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36
36화.
36화
놀라움으로 커진 그의 눈을 보며 서진은 등을 돌렸다. 뉴욕 5번가, 가장 화려한 백화점에서 주위의 시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녀는 내달렸다. 서진의 귀에 간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곤충의 날갯짓처럼 파고들었다. 서진은 재킷 앞섶을 잡았다. 가슴에 보스턴의 겨울바람이 휘날렸다.
“서진아! 서진아!”
마치 지금 잡지 않으면 영원히 놓칠 것만 같았다. 이제 한국으로 귀국하면 천천히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옆에 지희가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은 그녀의 모습을 정신없이 뒤쫓는 기훈의 머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5년 전 바보처럼 맥없이 놓칠 수밖에 없었던 서진을 붙잡아야 한다. 기훈은 서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서진의 어깨가 가쁜 숨으로 크게 오르내렸다. 끝내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벙긋하지도 않는 서진을 돌려세웠다.
“서진아.”
“……오랜만이에요.”
서진은 기훈의 얼굴을 설핏 보며 우물거리듯 인사하였다.
“어떻게 여기, 여기 다시 있는 거지 한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
“출장.”
반사적으로 대답한 서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아요 한국에 있는 건 아, 미안해요.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죠.”
서진은 아직도 잡혀 있는 그녀의 몸을 조용히 빼어 냈다.
“그럼 가 볼게요.”
기훈을 뒤쫓아 다가선 여자를 향해 눈을 잠시 맞춘 서진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서진아, 잠시만.”
“아니요. 그냥 갈래요. 일행도 있으신 거 같은데.”
지희에게 눈길을 주는 서진을 보고서야 기훈은 정신이 든 듯 지희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려 버린 지희의 얼굴도 기훈의 조급증이 차오른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나 한국으로 가. 너, 찾을 거라 했었던 말 기억해 ”
“선배.”
기훈을 담는 서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가 찾을 거야. 기다려 줘.’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려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던가. 몇 달 전만 해도 씁쓸하게 되씹던 말이 이제는 바윗돌같이 무거운 무게로 서진의 가슴을 짓누른다.
“저는, 처음에도 지금도 그 말 믿지도 기억하지도 않아요.”
가슴 한 귀퉁이가 훤해 왔지만 서진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
복도에는 각계에서 보내온 화환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공간적 이유로 방에 다 들어가지 못한 화환들이다. 화환 사이를 걸어가며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한혁이 상무실 문을 열었다. 벌떡 일어서는 비서 두 명을 보며 가볍게 목례만 건넨 한혁은 안쪽으로 난 문을 열고 화환과 난 화분으로 벽면이 둘러싸인 널따란 사무실로 들어섰다. 훅 끼쳐 오는 뒤섞인 꽃향기에 어지럽다. 상무이사 최한혁이라는 자개 글자가 선명한 명패를 한번 쓸어 보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울리는 전화를 몇 통 받다가 한혁은 비서에게 인사 전화를 연결하지 말라는 지시를 남기며 진 이사를 호출했다.
“상무님, 부르셨습니까 ”
한혁은 진 이사에게 자리를 권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색하네요.”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머리에서 적절한 대답을 찾기 전에 나온 말이었다. 상무실에 앉은 한혁을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 이사는 무안한 기분으로 괜스레 나오는 마른기침을 손으로 가렸다.
“진 이사님, 인수 건 관련해서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걸로 기억됩니다만 회장님께도 긍정적인 답을 받은 상태라 이제 추진해 보려 합니다.”
타깃 커스터머(target customer)가 소득 수준 상위 20%인 대도시 지역의 젊은 고객인 세림백화점은 분점을 늘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된 시장과 경영 환경을 고려할 때, 예전 최석원 부회장이 재임하던 시절부터 분점을 확충하여 다른 고객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 최 부회장이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떠난 사안을 한혁이 다시 추진해 보려는 것이었다. 물망에 오르는 백화점은 수도권 소도시에 본점이 있고 분점 두 개를 가진 작은 지방 백화점이었다. 한혁의 구상은 자금난을 겪고 있는 부평백화점을 인수하여 그곳에 세림의 상설 아울렛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세림의 재고 물량뿐 아니라 삭스백화점의 제휴를 통해 가능하다면 조인트 아울렛을 런칭하는 것이 현재의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였다. 진 이사는 그의 말에 조금 고민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훌륭한 생각이시지만…….”
