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8
8화.
8화
기훈의 도움을 받아 국산 중형차에 편안하게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도 그에게서 나던 향이 맡아졌다.
“발목은 어때요 ”
퍼뜩 정신을 차려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기훈을 마주했다.
“모르겠어요. 좀 욱신거리는 것 말고는 괜찮은 거 같은데.”
“여름에 공부하기도 힘든데 빨리 나아야 할 텐데요.”
“뭐 팔목이 다친 것도 아니니 공부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좁은 공간에 같이 있다는 어색함 때문에 서진은 건성건성 대답하며 안경을 벗었다. 바보처럼 흘린 눈물로 얼룩진 안경을 꼼꼼하게 닦았다.
“안경 빼니까 더 예쁘네. 안경 하고 있을 때도 분위기 있고 예뻤지만.”
“저 그런 말에 속을 만큼 멍청하지 않거든요.”
서진이 가느다란 턱을 들며 기훈에게 말했다.
“예쁜데, 안 믿네.”
그는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약간 달아오르는 서진의 얼굴은 운전하느라 못 봤는지 기훈은 말을 이었다.
“교수님 댁이 어디죠 ”
“이태원 하이아트 뒤쪽요.”
“어, 잘됐네. 저희 집은 한남동인데, 가깝네요.”
집으로 오는 동안 무엇이든 대답을 할 때마다 기훈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유치원생 재롱에 맞장구를 치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저 원래 그렇게 덤벙대고 넘어지고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
선한 눈이다.
“신세를 많이 지기는 하지만 너무 덜떨어진 애 취급은 사양하고 싶어요.”
“알았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기훈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 탓이 아닐 거야. 사회대가 터가 세거든.”
“……네 ”
“사회대 건물 저기로 올릴 때 말이 좀 있었다던데. 뭐 믿을 소린 아니지만.”
“그래요 ”
호기심 어린 질문에 그는 장난처럼 대답했다.
“암튼 터가 세서 안 좋은 일들도 가끔 생기고. 여름이면 그 안 좋은 기가 더 기승이라니 그것 때문일 거야, 넘어진 건.”
“말도 안 돼요.”
“정말. 그리고 너의 옷 색깔.”
서진은 흰 셔츠 아래 편하라고 별생각 없이 입었던 핫핑크 무릎길이 면 반바지를 보았다.
“붉은 톤이잖아. 그 기를 피하려면 푸른 톤으로 입어야 한다더라구. 붉은 톤은 그 기를 더 자극한다던데.”
서진이 진지한 농담에 풋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웃는구나.”
기훈은 서진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촌스런 나의 바지 덕분에 이렇게 발목을 삐끗했네요.”
“나라도 눈이 시리도록 파란 옷을 입고 왔으면 비끗하기 전에 잡아 줬을 텐데 말야.”
서진이 까르르 웃었다.
“그 안 좋은 기 덕분에 사회대 커플은 다 깨진다더라고. 그러니 사회대에서 연애하려면 푸른 옷을 입어.”
“아우, 엉터리. 전 그런 거 안 믿어요.”
“여기 우리 학교 경제학과로 오면 꼭 푸른 옷을 입고 만나자.”
가벼운 농담인데, 머리는 그렇게 말하는데 가슴은 다른 말을 했다.
푸른 옷을 입고 만나자…….
서진이 경제학과에 입학할 무렵 기훈은 군대에 가 있었다. 경제학과의 염원은 아버지 영향이다. 기훈 때문에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진은 사회대 건물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의 빛으로 환해졌던 건물 정문을 볼 때마다 정기훈을 기다렸다.
대단한 열녀 아닌가. 푸른 옷을 입고 만나자던 그 말 한마디에 이런 정조를 보이다니.
서진은 제가 짚었던 계단 난간을 쓸어 보았다. 기훈이 왕자처럼 무릎을 구부린 채 저를 바라보던 2층 네 번째 계단에 서서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기훈의 말대로 안경을 벗었을 뿐 별다른 멋도 부리지 않았지만 서진은 대학 1학년 중반이 넘어가면서 늘씬한 몸매와 깨끗하고 단정한 이미지로 주목 받는 여학우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럼에도 서진은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매일같이 사회대 도서관, 언제나 정해진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에게 뭔가를 전해 주는 남자들을 한심한 눈으로 쏘아보거나 때로는 ‘이게 뭐죠 ’ 퉁명스런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려 버리는 일들이 몇 번 반복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저기요.’ 하고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는 일도 없어졌다. 외모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남자에게 호소하는 약하고 나긋한 여자의 무기란 처음부터 윤서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2학년 신학기가 시작될 무렵, 기훈은 사회대 도서관에 들어서다가 마주친 서진을 한눈에 알아봤다.
