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7
7화.
7화
“핸드폰 LT 거던데. 세한이 아니네.”
“아, 그거 세한이 좀 더 비싸거든. 세림 직원은 세한 거 써야 된다는 법도 없고. 비록 내가 세림 밥을 먹지만 말야. ‘세림은 세한그룹으로부터 분리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반년 전, 세림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때 들었던 말이야.”
씁쓸한 표정을 감추며 서진은 한혁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너머 벽을 응시하였다.
“세한, 싫어하나 ”
한혁은 피하려는 시선을 다시 잡았다.
“뭐래, 내가 세한이 싫고 말고가 어딨어 그냥 우아, 세한 기업 계열로 가는구나, 흥분하는 나한테 세림 측에서 한 말이지.”
서진은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세한그룹, 정기훈…….
박사 과정을 그만둔 일도 그와 관련이 있는 걸까. 한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나가지.”
“어, 응.”
서진이 서둘러 핸드백을 집어 들면서 따라 일어섰다. 서진이 계산을 하려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지만 이미 계산은 끝난 후였다.
“내가 했어.”
“응 왜 내가 사기로 했잖아.”
한혁이 삼겹살집 문을 잡고 선 채로 고개를 까닥했다.
“아무래도 오늘 고생은 여기 저녁 한 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러게, 더 좋은 음식점으로 가라니까.”
서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한혁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멀리 움직이기에 너무 피곤했어.”
“그럼 다음에 근사한 곳에서 살게.”
“아하, 새로 오픈한 세림백화점 버거집 ”
“아니라니까!”
서진이 한 발로 바닥을 탁 굴렀다.
“난 빚지고는 못 살아. 은혜를 갚겠다고. 응 ”
“기억해 둘게.”
한혁이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먼저 걸어갔다.
대로변에 나란히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한혁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세림에 반년 전에 스카우트되었다고 했지 ”
“응.”
“그 전에는 어디 있었어 ”
“뉴욕, 백화점.”
“아. 아까 매장 일했다 그랬지 ”
“잠시동안. 이후론 매장은 아니었고.”
“5년 동안 줄곧 뉴욕에서 일했어 ”
“응.”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한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한혁 낯설게 느껴져 서진은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재수 없는 남자도 학생도 아닌, 좀 전까지 약간은 싱거운 농담을 뱉던 사람도 아니었다. 선들선들 불어오는 밤바람에 셔츠가 날려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 봄이지만 밤바람은 겨울처럼 싸늘하다. 서진은 재킷을 여몄다. 5년 전 겨울, 보스턴을 떠나 뉴욕으로 무작정 떠나는 제 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얼음 같은 바람을 안고서 눈길을 밟아 나갔다.
***
매섭게도 추운 겨울 날, 윤서진은 보스턴을 완전히 떠났다. 누군가는 그랬다 했다. 처음 하버드 교정에 들어선 순간 세차게 파고드는 바람이 더없이 좋았다고. 비록 두터운 모직 코트를 뚫고 들어오며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었지만, 그 바람으로 내부의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고작 며칠도 되지 않는 보스턴의 화창한 봄날이 아니라,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겨울, 그래서 입이 델 정도로 뜨거운 차를 텀블러에 담아 쥐고 에이는 찬 공기에 터질 것 같던 손과 입을 녹여야만 했던 보스턴의 겨울은 두 번을 겪었어도 여전히 서진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적어도 오늘만큼 매서운 날은 없었지만…….
단언하건대 보스턴의 그 겨울과 무시무시한 코스 웍의 로드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정기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에게 있어, 하버드와의 인연은 처음부터 그리 강하지 못했다. 정기훈과도.
서진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움켜쥐었다. 바람은 살벌하게 불고 가슴은 이미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제 안녕이다. 보스턴도 하버드도 그리고 정기훈도.
***
서진은 서울대 석사 1년차에 접어들 때 하버드 경제학 박사 과정 어드미션(admission; 입학 허가)을 받았다. 석사 과정 동안 한 번 더 지원을 해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깨고 일찍 날아든 행운에 가장 기뻐한 이는 서진의 아버지였다. 학계에서는 인지도를 가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지만 국내파 천재 박사라는 찬사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걸림돌이 되곤 했다. 자랑스러운 둘째 딸이 어린 나이에 하버드 경제학 박사 어드미션을 거머쥐자,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격 어린 포옹을 하였다. 서진 역시 못지않은 흥분으로 들떴지만 하버드란, 경제학 박사란, 그녀에게 다른 의미로 벅찼다. 정기훈 선배 곁으로 간다. 이제 이메일로 전화로 애달파 하는 장거리 사랑을 끝낼 수 있다. 서진의 가슴은 박자를 놓치고 펄쩍펄쩍 뛰었다. 급히 방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오빠, 나 어드미션 받았어!”