“내부 반발이 예상되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생각이죠.”
한혁이 그의 말을 대신하자 진 이사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한혁을 보았다.
“저는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으려 합니다. 물론 그만큼 리스크도 커지겠죠. 이번 기회를 통해 잡음을 가라앉히고 내부 정리도 시작합니다. 제대로 안 되면 제가 정리되겠죠.”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는 한혁의 말에 진 이사가 마치 손이라도 저을 듯이 황급히 부정했다.
“아니, 무슨 말씀을.”
“조직의 변화와 혼란은 길수록 좋지 않습니다. 미적미적하다가는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되겠지요. 저는 베팅을 하려 합니다.”
진 이사는 다른 사람이 된 듯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한혁을 올려다보았다.
“도와주실 건가요 ”
한혁의 매력적인 웃음을 보며 진 이사는 심지 굳은 대답을 했다. 빠른 시일 내에 최대한 조용하게 전담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할 계획을 세우며 진 이사는 상무실을 나섰다. 향후 권력 구도 따위야 상관없었다. 이십 년도 훨씬 전에, 청년이었던 자신의 눈도 잘 못 맞추며 내민 손을 어렵게 잡던 꼬마 아이가 세림에서 당당하게 서는 모습을 목을 내놓고서라도 돕고 싶었다.
***
출장을 마치고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서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비어 있는 한혁의 자리, 보지 않으리라. 아니, 담담하게 눈에 담으리라. 네모난 초콜릿 상자를 그러쥐었다.
“다들 잘 계셨죠 이거 드세요.”
“아, 팀장님. 잘 다녀오셨어요 ”
밝은 인사 소리에 사람들 역시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결국 깨끗하게 비워진 한혁의 자리에 서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그거 아시죠 저 한혁 씨, 아니 상무님요.”
서진은 빙그레 웃으며 초콜릿 상자의 비닐만 벗겨 냈다.
“너무했죠. 다들 한동안 패닉이었어요.”
“……네.”
“우리 팀, 뭐 잘못하거나 찍힐 만한 말 한 거 있는지 자아비판, 자기 검열하느라 머리 터지는 줄 알았어요. 저 뭐 잘못한 거 있었나요 ”
영석 씨를 향해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제 기억으론 없어요.”
“우리 회식 하고 그럴 때 회사 뒷담화 했는지 다들 모골이 송연.”
“그랬다 해도 별 상관 안 하실 거예요. 그런 말도 들어 보려고 평사원으로 있었을 테니.”
서진은 초콜릿 상자를 벌려 사람들 사이에 두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컴퓨터를 켜고 화면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손가락은 별 의지 없이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렸다. 출장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려 막 빈 문서 하나를 열었을 때 데스크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윤서진입니다.”
-윤서진 팀장님, 최한혁 상무님이 찾으십니다.
비서의 낭랑한 목소리는 그의 직함을 여지없이 확인해 준다. 입안이 싸해 왔다. 서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이지 색 스커트 사이의 다리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녀의 가슴도 더 이상 세차게 뛰지 않았다. 가만히 움직이는 다리, 정적 속의 복도 그리고 상무실이라 적힌 방의 묵직한 문은 조용히 열렸다. 비서들에게 나직한 인사를 건네고 톡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 ‘네.’ 답하는 그의 음성. ‘상무님, 윤서진 팀장 왔습니다.’ 비서의 목소리. 이제 상무 자리에 앉은 그를 확인하는 것만 남았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 또렷한 이목구비, 한혁은 커다란 책상에 앉아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서진을 보았다. 비서가 나가며 문이 닫히자 서진은 툭툭 커다랗게 뛰어오르는 심장을 누르며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잘 다녀왔어 ”
“네, 상무님.”
반가움이 서리던 한혁의 눈동자가 금세 가라앉았다.
“회사라 그래 ”
서진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 도착했어 ”
“어제 오후에 도착했습니다.”
“전화 계속 꺼져 있던데. 로밍도 안 했어 ”
윤이 나는 명패에 박힌 그의 직위, 상무이사 최한혁. 이름자가 크게 물결치듯 일렁였다.
“거의 일주일 만인데 얼굴도 안 보네. 나 안 보고 싶었어 ”
붙박은 시선이 못마땅한 듯 한혁은 일어서 서진에게 다가섰다. 습관처럼 그녀의 팔에 손을 올리자 서진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출장 보고서는 오전 중으로 제출하겠습니다. 파트너십 가능성에 대해서 의견을 타진해 봤습니다.”