‘너, 혹시 ’
서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아, 여기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더 예뻐졌구나. 윤서진!’
기훈이 정확하게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은 더 이상 재미없는 투로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따뜻한 정기훈의 웃음에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여자의 수줍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푸른 옷을 입고 연애해야 했다. 사회대의 터가 세다는 전해지는 말을 무시해서는 아니 되었다. 안 좋은 기가 분명 있었나 보다. 그리고 서진에게는 유달리 질기기도 했다. 다섯 해가 넘도록 아무도 모르게 하던 연애가 보스턴까지 와서 처참하게 박살 났으니.
안녕, 보스턴,
안녕, 정기훈,
안녕, 하버드 경제학 박사 따위.
5년의 세월을 보스턴에 남기고, 서진은 돌아섰다.
***
택시가 이태원 도로를 지나 차량 두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두 블록쯤 지나면 약간 넓고 평평한 길이 나온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웅대한 집 맞은편으로 자리 잡은 아담한 사이즈의 집 앞에 택시가 멈추었다.
“감사합니다.”
택시 기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굉장한 동네에 사시네요.”
“아, 동네만요. 저희 집은 제일 작고 오래되고 제일 꺼졌죠.”
서진이 거스름돈을 챙겨 받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택시에서 내려 사람 키 두세 배는 되는 높은 담 너머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백 미터는 족히 넘는 길이로 둘러친 담벼락에서 눈을 돌려 소박한 석상이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제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진의 허리 높이의 석상에는 오래된 이끼가 군데군데 내려앉았다. 얼핏 보면 신장 같기도 하루방 같기도 한 석상은 웃는 노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석상이 대문으로 들어서는 석판 한쪽에 자리 잡은 건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이다. 서진은 집 앞을 지키는 세월 동안 조금씩 닳아 버린 얼굴을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는 빈손으로 혈혈단신 월남해서 오로지 가족을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하였다. 석상은 서진이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어딘가에서 구해 오신 것이라 들었다. 돌아가신 지 오래라 뵐 수 없는 할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서진은 석상에 손을 올리곤 했다. 손끝에 온기가 스치는 듯한 느낌은 착각이 아닐 테다. 대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삑’ 하는 부저음에 이어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오래된 대문을 밀어 젖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검은색으로 칠한 철문은 아래위로 드문드문 삭아 녹슨 흔적이 확연하다. 군데군데 설치된 감시 카메라와 보안 요원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골목이다. 대단한 이웃을 길 건너에 둔 까닭에 보안 하나는 확실하게 거저 얻고 있었다.
서진은 자그마하지만 가족들의 손길로 정성껏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서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루청에서 삐거덕삐거덕 작은 소리가 났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
축 처진 어깨로 2층으로 곧장 가려는 서진을 엄마가 불러 세웠다.
“윤서진, 너 술 마셨냐 ”
“네.”
“잘했다. 너 아버지 보시면 또 한 소리 듣겠구만.”
“아버지 오셨어요 하긴 김소양 여사 옷차림을 보니 말야, 오셨을 거 같은데 ”
소양은 고운 홈웨어 원피스 차림이었다.
“어머, 얘는.”
“아니면 엄마가 왜 이러고 있겠어. 서훈이 티셔츠에 바지 입고 있어야지. 그치 ”
“얘, 나 우아하게 살기로 했거든. 이제 이러고 있을 거다, 집에서도.”
“못 믿어. 암튼 엄마의 그 이중성은 나한테 몰빵 왔다구. 서훈이랑 서연 언니한테는 한 방울 튀지도 않았어. 그치 엄마 덕에 난 완전 우아랑은 담 쌓았어.”
“애걔걔. 뭐냐, 또 불평이냐. 언제는 지만 못나게 낳았다고 구박이더만. 암튼 나와 네 아부지의 수려한 외모에 네가 딸리는 건 사실이지. 암.”
왜 또 외모 불평은 하지 않느냐는 듯 김 여사가 가재미눈을 했다.
“아! 됐어, 왕비병 마님. 이제 외모 불평은 졸업했다니까.”
“참, 말은 잘한다. 졸업이란 단어를 올리고 싶어 ”
졸업, 제가 생각해도 뻔뻔스러웠지만 그래도 이제는 농담처럼 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
“아직. 좀 있으면 오실 거야.”
“그럼 난 빨리 올라가 잠자면 되겠네.”
서진이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여전히 아버지가 불편한가 보다. 딸의 뒷모습을 보는 소양의 마음이 무거웠다.
서진이 5년 전 하버드 경제학 박사 과정을 그만두고 잠적해 버렸을 때 집에서는 큰 소동이 났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뉴욕 매장에서 서진이 점원 일을 하다가 다음 주부터 마케팅 부서로 발령 난다는 기함할 일보다 서진의 반응은 더욱 기가 막혔다.
