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77
77. 선의의 팸플릿
때는 2031년 9월 10일. 헌터 옥션이 열리는 당일 새벽이었다.
수많은 NEVER 블로그 헌터 옥션 후기를 샅샅이 살피며 미리 사전 조사를 끝낸 은하는, 한 블로거의 조언대로 새벽 3시부터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증 배지 발급에 꼬박 하루를 버릴 거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 정오가 되기 전에 배지를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다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칩 좀 바꾸려고요.”
바로 매서운 자본주의였다.
조금 전, 은하는 입장하자마자 환전소를 찾았다.
“환영합니다. 얼마나 환전해 드릴까요?”
안내원의 상냥한 접대용 미소 앞에서 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철저한 예습 덕분에 경매에 칩이 필요하다는 것도, 환전소에서 코인이나 현금, 심지어는 신용카드로 칩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어느 정도를 가지고 있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까 앞사람이 칩 몇천 장을 환전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유물 아이템 정도를 낙찰하려면 넉넉한 편이 좋겠지.
생각을 마친 은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1만 장이요.”
듣기로는 칩으로 환전하는 것에는 상당한 수수료가 따른다고 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기롭게 말한 은하와는 달리,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은하의 행색을 훑은 안내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죄송하지만 배지를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은하는 아침에 발급받은 배지를 안내원에게 내밀었다. 배지 색상은 흰색. C급 이하 헌터라는 표시였다.
“확인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흰색 배지로 환전 가능한 칩은 최대 1천 5백 장입니다.”
“1천 5백 장이요?”
“네, 그렇습니다.”
덜컥 굳어 버린 은하 앞에서 안내원이 생긋 웃었다.
“최대치로 교환 원하신다면 그렇게 도와드리겠습니다. 혹, 더 많은 칩이 필요하시다면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플리마켓에서 타 헌터들에게 아이템을 판매해 직접 칩을 버실 수 있답니다. 매대 대여소 위치 안내도 함께 도와드릴까요?”
“…….”
안내소를 나온 은하는 우두커니 제자리에 섰다. 세상에, 랭크별로 환전할 수 있는 칩의 개수까지 다를 줄이야.
현대에서 헌터의 랭크가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팔 만한 아이템이 있었던가.’
우선 확인부터 해 보자.
가볍게 허공을 두드리자 공중에 활성화되는 몇 개의 아이콘. 그중 가장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가방 아이콘을 머뭇머뭇 터치해 보았다.
띠링.
[인벤토리를 불러옵니다.]얼마 만에 열어 보는 아이템창이던가.
몬스터 고기를 뜯어 먹고 놈들의 가죽을 이불 삼아 생활하던 시절에는 줄기차게 열어 댔지만 언노운 게이트를 탈출한 이래로는 단 한 번도 인벤토리를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불러올 정보가 많습니다.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 – – – Loading – – – ]뜬금없이 로딩창이 팝업됐다.
인벤토리 하나 불러오는 데 로딩까지 할 일인가?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약 5분이 지나서야 겨우 인벤토리창이 열렸다. 그런데.
“……?”
눈앞에 떠오른 인벤토리창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폭은 좁은 주제에 길이는 거의 땅에 닿을 기세.
은하는 인벤토리창을 천천히 아래로 끌어당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흑호의 가죽 x9999] [흑호의 가죽 x9999] [흑호의 가죽 x9999] [흑호의 가죽 x9999] [흑호의 가죽 x9999]…….
이내 세는 것을 포기하고 휙! 손가락을 아래로 빠르게 내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
다시 한번 스킵.
[단단한 짐승뼈 x9999] [단단한 짐승뼈 x9999] [단단한 짐승뼈 x9999] [단단한 짐승뼈 x9999]…….
언노운 게이트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몸 아니랄까 봐, 인벤토리창에는 야수형 몬스터에 관련한 아이템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붉은 결정 x186] [알 수 없는 독액 x73] [찢어진 날개 x11]등등. 언제 어디서 얻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잡템들이 한가득.
인벤토리를 살펴보던 은하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래도 팔릴 만한 아이템 한두 개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뿐이라고?’
인벤토리창을 응시하는 은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딱 한 가지, 제일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긴 해.’
‘픽시 파우더.’
귓등을 스치는 목소리. 제자리에 선 채 꿈쩍도 안 하던 은하가 천천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전 10시. 이미 북적거리기 시작한 주변에서는 헌터들이 하나둘씩 매대를 펼치고 있었다.
[선택한 아이템을 인벤토리 밖으로 꺼내시겠습니까?] [확인하셨습니다.] [불러올 정보가 많습니다.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 – – – Loading – – – ]……역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 * *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온 두 사람.
아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런 잡템을 몇만 개씩이나 들고 다니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어요.”
게다가 이 언니, 도대체 인벤토리 용량이 어느 정도 되는 거지?
이 많은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다 수용하려면 적어도 A급 이상 헌터거나 관련 특성이 있어야 할 텐데……. 예를 들면 아연의 ‘보물 창고’ 특성이라든지 말이다.
아, 어쩌면 이 언니도 나와 같은 신수와 계약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연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걸 다 팔아 치우려고요?”
“응.”
“그렇게 칩이 많이 필요해요? 대체 뭘 사려고요? 뭐, 유물 아이템이라도 뽑게?”
“…….”
“…….”
침묵.
“……진짜?”
은하는 대답 대신 매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눈을 끔뻑이며 은하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아연은, 이내 배를 잡고 뒹굴기 시작했다.
