 고1 김록수도 아니고. 대강 알아들어 버렸다.
‘오.’
단생자 최정건은 미래가 아니라 ‘운명의 실’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케일과 최정수, 이수혁이 얽힐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결과는 모른다?’
엮인 운명의 결과는 모르는 듯싶었다. 하긴 그러니 최정수가 케일 대신 죽는 것을 내버려 두었을 것이리라.
케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책 구절입니까?”
“…아니. 아무튼 갈 거지?”
“네.”
케일은 그리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수업이었으니까. 그는 꽤 착실한 학생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케일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나쁘지 않네.’
권태에 대한 시험 중이었지만, 이번 환상은 꽤 재밌었다.
이 환상은 케일의 과거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케일의 행동에 따라 과거가 달라졌다. 그러니, 지금 그가 보는 것들은 실제 그의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일 확률이 높았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만날지도 모를 무명의 이수혁, 검술 행사에 참여하는 최씨 가문 사람들.
모두 실제 과거일 확률이 높았고, 다만 케일의 행동 변화로 인해 케일이 이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다르네.’
행동이 달라지는 만큼 그 삶이 달라졌다.
케일은 반가움과 함께 왠지 모를 씁쓸함이 들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스스스-
노란 가루가 발에서 그의 무릎까지 차오르며 흩날렸다.
***
짜악!
뺨이 손자국을 따라 벌겋게 물들어갔다.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내리친 로잘린. 그녀의 눈동자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해 있었다.
꽈악. 그녀는 두 손으로 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전까지 화목하기만 하던 정원으로 향해 있었다.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작고 오동통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10살 무렵. 로잘린은 그때로 돌아왔다.
왕궁 안에서 동생들과 뛰놀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그때 그 시절.
“이 시험 상당히 위험해.”
로잘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잊어버릴 뻔했어.”
그녀는 천천히 읊조렸다.
“마탑, 최한, 케일 공자, 라크, 라온 님……”
하나하나 그녀에게 소중한 것들을 힘주어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 그녀는 보지 못했지만 노란 가루가 흩날리며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이런 시험일 줄이야.”
어린 로잘린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권태.
이 시험은.
“평온한 과거에 머물게 하며 현실에 대한 싫증을 느끼게 하는 것.”
‘슬픔’ 시험 때와 달리, 이 시험은 과거의 권태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반대였다.
이 시험은 환상 밖 현실을 권태로 느끼게 만드는 것.
그래서 이 평온한 과거를 마음에 들어할수록, 이 평화를 반길수록.
“현실로 돌아가기 싫어지게 만들어.”
로잘린은 이 평온한 때를 꽤 반겼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는 과거이고, 환상은 환상일 뿐.
그녀의 현실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지금 그녀의 현실이 전쟁과 싸움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그녀가 손에 넣고 싶은 미래와 지키고 싶은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험은 과거의 평온을 반가워할수록 ‘강제적으로’ 현실에 ‘싫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위험해.”
로잘린은 그 탓에 현실을 순간 잊을 뻔했다.
‘포기할까?’
일단 포기하고 나가서 대책을 세우고 시험을 다시 진행할까?
‘…아냐.’
그녀는 케일 공자를 안다.
케일이라면 포기 대신 혼자서 이 시험을 끝까지 치르려고 할 터.
안 그래도 이미 듣지 않았던가?
처음에만 포기를 외치고 그다음부터는 혼자서 다 할 작정이었다고.
‘…두고 갈 수 없다.’
케일 공자를, 그런 케일 공자를 따라갈 동료들을 두고 포기할 수 없다.
“나아가야지.”
그녀가 그리 말하는 순간, 그녀의 주위에 있던 보이지 않는 노란 가루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들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로잘린은 시험을 치르고 있을 동료들을 떠올리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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