‘저 경제학 공부 싫어요. 안 해요.’
‘무슨 당치 않은 소리야!’
윤 교수의 음성이 끝까지 올라갔지만 서진도 만만치 않게 소리를 높였다.
‘잘렸다니까요.’
‘뭐 잘려 그럼 트랜스퍼하면 되잖아!’
서진은 고개를 돌렸다.
‘싫어요. 다시는 경제학 서적도 안 봐요. 근처도 안 갈 거예요. 아빠, 나 원래 경제학 싫어했어요. 억지로 했다고요. 지금까지!’
서진의 아버지는 그때부터 두 해가 넘도록 서진과 연락을 끊었다. 고집은 윤 교수를 그대로 닮은 둘째 딸 서진이 뉴욕 최고급 백화점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둘의 지루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소양은 지금도 그 시절만 생각하면 갑갑증이 나듯 숨이 턱 막혀 온다. 원체 자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없는 성격 탓에 그저 겉으로나마 무던하게 서진을 볼 수 있었다.
뉴욕으로 가기 전, 서진의 말대로 학교에서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결국 논문자격시험에서 완전히 탈락도 아니었고 성적도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 찾아간 뉴욕, 딸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 윤 교수는 펄펄 뛰며 어떻게든 다른 학교로라도 밀어 넣겠다, 불호령이었지만 소양의 눈에 비친 서진은 제가 알던 그 딸이 아니었다. 죽도록 공부하면서도 언제나 눈에 빛이 나던 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 주워 담을 그릇조차 없는 텅 빈 눈이었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차마 담을 길 없어 막막한 얼굴이었다. 눈물조차 말라 버린 딸을 보며 소양은 돌아서서 혼자 오랫동안 울었다.
윤 교수를 먼저 돌려보내고 별말 없이 며칠을 서진 곁에 머물렀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둘은 낡은 카우치에 나란히 앉아 힘든 이야기를 쉽게 시작했다. 소양은 속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누르며 쾌활한 음성을 냈다.
“그만둬라. 그깟 공부 하면 뭐 하고 교수 되면 뭐 한다니. 하나 좋을 거 없다.”
“……엄마.”
“다 필요 없어. 그냥 너 행복하면 그만이야. 하버드 그런 거 난 소용없어.”
딸의 붉어진 눈에 가슴이 저려 왔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너 죽어라 공부하며 고생시킬 맘 없어. 그리고 그깟 거 버려.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
“엄마 ”
소양은 서진의 놀란 눈을 피했다.
“나쁜 자식. 내 자식 눈에 눈물 내는 놈, 피눈물 나게 할 테니까.”
“엄마 아니에요. 뭐 잘못 알고 있어요.”
“너, 나도 속일래 차라리 하늘을 속여. 정기훈, 그놈이 연락해 왔다. 너 여기 있다고.”
서진의 낯빛이 하얘졌다. 소양은 서진의 얼굴을 보며 예감을 확신했다.
“죽을 표정으로 집에 찾아왔더라. 나만 보고 갔어. 기막혀서,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
“엄마, 그 사람 잘못 아니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소양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만둬라. 너네 둘 이상한 거 예전부터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어. 어떻게 왜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랬겠지. 그런데 공부는 왜 그만둔대 다른 데 가서 하기도 싫은 거야 ”
서진은 주먹을 움켜쥐고 무릎에 둥글게 비벼 댔다.
“……엄마, 나…… 경제학 책도 볼 수 없어. 그래프 하나도 못 읽어. 그러면 그 사람 생각에 죽을 것 같아.”
“어이구, 못났네.”
소양은 서진의 등짝을 후려쳤다.
“난 애초부터 네가 박사니 뭐니 죽을 고생 하는 거 싫었던 사람이야.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냐 그리고 박사 받는다, 교수한답시고 너 처녀로 늙어 죽을까 걱정이었어. 유학 가 교수하며 혼자 늙어 가는 잘난 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네 아부지 못 이룬 꿈 이룬답시고 딸 하나 말려 죽여 늙힐까 봐 걱정이었는데 공부치운 거는 좋아. 힘들어 그랬다 해. 근데 뭐 생각 그놈 생각이 나서 공부를 못해 어유, 못났어.”
“미안해요.”
서진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만하자. 기왕 치운 공부니 그만하고. 다시 언제든, 진정으로 하고 싶을 때 시작해.”
소양은 고개 숙인 서진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후우,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죽어라 책만 파던 아이가 놓쳐 버린 꿈에 대한 상실감이 저보다 덜하랴 싶어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