“푸핫! 대박! 언니, 진짜 짱이다.”
F급 헌터가 언노운 게이트에 뛰어들지를 않나. 별 쓰잘머리 없는 아이템을 몇만 개씩이나 들고 다니질 않나. 유물 아이템을 노리고 헌터 옥션에 오지를 않나.
신기한 구석은 저 이상한 옷차림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이 언니, 재밌다.
“후우. 진짜 한참 웃었네. 그래서 언니는 무슨 아이템을 찾고 있는데요?”
부스럭부스럭…….
매대 위 아이템들을 진열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은하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픽시 파우더.”
“픽시 파우더라면…… 그 유물급 회복 아이템이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은하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귀한 아이템이야?”
“뭐, 귀한 것도 그렇지만. 매년 옥션 때마다 영웅 등급 이상 회복 아이템을 모조리 쓸어 가는 단체가 있거든요. 그것도 황당할 정도로 비싼 값에.”
거기까지 이야기한 아연이 스르륵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와 소곤소곤 속삭였다.
“언니도 들어 본 적 있죠? 백야가 ‘영원의 저주’에 걸렸다는 소문.”
백야요, 백야. 늑대의 주인. 그리 덧붙인 아연이 다시금 은하에게서 거리를 벌린 뒤 어깨를 으쓱였다.
“뭐, 경매는 비공개로 진행되다 보니 킹리적갓심일 뿐이지만.”
어쨌든 꿈도 꾸지 말란 소리.
원래부터가 유물급 아이템은 경쟁이 치열했다. 그만큼 선입찰할 때 소모되는 칩의 개수도 상당할뿐더러…….
“이 잡템들을 다 팔아서 칩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정작 코인이 없으면 경매 초반에 바로 나가리죠.”
아연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쏙 입에 넣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픽시 파우더가 필요해.”
“…….”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던 아연이 힐끔 은하를 쳐다보았다. 이 언니, 내 말 듣고 있었던 거 맞아?
“재작년에 픽시 파우더가 나오긴 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당시에 최고 낙찰가가 무려 15만 7천 코인이었어요.”
달러로만 140만 상당, 한화로는 약 160억 원의 가치였다.
“상관없어.”
은하가 짧게 답했다.
“꼭 구해야 해.”
그게 얼마든.
잔잔한 목소리에서 농담이나 허풍의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정말 그녀에게 그 정도의 코인이 있을 거라 믿어 버릴 정도로 진지한 얼굴.
“…….”
“…….”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
‘수술비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돈…… 돈 때문에 원장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에요? 살 수도…… 있었는데……?’
우적, 입속 사탕을 어금니로 깨부순 아연. 그녀의 뺨 위로 속눈썹이 옅은 그늘을 드리웠다.
“……흠. 그래요?”
아연은 천천히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 필요하겠네요.”
돌연 아연이 은하에게 내민 것은 얇은 책자였다.
“B급 이상 헌터에게만 배부되는 스페셜 팸플릿. 이게 있으면 몇 시 어디서 어떤 물품이 나오는지 대부분 알 수 있거든요.”
정말 놓치기 싫은 매물이 있을 경우엔 사전 체크는 필수니까. 아연이 덧붙였다.
“덕분에 원하는 아이템이 있는 저랭크 헌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걸 구매하려고 들죠.”
“얼마야, 그거?”
은하가 물었다. 만일 아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팸플릿 속 어딘가에 픽시 파우더에 대한 정보도 기재되어 있을지 몰랐다.
“작년엔 장당 3천만 원 정도였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사람이 많으니까 아마 적어도 4천에서 5천 정도는 하지 않을까요? 파는 사람 맘이긴 하지만.”
5천…….
은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연이 모르도록 은근슬쩍 뒤로 돌아, 옷가지를 뒤적여 펭귄 지갑을 확인해 보았다.
달칵.
펭귄 부리를 열자 꾸깃꾸깃한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가 보였다. 오는 길에 택시를 타 버리는 바람에 남은 돈은 이게 전부였다.
‘물론 계좌에 돈이야 있지만…….’
은하는 고민에 빠졌다.
오피스텔 식탁 위에 올라와 있던 통장. 그곳에는 은하가 차마 셀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이 들어 있었다. 계약 파기를 하면서 시우가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막상 그 돈을 쓰는 것을 주저했다. 제대로 된 계약 이행 없이 덜컥 받아 버린 목돈이었으니까.
더구나 고작 팸플릿 한 장을 사겠다고 몇천만 원을 한 번에 지불하는 것은 더더욱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일.
“…….”
한편, 아연은 곁에서 돌연 굳어 버린 은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팔겠다는 말 한 적 없는데.”
톡, 톡.
팸플릿으로 두어 번 입술을 가볍게 두드리던 아연이 씩 웃었다.
“그냥 주려는데.”
은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냥 준다고?
“난 어차피 다 외웠거든.”
시원스레 내밀어진 5천만 원 상당의 팸플릿.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됐어요.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받으라니까.”
장사 방해한 건 다시 한번 쏴리. 배시시 웃은 아연은 휙 등을 돌렸다.
따흑, 내 5천만 원.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간만에 착한 일도 좀 해 봐야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저물어 가는 노을.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연이 이윽고 가볍게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또 만나요, 언니.
흔들흔들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아연. 그 뒷모습을 주시하던 은하는 스르륵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단발머리 소녀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