“윤서진 ”
“네, 상무님.”
이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
“상무님 되신 거 축하드려요. 미력하지만 제가 할 일이 있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한혁은 서진의 팔을 아프도록 휘어잡았다.
“놓으세요.”
“너 왜 이러는 거야.”
잡힌 팔에서 시작된 묵직한 압력이 심장까지 눌러 왔다.
“한혁 씨, 놔 줘.”
조용히 풀어 주자 서진은 얕은 숨을 내어 쉬고 말했다.
“생각 많이 했어. 출장 가서도 줄곧 생각했어. 내 결론은 아니라는 거야.”
“서진아.”
“난 재투성이 신데렐라 따위, 동화로도 취미 없었던 사람이야. 차라리 독 든 사과를 먹고 콰당 하는 멍청한 백설공주를 더 좋아했어. 나, 나대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았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입겠다고 당치도 않은 자리를 꿈꾸겠어.”
한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먹은 거야. 그날은 뭐였어, 너.”
“한혁 씨가 그랬잖아, 그날은 내 애인이라고. 그날까지였어. 이젠 아냐.”
차갑게 떨어뜨린 말에 한혁의 눈이 밤바다보다 더 깊어졌다.
“제대로 대답해. 나를 이해시켜. 넌 분명히 말했어. 내 옆에 있겠다고!”
“……지금 옆에 있잖아. 무엇이든 상무님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몸 바쳐 일할 수 있어. 난 세림도 당신도 떠나지 않아. 세림 윤서진 팀장. 그대로야. 그뿐이야.”
작정한 듯 준비한 말을 또박또박 내질렀다. 심장이 저려,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소원한다.
“무슨 소리야.”
한혁이 서진의 어깨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이해 못하겠어. 다시 말해.”
“이제 너, 남자로 관심 없다고.”
한혁은 서진의 가느다란 턱을 잡아 올려 비트는 얼굴을 고정시켰다.
“나를 쳐다보고 말해.”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다. 단단히 먹은 마음이 깨어지는 도자기처럼 균열이 시작되었다. 애써 누르는 눈물 대신 꼭 다문 입술 대신 턱이 가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최한혁 너 이제 내 애인 아니야. 그날 이후, 마음 정리했어.”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이야. 마음은 변해.”
서진이 턱을 잡고 있는 한혁의 손을 세차게 걷어 냈다.
“서진아!”
한혁이 양어깨를 움켜쥔다. 몸이 맥없이 흔들린다. 이대로 눈을 감고 싶다. 영원히 사라지고 싶어. 가루가 되어 날려 버리든, 바닥이 갈라지든, 하늘에 구멍이 생기든. 부질없는 바람을 밟고서 서진은 현실을 향해 눈을 똑바로 뜬다.
“부탁이야. 나 세림에 있게 해 줘.”
“제발, 윤서진.”
“뉴욕에서 다시 오라고 제안 받았어. 갈까 ”
한혁의 눈에 핏발이 선다. 뜨거운 분노로 일렁이며 서진을 바라본다.
“아님, 내가 너 피해서 지구 끝에라도 숨어야 하니 ”
“그럴, 작정이야 ”
“네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면, 내가 선택할 여지가 달리 뭐가 있을까.”
한혁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젓는다.
“협박이야, 지금 ”
“아니, 나 여기서 버티고 싶어. 이제 도망가지 않고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이겨 내고 싶어. 그래야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 나 보기 싫겠지만, 도와줘, 한혁 씨.”
아무리 태연하려 노력해도 입술이 떨리고 턱이 떨린다. 한혁은 한동안 말없이 서진의 눈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손을 뻗어 턱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시간을 줄게.”
“나는…….”
한혁이 오만하게 서진의 말을 자른다.
“기회도 줄게.”
“무슨.”
“나를 믿을 수 있는 기회. 나를 어떤 사람과 같은 취급 하지 마.”
한혁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무슨 소리야 ”
“하나 더, 세림과 나를 위해 일할 기회를 줄게. 윤서진 팀장, 테스크 포스팀으로 배정될 거야. 나 좀 도와줘.”
“어떤 사람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윤 팀장, 이제 가 봐. 나 회의 들어가야 해.”
한혁이 서진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책상 위 자료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