“와, 서진아! 결국 해냈구나! 축하해.”
새벽잠을 깨운 서진의 말이었지만 기훈 역시 더할 수 없이 기뻐했다.
“이제 여름이면 네가 여기로 온다니, 믿기지 않아.”
***
기훈이 서진을 처음 만난 날은 그녀가 열일곱이 되던 해, 무더웠던 여름날이었다.
“교수님.”
기훈은 노크에도 답이 없자 조심스레 교수실 문을 열어 보았다. 교수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책상 옆 의자에는 여자애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이 구독하시는 저널을 읽고 있던 중이었는지 무릎에는 꽤 어려운 영문 경제지가 놓여 있었다. 여학생은 약간 놀란 눈으로 기훈을 바라보았다. 분명 고등학생일 텐데, 그리 어려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갸름한 얼굴에 냉정해 보이는 눈매가 조금은 긴장하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
여자애는 뺨을 조금 붉히더니 귀찮다는 듯 경제지로 다시 눈을 돌렸다.
“교수님 안 계시네요. 조교분도 없던데.”
“네, 방학이라서. 그리고 아빠는 잠깐 옆에 교수님 방에 가신다고……. 금방 오신댔어요.”
사무적인 어투였지만 끝머리가 흐릿하게 뭉쳐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끝까지 단추를 채워 올린 하얀 셔츠 위의 목덜미가 발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예쁘고 귀여웠다.
“교수님 따님이세요 ”
“네.”
“저는 경제학과 3학년 정기훈이에요. 윤 교수님 따님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듣던 대로네요.”
“아니에요.”
여자애는 금세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표정으로 바뀌어 기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둘째 딸, 윤서진이에요. 예쁜 딸이 아니에요.”
작은 입술에서 또박또박 나오는 말이 너무 의외라 기훈은 웃음이 터져 버렸다.
윤서진, 둘째 따님 이름이 서진이군.
서진은 웃음소리에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꼭 다물더니 금세라도 나가 버릴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훈이 뭔가 변명을 하려 할 때, 문이 열리고 윤철수 교수가 들어섰다.
“어, 정기훈 군, 웬일인가 ”
“교수님께 일전에 빌려 갔던 책들 돌려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래. 아 참, 인사했나 내 딸인데 윤서진. 지금 외고 1학년.”
“인사했습니다. 굉장히 똑똑한 따님 같은데요.”
“하하, 뭐 공부는 웬만큼 하는데 가 봐야 알지.”
교수는 서진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그녀는 꼼짝도 않고 굳은 듯 서 있기만 했다.
“아빠, 나 이제 갈래요.”
“벌써 ”
서진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교수실을 나섰다.
불만스런 걸음이 복도에 텅텅 둔중하게 울렸다.
도대체 왜 내 콤플렉스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 게다가 아빠 제자한테 말해 버린 거야.
무척이나 창피했다. 연년생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서 둘째 서진은 자연스레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올망졸망 셋이 나란히 있을 때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언니와 동생이었다. 특히 언니 서연은 어디를 가든 화려한 꽃처럼 시선을 잡아끌었고, 상냥한 웃음과 매력적인 화술은 누구든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진도 아주 미운 얼굴은 아니었다. 나란히 있는 남매를 보면 사람들은 주눅 든 서진에 대한 가벼운 위로를 섞어 대수롭지 않게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곤 하였다.
‘아, 둘째는 깨끗하고 지적으로 생겼네. 근데 첫째랑 셋째 둘은 되게 닮았는데 둘째는 신기하게 안 닮았다.’
서진은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네. 유전자가 이렇게도 조합이 되어요.’
언니 서연과 남동생 서훈 덕분에 미운오리새끼가 되어 버렸다고 자학하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다. 하지만 콤플렉스는 묻어 두는 것일 뿐 지울 수는 없나 보다. 오늘 서연을 떠올리는 그 남자 앞에서는 불쑥 화가 나 버렸다.
‘그렇다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더운 날 공부 좀 했다고 더위라도 먹은 거 아냐 ’
천천히 첫 계단을 내려서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날 부르는 건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정기훈이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앞에서 올려다본 그의 깔끔한 턱선과 반듯한 이마는 초라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근사했다.
“집에 가는 거예요 ”
“……네.”
“저도 가는 길이에요. 괜찮으면 모셔다 드릴게요.”
깍듯하게 높임말을 쓰는 단정한 말투가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한 번 더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름 모를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날씨가 많이 더운데,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 걸어야 하거든요.”
“저도 알아요. 아빠 방에 여러 번 왔었으니까요.”
튀어 나온 대답은 톡 쏘는 재미없는 말투였다. 심심한 외모보다 더 이성의 관심을 잘라 버리는 그 말투.
뭐, 난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서진은 우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목이 어느 순간 비딱하게 꺾이나 싶더니 발목으로부터 머리까지 지근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악.’ 소리를 지르며 서진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대로 계단을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아찔함에 눈을 감는 순간 단단한 힘이 어깨에 느껴졌다. 기훈이 급히 어깨를 잡아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방학이라 한산한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험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만이 서진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니, 백 명 앞에서 더 꼴사납게 엎어져 구른다 해도 눈앞의 이 남자가 없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아요 ”
“……네.”
서진은 그의 손을 떨어내며 한 발 움직이다가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혀를 깨물어 간신히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단단히 접질린 발목이 무척이나 시큰거려 왔다. 야무지게 꾹 다문 입술과는 다르게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 고였다.
“발목 다친 거 같은데 어떡하지.”
뻗쳐 오는 기훈의 손을 밀쳐냈다.
“미안해요.”
이유 없는 사과를 하는 순한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기어이 샌들로 툭 떨어지고야 말았다. 눈물을 본 것일까. 그가 눈을 맞추려는 듯 무릎을 구부렸다. 더 이상 창피한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손을 뻗어 계단 난간을 가까스로 잡고 일어섰다.
“괜찮아요.”
다행히 침착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려갈 수 있어요 ”
근심스런 눈빛이 더 무참했다. 선량한 눈을 더 이상 보지 않고 난간에 힘을 더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저절로 비명이 터질 만큼 발목이 시큰거려 왔지만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 발짝 움직이다가 다시 멈춰 숨을 고르는 사이, 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있는 가방을 받아 들고는 한 팔로 어깨 아래를 감쌌다.
“괜찮습니다.”
“계단 내려가는 것만 도울게요.”
그가 먼저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한 발씩 천천히, 천천히……. 감출수록 커지는 숨소리가 계단 통로에 울려 더 크게 되돌아왔다. 남자의 팔 힘이 그녀의 발목으로 향하는 체중을 상당히 줄여 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통증보다 그녀를 더 괴롭힌 건 그녀의 어깨로, 팔로, 등으로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단단하고 큰 남자의 낯선 느낌이었다. 어깨 뒤쪽이 언제부터 이렇게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남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가슴 근육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른쪽 어깨부터 팔 아래까지 부르르 떨렸다.
경제학과 사무실이 있는 옅은 핑크색의 사회과학대 건물 정문을 빠져나가면서 기훈이 둘렀던 팔을 풀었다.
“차 가지고 올게요. 잠깐 여기 서 있을래요 ”
“아니요, 괜찮습니다. 걸어갈 만해요.”
서진은 사회대 올라가는 길목에 설치되어 있는 차단기를 떠올렸다. 교수와 교직원 마크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여기 서 있어요. 요 앞에 있으니까 금방 가져올게요.”
“여기 앞에 차단기가.”
“괜찮아요. 아픈 사람이 있다고 사정해 볼 테니.”
기훈은 찡긋 한번 해 보이고는 서진의 것과 제 가방을 나란히 두고 걸어 나갔다.
“저기, 가방요.”
“올 때까지 맡아 줘요. 무거워서.”
기훈은 다시 한 번 서진을 돌아다보며 웃었다. 어둑하고 칙칙한 건물 정문이 환해질 만큼 멋진 웃음이었다. 서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머리를 식히러 나온 남학생들이 툭툭툭 우유 팩를 차며 크하하하 웃어 대는 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서진의 발아래, 두 개의 가방이 마치 어깨를 서로 기댄 것처럼 다정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잠시 후 차단기 옆 관리 아저씨에게 사정 이야기를 잘했는지 기훈이 정문에 최대한 가깝게 차를 주차하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배경에서 기훈만이 홀로 분리된 듯하였다. 흰색 폴로 면 셔츠, 베이지 색 면바지, 이마에 살짝 솟아오르는 작은 땀방울까지 햇빛에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